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레꽃이 곱게 피는 5월, 찔레꽃은 내겐 추억이다. 오늘 사랑하는 큰댁 형님이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결혼해서 반세기라는 세월, 삶을 공유해 온 형님도 내게는 추억이며 내 삶의 일부였다. 여든다섯 해를 세상에서 살다가 이제는 만날 수도 없는 먼 곳으로 가시고 말았다. 삶은 영원한 건 없다지만 정작 사랑하는 가족과의 이별은 아프고 슬프다. 내 삶의 한 조각이 소멸되는 느낌이다. 언제나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희로애락을 같이 했던 날들.
형님은 이십 대에 결혼하여 종갓집 맏며느리로 자식 다섯 낳아 기르시고 층층시하 어른들 까지, 일 속에 묻혀 살았다. 어른 들 살아 계실 때는 찾아오는 손님들 때문에 밥상 차리는 일이 숱하게 많았고 한분 한분 돌아가시고 나서 일 년에 제사는 일곱 반상이나 지내야 했다. 나 역시 둘째 며느리지만 결혼 55년 제사를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제사 음식을 같이 해 왔다. 하여간 시댁은 제사가 진심인 집안이었다.
옛날 세상, 며느리의 숙명처럼 여기고 서로 위로하며 반세기를 같이 살아온 내 육친 같은 형님.
조상 모시는 것이 그렇게 중요했던가, 사람이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한계치가 있다. 너무 힘들면 몸이 신호를 보낸다. 옛 말에 골병든다는 말이 있다. 예전 며느리 들은 골병이 들 정도로 일 속에 살아왔다.
나이 들어가면서 아프기 시작한 형님, 허리가 아파 수술을 했고 수술 후유증으로 더 아파 전국 유명한 병원은 모두 찾아다니실 정도였지만 연세 들고 더는 손 쓸 수 없어 집에만 머물다 요양병원에 들어가신 지 2년이 된 후 홀연히 세상을 떠나셨다. 아마도 당신이 예견이라도 하신 듯 먹는 걸 거부하시고 생을 마감하지 않았나 싶다.
사람은 살아야 할 명분이 없으면 삶의 의욕을 잃는다.
우리 모두는 때가 되면 누구나 가야 하는 저승길이지만 어떻게 생과 사를 마무리를 해야 할지, 나이 들면 그 일이 숙제처럼 가슴에 않고 살고 있다. 가까운 가족과 이별은 가슴이 미어지는 일이다. 형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정을 베풀었다. 사람이 잘 살고 못 살고는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 알게 된다. 종갓집 며느리로 힘들었지만 주변에서 많은 존경도 받았다. 장례식장은 형님 가시고 잊고 살던 친척들이 찾아와 추억을 뒤돌아보는 시간들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어렵지만 잘 살아야지!!
산소 에서 주인 잃은 하얀 작약꽃이 더 서럽다
한 줌의 제가 되어 땅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산자와 이별을 하는 순간, 목이 메어 한번 부르고 형님을 보낸다. 부디 저 세상에 가시어 아프지 말고 행복하셨으면 하는 소망으로 두 손을 모은다. 허망하고 헛되고 헛되다는 라는 성결구절이 생각이 났다. 형님은 땅에 묻히고 산자들은 덥다고 나무 그늘에 서 있으려니 바람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르는 체 살랑살랑 불어 볼을 스친다.
나는 그 바람마저 슬픔으로 밀려온다. 이승과 저승의 사이 간격을 어느 만큼 일까? 도무지 알 수 없는 생과의 이별. 나는 땅속으로 들어가는 유골함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이 난다. 형수를 보내는 남편의 말 또한 내 슬픔의 씨앗처럼 아프다. " 형수 먼저 가 계셔요, 나도 곧 따라갈게요."
한 사람의 생이 끝났다. 딸들이 부르는 "엄마" 소리가 더 애 달프다. 이 땅의 며느리의 굴레는 우리 세대로 끝나기를 소망한다. 일 속에 묻혀 살았던 날들. 이제는 모든 걸 내려놓고 편히 쉬시길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