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추가 지났다고 아침저녁으로 기온이 확연히 다르다. 아침이면 살짝 서늘한 기운마저 느끼게 된다. 자고 일어나 창문을 열면 요란스럽던 매미 울음이 잦아든 대신 풀 벌레 소리가 아파트 13층까지 들려온다. 참 신기하게도 자연은 어김없이 계절을 알려주고 있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창 밖을 바라보며 풀벌레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지금은 이 처럼 작은 자연의 소리가 마음에 와닿는지 알 길이 없다.
예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계절이 바뀌나 보다 했던 마음이 이제는 온갖 자연의 소리, 햇빛과 하늘의 구름 조차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다.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들이 애틋해 바라보기만 해도 먹먹하다. 글을 쓰면서 자꾸만 생각이 많아져서 그럴까. 작은 것 하나도 세심히 관찰하게 되고 내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딸네 집에 와서 처음에는 모든 게 낯설어 밖에 나가는 것조차 망설여졌는데, 이제 점차 적응이 되어간다. 사람은 살다 보면 환경에 적응하도록 되어있다. 우리가 사는 오래된 아파트와는 전혀 다른 시스템이다. 뭘, 눌러야 하는 것도 많고 아파트도 대단지라서 밖에 슈퍼라도 다녀오려면 정신을 차리고 찾아와야 한다.
그러니 나이 많으신 어른들은 자녀들 집에 오면 밖에 외출도 쉽지 않고 감옥생활이 따로 없을 듯하다. 특히 나이 들면 익숙하고 편한 게 좋을 수 있으니까, 세상의 변화만큼 나이 든 세대는 순발력과 적응력이 떨어진다. 나는 처음에는 적당히 긴장되지만 새로운 환경에 도전하고 알아가는 기쁨을 혼자 즐긴다.
숲 속 테크 길 남편과 딸
딸이 살고 있는 아파트는 서울 변두리 새로운 단지를 조성해 놓은 신도시라서 주변이 깨끗하고 자연녹지가 많아 산책하기가 아주 좋다. 아파트 옆에 산들이 있어 산책코스도 편리하게 데크길을 만들어 놓았다. 산책코스도 여러 곳이다. 날마다 새로운 코스로 산책하는 재미가 있다. 정말 여행 와서 한 달 살기를 하는 느낌이다.
우리는 아침 여섯 시면 일어나 산책을 간다. 아직도 한낮이면 뜨거워 걷기가 힘드니 아침저녁으로 운동하는 사람이 많다. 딸네 아파트 길 건너편에 산이 있다. 매타 세콰이어의 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 숲 속은 산소가 많이 나와 공기가 성큼하고 걷는 발걸음이 가볍다. 풀 숲에서 들리는 풀벌레 소리 또한 정겹게 들리면서.
아파트 단지 네 딸과 남편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며 산책을 한다
딸이랑 아빠가 도란도란 아야 기하며 걷는 모습이 보기 좋다. 성격이 유난히 남편을 많이 닮은 둘째 딸, 꼼꼼하고 정확하다. 자기 책임감이 강한 편이다. 우리 부부의 큰 의지가 된다. 큰 딸이 곁에 없으니 둘째가 대신한다. 큰 딸은 멀리 살고 있으니 어쩔 수가 없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다. 아무래도 멀리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신경을 덜 쓸 수뿐이 없다. 아직은 어린애들이 있어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은 것도 이유가 된다.
어떤 날은 사위와도 걷는다. 오랫동안 열심히 살고 오십이 넘어 이제는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으니 보기가 좋다. 사위는 남편에게 이곳저곳 설명해 주기 바쁘다. 항상 긴장하고 살았던 모습이 이제야 여유가 있어 보여 부모인 우리도 마음이 편하다. 결혼하고 부부가 맞벌이를 하면서 몇십 년을 열심히 살아온 결과인 듯하다.
부모는 자식들이 힘들지 않고 행복하기를 소망한다. 그렇지만 사는 게 어찌 마음대로 되랴. 삶이 고통이 없기를 바란다면 하나의 욕심일 것이다. 주어진 삶을 잘 받아들이고 담담히 인내하고 견디며 살아가는 게 삶의 지혜이다. 삶은 유한 하니까. 힘든 과정을 거치고 맞이하는 만족은 마음이 풍요롭고 안온한 것이다.
오늘은 딸이 일찍 퇴근을 했다. 우리들이 있으니 신경이 쓰이기도 하고 해야 할 일이 있어서다. 딸은 국제회의와 각종 국내 회의를 주선하는 업을 하는 일을 작은 회사를 운영하고 있으나 지금은 코로나로 일이 많지 않아 조금은 시간이 여유가 있다고 한다. 언제나 코로나가 끝나고 일을 제대로 할지 가끔은 신경이 쓰인다.
엄마가 있으니 평소에 할 수 없는 김치를 담가 주기 위해 야채를 사 왔다. 고구마순, 깻잎, 무를 사 와서 김치를 담그려 남편에게는 고구마순 껍질을 벗겨 달라고 일거리를 준다. 혼자 티브이 하고만 놀면 심심하니까. 내가 조금 수고하면 자식들 한 동안 반찬 걱정을 안 하고 밥을 먹을 수 있으니 흐뭇하다.
저녁 밥상은 고구마 순 김치, 깻잎김치, 깍두기 등 여러 가지 반찬을 만들어 밥상이 아주 풍성하다. 내일 이면 세쨋 딸도 온다고 해서 많이 담갔다. 엄마는 항상 먹을 반찬을 나누어야 마음이 놓인다. 엄마는 자식들 입에 맛난 것 들어갈 때 제일 흐뭇하다. 내가 건강이 허락해서 자식들에게 도움을 주고 살 수 있음이 감사한 일이다.
두 부부만 조용히 지내다가 항상 그리워하던 딸네 가족과 매일매일 일상을 한가롭게 보내는 시간이 즐겁다. 즐거움이란 내 주어진 모든 삶에 만족하며 내면의 감각을 차차 알아가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