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밤, 소낙비의 추억

소낙비 쏟아지는 여름밤 영화 '피서지에서 생긴 일'

by 이숙자


여름과 소낙비는 항상 같이 다니는 관계다. 소낙비는 거의 여름에만 오는 비라서 그렇게 각인된 것 같다. 봄비는 부슬부슬 소리 없이 오는 비 지만 소낙비는 여름이 오면 억세게 천둥 번개를 동반하고 쏟아지는 비다. 나는 겨울 눈 오는 날도 좋아 하지만 비 오는 날도 좋아한다. 비 오고 눈 오는 날은 나는 센티해지며 한잔의 따뜻한 차를 앞에 놓고 비에 관한 노래를 듣는다. 혼자 생각에 젖어 사색하는 시간은 날개를 달고 훨훨 날고 있다.


이 나이 먹도록 빗소리를 즐기는 마음의 빈 공간이 아직도 남아 있음이 나는 반갑다. 나이와 상관없이 감성은 지금도 소녀와 같으니 철이 없는 건지 그건 모르겠다. 빗소리를 무심코 듣고 앉아 있으면 아련한 추억들이 내 마음을 휘감고 흐르는 시냇물이 된다. 가끔 어쩌다 창 넓은 찻집에 앉아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멍 때리기는 내가 누릴 수 있는 낭만과 사치일 것이다.


소낙비 하면 나에게는 잊히지 않는 추억이 내 머리에 각인이 되어 있다. 여름은 장마와 함께 시작한다. 여름이 오고 소나기가 줄기차게 쏟아지는 날, 추억을 소환하고 20대 내 새파랗게 젊은 그날로 돌아가 본다. 나이가 들어 회상할 수 있는 추억이 있다는 것은 마음이 부자인 듯하다. 추억은 그 사람의 살아온 삶의 역사인 것이다.


내 나이 20대 초반이었다, 그때 집안 사정으로 직장생활을 일찍 시작했다. 부모님을 떠나 혼자 자취를 하면서 직장생활은 외롭고 힘들었다. 더욱이 한참 감수성이 예민하고 생각이 많을 때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답답함에서 오는 좌절과 현실 속에서 마음은 항상 말이 없는 까칠한 책만 좋아하는 문학소녀였다. 어렵고 힘든 시절 책은 나의 친구였다. 책을 읽으며 현실을 잊고 책 속으로 들어가 어두운 현실을 이겨내는 나에게는 구세주와 같은 거였다.


직장에 다닐 때, 가까이 지내는 선배 언니가 있었다. 나는 그 언니하고 서로의 삶을 공유하며 많은 위로가 되고 정신 적인 도움을 받았었다. 어느 여름날이었다. 선배 언니가 "우리 영화 보러 가자" 하고서 나에게 물어왔다. 나는 '흔쾌히 좋아요" 대답을 하고 그날 밤 전주 시내에 있는 '공보관' 이란 극장을 갔다. 그 극장 이름도 지금까지 잊지 않고 있다. 전주 시내 중앙로에 있었던 극장이었다.


우리는 마치 사춘기 소녀들처럼 들떠서 영화관으로 들어갔었다. '영화는 피서지에서 생긴 일'이란 영화다. 그때는 유일한 문화생활이 영화를 보는 일이었다. 극장 안은 대 만원이었다. 여름의 낭만을 느낄 수 있는 바다와 해변 멋진 배우들의 사랑이야기는 우리들 마음을 빼앗기게 만드는 충분한 영화였다. '피서지에서 생긴 일' 이란 영화 제목부터 우리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영화에 나오는 두 주인공은 트로이 도나휴, 산드라 디는 이 영화를 찍고 나서 일약 청춘의 우상으로 발 돋음 했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사랑해서는 안될 사랑이기에 더 애달펐다. 대를 올라가는 그들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이야기. 두 사람의 헤어질 수 없는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마음이 더 아펐다. 사랑은 아픔이 있어야 사랑이란 말이 더 절실히 공감이 되었다.


아름 다운 피서지를 배경으로 흐르는 주제곡이 너무 좋아 젊은 20대의 감성을 건드려 마음을 촉촉이 적셔 주었다. 1960대 빌보드 차트에서 1위까지 할 정도로 인기 있는 음악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지금까지도 애창하는 노래다. 이영화에 나오는 여주인공 푸른 눈의 잘 빠진 금발의 산드라 디는 이영화가 청춘의 대명사가 될 정도로 사랑을 받았다.


영화를 보고 밖으로 나왔다. 여름의 날씨는 순식간에 변한다. 소낙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있었다. 극장 앞에서 조금 기다려 보았지만 그칠 기미가 보이 지를 않았다. 비닐우산 하나 사서 둘이 받고 빗속을 걸었다. 그때는 교통편이 마땅하지 않았다. 택시도 없었다. 우산은 받았지만 억수로 쏟아지는 소낙비는 우리를 가려주기는 불가했다.


멈출 줄 모르고 쏟아지는 빗속을 둘이 걸었다. 우리 두 사람은 빗속을 걸으며 언제 우리가 이런 낭만을 즐겨 볼 것인가, 인생 일대의 추억을 만들어 보자 라고 말을 하면서 걷고 또 걸었다. 어느 시점에서 그 언니와 헤여 지고도 나는 거의 비를 맞으며 혼자 걸었던 것 같다. 울면서, 영화의 멋진 음악의 여운이 남아서, 두 청춘 남녀의 사랑이 아름다워서 걸으면서 울었다.


내가 울었던 것은 사실 내 처지가 힘들어 울고, 걸으면서 외로워서 울고, 사랑이 그리워서 울고, 다시 못 올 청춘을 생각하면서 울고. 빗물인가 눈물인가 구분이 안 되는 얼굴로 비를 흠뻑 맞았던 날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다시는 오지 못할 아름다운 젊은 날의 초상이었다. 젊은 날의 고뇌와 인간적 희비를 온몸으로 안고 살아가는 참 나를 찾고 싶었던 발 돋음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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