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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고즈넉한 길상사

by 이숙자

오랜 시간 병원과 집에만 머무는 엄마가 안 돼 보였는지 둘째 딸과 사위는 나를 바람 쏘여준다고 성북동 길상사를 가자고 차에 태운다. 연휴라서 그런지 아니면 조금 이른 시간이라서 그런지 서울 시내는 조용하다. 광화문에도 데모하는 사람도 없고 삼청동길도 한산하다. 젊어서 퍽이나 즐겨 다니던 곳들, 추억들이 주렁주렁 매단 길들이다. 서울만 오면 가고 싶은 곳도 많았던 젊은 시절, 그땐 참 좋았다.


길상사


법정스님의 영혼이 머무는 곳. 길상사는 도심 속에서도 고요을 간직한 사찰이다. 항상 맑고 향기로운 삶을 살라고 대중들의 마음을 이끌어 주시던 법정스님의 숨결이 머물러 있는 곳이기도 하다.


몇 년 전 여름에 가족들과 함께 와 보았던 길상사를 겨울에 찾아오니 느낌이 다르다. 사람의 발길도 드문 드문 호젓하고 고요하다. 쌩한 겨울바람이 오히려 정신을 맑게 한다. 나이 들어가면서 좋아하는 공간도 달라진다. 시끄럽고 화려한 곳 보다 조용하고 사색할 수 있는 공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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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을 천천히 한 바퀴 돌면서 법정 스님이 머물렀던 진영각을 찾았다. 예전에는 툇마루에 앉아 잠시 쉬었다 왔는데 이번에는 겨울이기도 하고 날씨가 추워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가 보았다. 맨 먼저 눈에 띄는 스님의 사진과 스님이 입으셨던 다 헤어진 먹물색 두루마기가 눈에 띈다. 낡은 옷이 멋지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주인 잃은 옷이지만 그 옷에서 향기가 나는 듯하다. 옷은 그 사람의 체취와 향기와 세월을 머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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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이 사용하시던 찻 그릇 다구들도 소박하고 아름답다. 평소에 차를 즐겨 마시던 스님의 고아한 취향을 알 수가 있다. 차를 마시며 마음에 담아 두었던 명언들... 법정스님은 가셨지만 우리 시대정신적인 지주이신 큰 어른 이셨다. 나는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스님 말씀과 스님의 일상을 감히 닮고 싶었다. 살면서 때론 마음이 헛헛한 날에는 스님의 책을 펼쳐 몇 페이지라도 읽고 나면 마음이 맑아지곤 했었다.


방구들도 따뜻하고 사위와 딸 셋이 한 동안 앉아 침묵하면서 스님의 말씀들을 새긴다. 그 방이 앉아 있으니 마음이 무념무상이 된다. 잘 살다가 생을 마치는 것이 무엇인가, 화두를 마음 안에 않고 우리는 문밖으로 발길을 돌린다. 계절마다 느낌이 다른 사찰, 겨울은 모든 사물의 본연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어 또한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자신의 모든 것을 감출 것도 없이 분신 같은 나뭇잎 마저 떨구고 조용히 서 있는 나무들, 그 안에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람들이 모르는 것 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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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각을 내려와 절 마당 한편에는 이곳 길상사를 법정스님에게 시주한 김영한 여사의 조각상이 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시인 백석을 사랑한 여인. "내 재산 천억은 백석의 시 한 줄에 못 미친다"라고 자서전에 남겼다는 그 말 한마디에 사랑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있다. 백석시인이 남긴 애틋한 자야와의 사랑 시를 읊조려 본다. 인간이 가장 추구하는 사랑은 모두 아름답다. 생명까지도 불사하는 사랑.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히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시를 읽으며 사랑이 얼마나 애달프고 아름다운지 새삼 느낌다.


아무튼 살아 있음은 축복이다. 작은 것에 감사하고

모든 것을 사랑하고 살자. 사랑, 우리는 종국에 사랑하다 생을 마감할 것이다. 아직은 물을 건너지 않아 감사한 일 아닌가. 물을 건넌다는 것은 이승에서 저승으로 건너간다는 의미라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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