모이제스 나임의 '권력의 종말'
‘권력의 종말’이라니, 한 번도 권력에 대해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권력’이라는 단어를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는가?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능력, 독재, 지배, 등, 권력을 대표하는 것들 중 많은 것들은 어쩌면 21세기 민주사회의 입장에서는 조금은 위험하고 꺼려지는 것들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모이제스 나임은 ‘권력의 종말’을 통해 권력은 부식되고 있으며 이것은 우리 사회에 큰 위험을 부를 것이라 이야기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정치권은 권력을 빨리 잃어버리고 있으며, 예전보다 더욱 다양하고 작은 미시권력으로부터 도전받는다. 그 어느 권력자도 절대적인 권력을 막무가내로 행사하고 밀어붙일 수 없다. 국제 관계에서도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등 과거의 강대국들은 과거 약소국으로 여겨졌던 국가로부터 거부권을 행사당하는 일이 점점 많아졌으며 예전의 헤게모니는 더 이상 국제적인 절대권력을 행사할 수 없는 포스트 헤게모니 시대로 접어들었다. 정치뿐이 아닌 종교, 기업, 심지어는 자선활동 마저도 절대적인 시장 우위를 지니고 지배력을 가지던 기성 권력들은 수많은 소규모 신규 도전자들에게 위협받는다. 21세기 현재에는 새로운 기업이 부상하고 기성 대기업이 몰락하는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으며, 심지어는 기업 내에서도 최고경영자가 사임하는 주기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
권력이 부식되고 있는 원인으로 나임은 양적 형명, 이동 혁명, 의식 혁명을 꼽는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것’을 누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양적 혁명). 또한 그 어느 때보다 지역과 국경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이동 혁명). 자유로운 이동은 모든 지역의 인구 구성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으며 권력이 작용하는 모든 부분에서의 인구 분포 - 유권자, 소비자, 투자자, 심지어는 기부자들까지도 – 를 완전히 뒤바꾸어놓았다. 미국 대선에서는 진보적인 ‘미국인’뿐 아니라 국경을 넘어 미국 국적을 취득한 수많은 이들이 민주당에 표를 던진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 어느 것도 당연하지 않게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의식 혁명). 사람들의 기대수준은 꾸준히 올라가고 있으며 모든 이들이 기존 권력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던진다. 지금의 현대사회를 만들어낸 수많은 혁명과 혁신을 통해 사람들은 그 무엇도 절대 당연하지 않으며 (could not be taken for granted) 바뀔 수 있다고 여긴다. 이 세 가지 혁명은 기존의 거대권력의 힘에 눌려 주목받지 못하던 미시권력(micropower)들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기존의 권력들로부터 많은 것들을 빼앗아오고있다.
나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권력에 대해 한 번도 이런 측면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인류가 권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싸워온 시간 ‘권력의 부식’ 은 권력이 분산된, 민주적인 사회로 가는 길이 아닌가? 어쩌면 권력의 종말이 사회에 큰 위험을 부른다는 주장은 권력의 분산을 원하지 않는 보수적인 입장을 대변하는 말이 아닐까?
권력의 분산과 민주화는 21세기의 사회의 정의로운 과제로만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모든 것에는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우리는 나임이 그의 책 제 10장에서 제안한 아래의 곡선 (이하 U-curve)을 주의깊게 살펴봐야 할 것이다.
U curve의 가로축에는 권력이, 세로축에는 정치, 사회, 경제적인 안정성이 나타나있다.
우리의 세계는 근대, 근현대를 거치며 ‘민주적이지 못한’ 사회로부터 염증을 느껴왔으며, 민주화를 통해 권력의 독재, 위계적인 통치 등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에 따라 권력은 부식되고, 정치, 사회, 경제적 안정이 자리를 잡았다. U curve의 왼쪽 극단에 있던 인류는 끊임없이 오른쪽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고, 우리는 권력의 쇠퇴와 분산이라는 측면의 부작용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U-curve의 한 가운데 정점을 지나 비탈길을 따라 조금씩 내려가고 있는 문턱에 있는지도 모른다.
