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지 찜을 만들면서 생각나는 소회의 글
내게는 매년 봄이 오면 해야 할 일이 있다. 묵은지 찜을 해서 나눔을 하는 일이다. 지난해 담가 놓았던 김치 냉장고를 정리하고 난 후, 묵은지를 꺼내어 씻고 물에 담아 우린다. 묵은지의 쿰쿰한 냄새와 짠맛을 빼기 위해서다.
아직도 김치 냉장고에 김치가 3통이나 남아 있다. 괜스레 김치 욕심을 부린 건 아닌지, 젊어서와 달리 나이 들면 김치도 잘 먹지 못한다. 이가 부실하기도 하지만 웬일인지 김치에 손이 잘 가지 않는다.
김치에 욕심을 내는 것은 바쁜 딸들을 위해서다. 김치를 담가 놓으면 가져다 먹겠지. 집에 찾아오는 딸들에게 엄마는 주어야 할 것이 있어야 마음이 흐뭇하다. 내 건강이 허락하는 한 그러고 싶다.
젊은 시절과는 달리 이제는 살림하는 손길도 게으름을 피우며 적당히 집안 살림에서 자유롭고 싶은 날이 있다. 예전에는 장남이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그러나 지금은 택도 없는 일이다. 만약에 내가 밥을 못해 먹게 되면 요양원으로 가야 한다. 아무리 거부하고 싶어도 그게 현실이다.
내가 나이 80이 넘고서야 알았다. 삼시세끼 밥 해 먹는 일, 집안 살림하는 일이 얼마나 고단하고 수고를 하는 일인지. 여자들은 밥상 차리다 세월을 다 보낸다는 말에 공감한다. 그래도 역설적으로 얼마나 다행인지, 지금까지 내 손으로 밥을 해 남편과 함께 먹을 수 있다니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다. 아니 축복이다.
세상이 참 많이 변했다. 어쩌랴, 변화에 맞추어 적응을 하고 살아야 하는 게 오늘을 살아내는 삶의 방식이며 태도다. 지금은 자식이 부모를 모신다는 것은 어림없는 세상이다. 우리 세대와 젊은 세대의 간극은 아득히 먼 곳이 아닌지. 나이 든 세대인 우리도 알고 있다. 예전과 다른 삶의 방식이 다르기에 자녀와 같이 살기는 어렵다는 것을.
봄은 새로운 것에 대한 설렘과 희망을 마음 안에 품는 일
매년 해가 바뀔 때마다 김장을 줄여야지 하면서도 김치 냉장고를 채우지 않으면 마음이 허전하다. 넉넉해야 딸들도 마음 놓고 가져다 먹기 때문이다. 계절이 바뀌면 햇 김치를 담아 먹어도 되겠지만 묵은지와는 차별화된 맛이다. 묵은지는 김치찜을 하거나 아니면 김치볶음밥, 김치 부침개 등 요리 종류가 다양하다. 감자탕 역시 묵은 김치가 필요하다.
김치를 씻어 물에 담그고 이틀이면 충분하다. 어제는 디카시 반 모임 날이다. 아침 설거지가 끝난 다음, 묵은지를 세 번 정도 깨끗이 씻어 커다란 냄비에 담고 된장, 마늘 간 것, 양파, 들깨 가루 올리브유, 고춧가루 약간, 청양 고추 몇 개 그렇게 재료를 넣고 손으로 주물 주물 양념이 배도록 주물렀다. 양념이 김치에 배어 김치찜이 부드럽고 맛있다.
그다음 멸치를 한 주먹 넣고 거의 한 시간쯤 오래 푹 끓이면 부드러운 김치찜이 완성된다. 오래전부터 먹어왔던 묵은지 찜은 딸들도 좋아한다. 멸치를 넣고 오래 끓인 깊은 맛이다.
묵은지묵은지 찜을 하기 위해 양념을 해 놓은 것 한 시간쯤 끓여 먹을 수 있는 묵은지 찜
내 곁에서 친구가 되어 주고 매번 챙겨주는 고마운 인연과 나눔을 한다. 엊그제 남편의 몸이 아파 수술을 했다는 회원에게도 냉장고에 있는 깨죽 가루를 꺼내어 죽을 끓이고 김치 찜도 함께 건네주었다. 별스럽지 않은 작은 것이지만 마음이 담긴 것이기에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내게는 이 묵은지 찜이 추억의 음식이기도 하다. 시어머님 살아 계실 때 봄날 이맘때쯤 어머니 집에 가면 묵은지를 씻어 솥으로 한가득 끓여 놓고 나누어 먹던 기억, 그 음식 하나 만으로도 고급진 고기반찬 보다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다. 묵은지 찜은 어머님과의 추억이 담긴 음식이다.
나는 매년 어머니의 추억을 돌아보며 김치찜을 해서 나누어 먹는다. 그게 바로 행복의 근원이 아닐까. 내가 조금 수고하면 훈훈한 나눔을 하는데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가. 내 건강만 허락한다면 앞으로도 봄이 오는 날 김치찜을 해서 나누어 먹으며 살고 싶은 마음이 내 소박한 바람이다.
'얼마만큼 행복한 사람인가' 보다는 '무엇으로 행복한 사람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