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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숙자 Aug 28. 2019

내 첫 여행은 뉴욕이었다

자기 일을 찾아가는 큰딸 이야기


            


                                                                                                                                                                    

지금부터 29년 전 12월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보 함박눈이 하얗게 내렸다.  길이 미끄러워  거북이 운전으로 겨우 비행장에 도착하니  벌써 사람들이  많이 붐비고  있었다.  딸은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 수속을 하는 중이고  남편과 나는 말없이 그냥 바라만  보고 있었다. 어떤 말을 나눌 수 있는 여유도 없었다. 딸은 눈물을 감추려는지  " 도착하고 연락할게요."라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  손을 흔들며

 한마디 없이  출국장 안으로  사라졌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나는 돌아 서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가없었다.  딸이  나에게  준  삶의 자리가  컸나 보다.  마음이 먹먹하기만 했다. 서울에 살고 있을 때는 언제든지 올라가  만나곤 했지만  이젠 정말 만나기 힘든 멀고 먼 미국의 뉴욕으로 떠나고 말았다.


 그  뒤부터 딸에 대한 가슴앓이가 시작되었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리운 마음에 너무 힘들었다. 딸이 좋아하는 음식만 보아도 그저 목이 메고 눈물이  나왔다. 자식도 다 때가 되면 헤어지는 게  당연한데  나는 왜 그리 자식에게 연연하고 애닮픈 마음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던 걸까...  사람이 살면서 인생이란 강을 한 번에 건너뛸 수는 없다.  이 별도 그렇다. 징검다리를 건너가듯 한 발작 국 씩 건너가기를 바랐던 같다. 다리를  건너면서 물살도 느끼고  불어오는 바람도 느끼고 천천히 가고 싶었다. 딸은 함께 할 시간적 여유도 없이 떠나고 말았다.


시절은  스마트 폰도 없고  연락할 길이 쉽지 않았다. 가끔씩 오는 편지에  눈물이 뚝뚝  번져 있는 것을  보면서 또 울컥 해 지고 마음이 시큰해졌다.  자식을 멀리 보낸 엄마 마음 그리움만 깊어가고 보고 싶은 마음에 가슴앓이를 많이 해야 했다.  딸이 보낸 편지는 외로움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음이 느껴졌다. 보내준 학비도 여유가  없어 힘들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부족한 결핍이 공부에 더 매진하고 꿈을 향한  의지가 더 강해졌으리라 본다.


내가 새로운 세상을 만난 건  큰 딸이 서울로 대학을  갔을 때였다.  거의 매주 반찬을 해서 날랐다,  지방에서 변화 없는 생활 속에 살다가 서울이란 곳은 다른 세상이었다. 택배도 없던 시절이다.  딸과 함께  쇼핑도 다니고 여기저기 알아보는 시간들은  별난 곳이었다.  경험해 보지 못한 문화를 접하고  즐거웠다. 주말마다 서울 올라가는 날은 여행을 하는 느낌이 되어  설렘으로 기다려졌다.     


딸은 대학교  한 학기를 마치 친구와 함께  외국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 딸은 집안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아  살고 있는 아파트를 잘 꾸며 잡지사에서 사진을 찍어 가는 일도 있었고,  인테리어 분야 일을 좋아했다.  

 

어느 날 딸은 친구와 뉴욕 여행을 다녀온 후 집에 내려오더니  깜짝 선언을 했다.


"  아빠  엄마  저 유학 보내 주세요,   더 넓은 곳에 가서 공부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거예요"


예기치 못한  딸의 제안에 우리 부부의 고민은 시작되었다.  그때는 유학을 그리 많이 가지는 않았다. 더욱이  여자가  위험할 수 있는데  하는 마음이 먼저 들었다.  여자라고 해서 편견을 갖는 건 아니지만  지인 하나 없는 먼 곳으로 떠난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날마다  잠 못 이루는 밤으로  고민을 하게 되고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결정하기 어려운 중 것 하나는  집안 형편이  좋지 않을 때다.


사람은  다  자기만의  운명의 길이 정해져  있다고 본다.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우연찮게  여건이 마련되고  딸은 딱 일 년을 치열하게 준비를 했다. 그림 그리는  학원을 다니면서  학교가 원하는 매뉴얼을, 멋에만  치중하던 아이가 청바지에 운동화만 신고 아르바이트까지 하면서 열심히 준비하고 결국 학교에서 입학 허가를 받고 뉴욕으로 떠난 것이다.  부모가 자식의 인생을 대신 살아 줄 수 없기에  뜻을 존중해 주어야 했다.  우리 부부는  결을 해야 했다. 목적의식이 뚜렷한 딸의 의지 우리가 멈추게  수 는없었다.


