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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익는 밤

열 분의 시인, 인생이야기가 늦가을 정취에 젖다

by 이숙자

우르르 쾅쾅,


여름 장마철도 아닌데 하늘은 캄캄하고 천둥 번개가 치면서 비가 오고 바람이 분다.

늦가을, 이건 무슨 일인가 알 수가 없다. 서울을 다녀온 다음날이라 몸이 무겁고 피곤하다. 날씨도 스산하고 이런 날은 침대에 전기장판 불 넣고 따뜻한 아랫 묵처럼 다리 쭉 뻗고 좋아하는 책이나 읽고 싶은 날이다.


바쁘게 움직이며 서울 일정을 마무리하고 곧바로 군산에 내려오면 그 여독으로 하루쯤 쉬고 싶다.


그러나 또 하나의 행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어 꽃단장을 하고 나가야 한다. 편한 자리라면 바지에 두툼한 패딩만 걸쳐 입으면 편 할 텐데, 처음 보는 시인들 앞에서 시 낭독도 해야 해서 버선발에 고운 색 누비 상의와 명주 검정 치마를 입고 멋을 내 본다. 누가 옷에 신경 쓰는 사람이 있을까 만은, 장소에 따라 의상을 갖추어 입어야 하는 게 예의라 생각한다.


오늘 같은 자리는 쉽지 않은 행사다. 시를 좋아하는 나는 시인들을 볼 때면 알 수 없는 신비감과 친근한 마음이 나를 기쁘게 한다. 피곤하다고 집에서 쉬면 이런 기회를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에 단체 카톡방에 뜬 팸플릿을 보고 곧바로 참가 신청을 했다. 도전하지 않으면 내 것 이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기회가 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오늘 하루가 마지막날이라는 생각으로 도전을 한다. 인생 뭐 있겠는가, 내가 좋아하는 일을 위해서는 이젠 투자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이 나이에 다른 사치는 못 할 망정,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고 싶다. 훗날 후회해도 소용없다. 남편도 모르는, 자식도 모르는 비상금이 있어야 나답게 자존감을 세우고 살 수 있는 여력이 있다. 이젠 궁상떨지 말고 살아야지.


유명한 시인들 10명을 만날 수 있는 기회라니, 무슨 횡재를 만난 것처럼 나는 설렘으로 기다려왔다.


완주 전통문화 체험장 흐린 날씨 고산 가는 도로 풍경


행사장은 군산이 아닌 완주 전통문화 체험장이란 곳으로 모여야 해서 군산에서는 1시에 출발을 했다. 사람을 데리고 다녀야 하는 힘든 상황도 마다 하지 않고 4 사람을 차에 태우고 완주로 향하는 모니카 선생님이 고맙다. 다행히 그토록 몰아치던 비는 멈췄지만 바람은 아직도 세차게 불고 있다. 단풍 든 나무에 매달려 있던 나뭇잎들은 바람이 밀어내 낙엽 되어 떨어지고 나무와 이별을 하고 있다.


이별은 그립고 새로운 만남을 위한 기다림일 것이다.


겨울이 가을을 밀어내는 현상이다. 힘없는 가을은 겨울에게 자리를 내주며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지려는 순간, 아직도 가을을 보내지 못하는 나는 마음 안에 싸아하고 찬 바람이 불어온다. 가을의 낭만을 즐길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이번 가을은 어찌나 일정이 많았던지,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이 딱 맞는 말 같다.


4 사람이 한차를 타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면서 가다 보니 완주 전통 마을 문화 체험장에 도착을 한 후 접수하고 회비를 내면 그곳에 모인 시인 시집 2권은 무료로 준다는 말에 나는 느낌으로 시집 2권을 골랐다. 시인님들은 거의 도착을 하신 듯 모두 방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계신다. 시집을 고르고 바로 사인을 받는다.


시집을 골라 두 권씩 선택을 한다. 진열해 놓은 시집들. 시인님들은 먼저 오시어 방에 앉아 환담들을 하시고 계셨다.

김영춘 시인님의 사인, 붓글씨 글씨가 참 예뻤다. 시인님의 미소도 순진한 소년 같아 인상적이었다.

복효근 시인님 책 사인을 받고 찰칵. 맨 먼저 고증식 시인님의 강의 시작 목소리가 좋으신 시인님

이정록 시인의 의자 시 낭독 자유롭게 앉아 시인님들의 강의를 듣는 참가자들


고증식 시인님의 책과 사인, 책을 사지도 않았는데 연배가 많다고 책을 한 권 사인해서 선물로 주셨다. 복효근 신인님 책도 선물 받았다. 이런 감사한 일이... 나는 애들처럼 신나서 감사하다는 인사말을 몇 번이나 했다. 시집을 사고 시인을 만나고 사인을 받고 시인님들의 강의를 듣고, 그것도 열 분의 인생이야기를 듣는다니 이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가,


시인님들은 본인의 시 한 편과 자기가 마음에 새기는 인생시한 편을 낭독하시고 시를 쓰게 된 된 동기와 인생이야기를 펼쳐 놓으신다. 나이가 중년을 넘으신 시인님의 걸어온 삶의 족적을, 그분들의 시의 세계를 알아가는 과정은 마음이 아릿해 오는 느낌이다. 시란 아픔과 고통이 없으면 다른 사람 영혼을 울리는 시를 쓸 수 없다고 말한다.


빠른 시간에 시를 낭송하라고 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시 한 편을 외우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더욱이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이 오도록 시 낭송을 한다는 것은 수 없이 많이 읽고 외워 마음에 담아야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거다. 나는 낭독하라는 말을 듣게 된 시간이 짧아 외우지 못해 이정록 시인의 '의자'라는 시를 낭독했다.


사람마다 맨 처음 앞에 나가면 자기소개를 한다.

"저는 시가 좋아 오늘 이곳에 참여했고 여러 시인님을 뵙고 부자가 된 느낌입니다. 매일 시를 필사해야 하는 저는 시를 고르는 일도 늘 신경 써야 했습니다. 시가 익어 가는 늦가을 낭만이 흐르는 밤입니다. 저는 82세 글 쓰는 작가 이숙자입니다." 뭐가 그리 위풍당당한지 나이는 말을 무심코 말하고 나서 생각하니 쑥스럽다. 준비 없이 한 말이다.


열 분 시인님의 인생이야기는 깊고 찰지다. 마음이 촉촉해 온다.


나는 시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아직 시 한 편도 쓰지 못한 사람이다. 그냥 시가 좋아 시를 읽으며 시심에 젖어 매일 시를 골라 필사해서 문우들과 공유하고 있다. 오늘은 내가 마치 부자가 된 느낌이다. 열 분의 시를 찾아 읽고 감동을 하고 그분들의 인생이야기가 시와 함께 내 안에 자리할 것이다.


쉬는 시간 복효근 시인님과 고증식시인님 두 분을 연배 많으신 분이 이처럼 참가하셨다고 말씀하시며 시집을 사인해 주신다. 이래 저래 나는 오늘 근사한 밤이다. 멀리 안동에서 오셨다는 가수 부부의 노랫소리도 들을 만 한데 우리는 다 끝나기도 전에 일어서야 했다. 밤길 가야 하는 길이 멀었다.


가을을 보내면서 내게는 특별한 날로 기억될 것 같다. 글을 쓰지 않았다면 이런 넓은 세상을 알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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