나임은 그렇다면 권력의 부활과 독재, 완벽히 중앙집권화된 권력, 그리고 크기로부터 힘이 나오는 중세의 관료제가 세상을 다시 지배하기를 바라는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모이제스 나임이 제시하는 방향은 첫번째로, 권력이 쇠퇴하고 있으며 그 누구도 권력의 흐름과 방향을 예측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있음 (그리고 그에 대한 위험성이 큼)을 인지하는 것. 둘째는 기존의 ‘권력들’ (특히 정치권력)이 빠르게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다.
수많은 미시권력들이 우후죽순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나임은 정치적이고 중대한 사항에 대한 실행력을 보장받기 위해 우리가 권력을 신뢰하고 믿을 필요가 있음을 주장한다. 이는 어찌보면 굉장히 보수적이며, 민주적 움직임으로부터 권력을 보호하려는 발언처럼 들릴 지도 모르겠으나 나임이 말하는 바는 그것이 아니다. 확실히 과거에 비해 다원화되고 국제화된 이 사회에서, 중대한 사안에 대한 실행력을 가지고 이행할 권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책임한 권력의 집중은 막되 권력의 신뢰 회복을 통해 권력에 힘을 실어주고 효과적 정치를 위한 방안을 찾는다’ 이다. 쉽게말해 U-curve의 양 극단 사이에서의 줄타기를 잘 해야 한다는 말이다.
작가의 이 결론이 어찌보면 구체적인 해답이 되지 못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두마리 토끼를 다 잡을 것인가? 어떻게 정치권력의 신뢰를 회복할 것인가? 그러나 구체적인 해답을 찾는것은 우리 시대의 과제이며,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올바른 목표와 방향의 설정이 필요하다. 나임은 적어도 우리가 기존에 미처 간과하고 있었던 새로운 목표와 방향을 제시했다. 어쩌면 우리 사회는 근현대의 수많은 역사적 흐름 속에서 민주화와 권력의 분산에만 집중해왔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권력의 분산을 맹목적인 정치적 목적으로 생각해왔을 수도 있다. 근대 이후의 대부분의 시기에는 권력의 집중보다 권력의 분산이 훨씬 더 성취하기 어려운 목표였기 때문이다. 이는 독재정권들의 몰락과 함께 오늘날의 Vetocracy (거부권 정치)도 함께 낳았다. U- curve를 기준으로 볼 때, ‘좌’ 이든 ‘우’이든 어느 한 쪽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것이 정치적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정치 이외의 다른 권력들은 어떨까?
결국 나임의 이 책을 읽고 가장 크게 와닿았던 점은 이 시대 우리의 정치 목표는 U-curve의 양쪽 극단 사이에서의 균형을 찾기위한 노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마지막까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다.
‘과연 이 목표를 정치적인 분야를 넘어 적용하는 것이 현명한 생각일까?’이다.
나임이 말하는 권력 쇠퇴의 가장 핵심적인 요인은 ‘양적 혁명, 이동 혁명, 의식 혁명’ 이다. 이제 기성 정치권력들의 훌륭한 대안들은 시민들에게 기성 정치권력을 불신하고 자유롭게 비판하며 거부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그러나 기존의 대기업, 금융권이나 기술계의 거물(behemoth)들이 과연 소비자들의 신뢰를 잃었기 때문에 권력이 분산되었는가? 뉴욕 금융권 종사자들의 도덕적 해이와 탐욕에 대한 경종을 울렸던 ‘월가를 점령하라’운동이나 2007년의 리먼브라더스 파산으로 인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혹은 최근 발생하는 대기업의 불명예스러운 게이트 (삼성의 국정농단 연루나 애플의 배터리게이트 등)을 보면 소비자들의 충분히 기성 권력들이 소비자들의 신뢰를 일었다는 것은 어느정도 사실이나, 애초에 이들이 미시권력 (IBM이나 코닥보다 더 짧은 역사를 가지고도 이들을 위협한 페이스북이나 구글, 그리고 우버와 같은 떠오르는 수많은 스타트업 괴물들)로부터 위협받게 된 원인은 소비자의 불신이 아니다. 양적/이동/의식 혁명으로 인해 소비자의 선택의 폭이 넓어짐과 동시에 진입 장벽이 낮아져 신규 소규모 경쟁자들도 ‘그들만큼(혹은 그들보다 더) 잘 할 수 있기 때문에’ 권력의 장벽이 허물어지는 것이다. 나임이 권력의 쇠퇴로 인한 거대 기업 지배의 몰락을 예견한다. 그렇지만 과연 이러한 거대기업ㅂ의 쇠퇴가 사회/경제적인 아노미를 일으킬까? 나는 오히려 반대로 두 가지 측면에서의 긍정적인 작용이 발생한다고 믿는다. 