딸이 처음 뉴욕에  가서 살던 곳은 그리니치 빌리지, 그곳은 세가 싸고  대학들이 있어 주변이 위험한 지역은 아니었다. 예술하는 사람들도 많고 학생들이 살기는 견달 만한 곳이었다. 매달  보내는 돈은 방세와 생활비만 보내고 학비가 나올 땐  학비를 따로 보냈다.  딸아이는  정말로 부모에게  부담을 안 주려 노력을 많이 했다.  얼마나 절약을 하고 힘들게 살았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그러면서도 항상 편지는   " 아빠 엄마  고맙습니다."  다른 애들은 아르바이트하느라 힘든데  나는 부모님 이 보내  주는 돈으로  공부할  수 있으니 감사해요"  


하면서  고마운 마음을 전 했다. 딸의 유학생활은 힘든 고난의 시간들이 의지를 굽히지 않고 목표하는 꿈을 향해  치열하게 자신과의 싸움을 했으리라 믿는다. 나는 어쩌면 한 번도 딸을 찾아갈 생각도 안 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참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여러 가지 여건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년이 지나고  다니던  FIT  졸업을 하고 다시  파슨스 스쿨에 다녔다.  이년이 지난 후 에는 스스로 학비를 마련하고 부모의  부담을 덜어 주었다.  뉴욕에  유학된 지 오 년,  얼마나 자기 꿈을 향해  뼈를 깎는 외로움을  견디며 앞만 보고 살았을 것이다. 딸은 학교를 졸업 후 뉴욕에서 취직을 하고 정착을 했다.   셋째 딸 대학 때 데려다 일 년 연수도 시켜주고  둘째 딸도 다녀오고, 가정에 문화를 바꾸어 주었다. 가족들에게  다른 세상을 볼 수 있는 큰 몫을 해 냈다.  막내딸 까지도 연수시키고.


이 한국을 떠난 지 오 년이 지 후 나는 뉴욕에  갈 수 있었다. 처음 미국을  혼자 갈 때 비행기는 타는 게 두렵기도 하고 설렘으로 몇 날 몇 밤을 잠을  못 잤다. 비행기를  갈아타  뉴욕에 도착했다. 뉴욕은 나에겐 놀라운 세상이었다. 마천루처럼 높은 빌딩과 화려하고 멋진 도시에서  나는 꿈같은 시간을 보냈었다.  딸은 경험해 보지 못한 많은 걸  나에게  보여주고 느끼게  해 주었다.  남편을 두고 혼자만이  누리는 호사가 미안했다.  


뉴욕에서 보냈던 소중한 날들,  딸이 숨 쉬며 치열하게 살아냈던 거리돌아보았다. 지독히도 외로웠을 그 시간들이 울컥했다.  뉴욕을 돌아보며  놀랍고 놀라웠다. 참 이런 세상도 있구나,  하고 내가 살아온 삶을 반추해 보면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세상은 이처럼 첨단화되고 변화된 도시에 와서 보니 왠지 나는 미아가 된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 살아내야 할 나의  삶은 어느 곳일까,  내가 살아온 삶에 여정을 반추해  보았다.  


 딸은  얼마 후  이탈리아 포토 그래이 퍼인 신랑을 만나 결혼했고,  남편 칠순 때는 딸이 안내하여 평생 잊지 못할 뉴욕, 유럽 여행도 해 보았다. 딸의 도전으로 우리 가족은  많을 걸  경험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원하던  목표를 이루고 자기가 살고 싶은 삶을 살아가는 딸에게 응원을 보낸다. 딸이기 전에 한  여성으로  자기 삶을 용감히 개척하고 자기답게   하는 삶을 살고 있는 딸이 대견하다.



몇 년 전 어렵게 한국에 나와 시험관 임신에 성공을  해서 쌍둥이를 낳아 지금은  9세인 손자 손녀가 있다.  살면서  희로애락을 나누지 못하고 자주 볼 수 없음이  아쉽다. 서로 각자의 삶의  있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 딸은 딸만의 삶이 있고 우리는 우리만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게 인생이다. 가족이지만  때가 되면  독립해서 서로의 길을 가야만 한다.


딸이 아니 였으면  내가 뉴욕 여행을 해볼 일이 없었을 것이다.  딸이 있기에  세계의 도시 뉴욕을 느껴 보았다.  엄청난 문화를, 세련된 뉴욕의 면면을 만나 볼 수 있었다.  내 인생에서 해외여행은 뉴욕이 처음이었다.  힘들었던 내 삶 보상을 딸에게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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