첫째, 오히려 혁신의 장벽이 무너진다. 그동안 혁신의 선두주자는 대기업, 그리고 대규모 자본의 투자를 받는 연구소가 주를 이뤄왔다. 변화는 진화가 아닌 혁명으로부터 온다(Change tends to be revolutionary, not evolutionary)고 말한 Larry page는 ‘구글은 어떻게 일하는가’에서 기업의 규모와 자본이 커질수록 기업은 그동안 해왔던 것만을 하려 하며, 획일화된 프로세스와 이를 통한 자본의 축적에 안주해 ‘아주 작은 진화’incremental change에만 매달리게 된다고 꼬집었다. (그래서 구글의 규모가 커지는 것 역시 두려워했다.) 그러나 기업 지배가 허물어지며 새로운 소규모 IT 기업(으로 출발했지만, 현재는 거인이 된)들이 혁신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기성 대기업들 역시 살아남기 위해서는 발을 맞춰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둘째, 기존 규모의 경제에 기반한 기업 지배의 부작용이 해소될 것이다. 기업이 시장을 지배하고, 독점하게 되면 결국 선택의 폭이 좁아지는 것은 소비자다. 그러나, 더 이상 대기업은 시장을 ‘절대적으로 지배’하지 못한다.
로버트 쉴러는 ‘새로운 금융시대 (finance and good society)에서 ‘금융의 민주화’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정보와 능력의 우위를 통해 리스크를 일반 투자자들에게 떠넘기고 큰 수익을 올리는 금융권을 비판한다. 나는 현재로써는 정치적인 부분에 비해 금융, 경제, 그리고 기술적인 부분에서는 기성 권력들에게 유리한 부분이 상대적으로 많았다고 생각한다. 아래처럼U-curve를 그린다면 정치적인 면에서는 정점을 기준으로 오른쪽을 향해 조금식 하강하고 있지만, 금융, 경제, 기술적인 부분에서는 정점을 향해 올라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전자의 경우 권력의 분산은 오히려 긍정적인 작용을 할 것이라고 기대된다. 정치 권력이 쇠약해질 때처럼, 대기업의 권력이 쇠약해진다고 해서 과연 아노미가 초래될까?
정치와 경제 사이에 이러한 간극이 벌어지는 이유는, 민주 정치의 본질은 합의와 결정에 있는 반면 자유 시장 경제의 본질은 경쟁에 있기 때문이다.
거부권정치 (Vetocracy) 는 권력을 독재를 방지하는 것을 넘어 때론 필요한 합의와 결정에 이르지 못하게 막는다. 구성원 모두를 만족시키는 합의는 거의 없지만 (압도적 다수 – supermajority- 에 의해 합의하더라도 3분의 1은 만족하지 못한다), 한명 한명의 불만족이 그 어느 때보다도 대두되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때로는 합의와 결정을 위해 권력의 행사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경쟁을 통한 가치 창출에 있어서 오히려 절대적 권력 (market dominator)은 생산적인 경쟁을 저해할지도 모른다.
다시 정치 권력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어쨌거나 결론은 권력은 쇠퇴하고 있으며, 우리는 이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임도 말했듯 권력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작용할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미래를 대비하는데 있어 권력이 쇠퇴하고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은 분명 다르다. 우리 시대의 핵심적인 정치 목표는 맹목적인 권력의 분산도, 부활도 아닌 U-curve의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부패와 불신으로 인한 정치 권력의 비판은 정치권력의 몰락이 아닌 정치권력의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
지금까지 사회와 기술이 변화한 것에 비해 정치는 크게 변화(혹은 혁신)하지 못했다. 극단적인 예시로 여전히 정치가들은 국민의 표심과 정당 사이에서 눈치를 보고 있다. 정치조직은 충분히 발빠르고 유연하게 움직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은 수많은 사회 단체에 지지자들을 빼앗기고 있다. 그러나 나임은 우리가 지금 바로 새로운 정치 혁신의 파도 앞에 서 있다고 말한다. 정치와 정치 권력이 변해야 한다면 그 때는 바로 지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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