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현장에서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혹독했고,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이 제집 안마당인 양 휘젓고 다니던 텅 빈 논 한복판은 그야말로 동토(凍土)나 다름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절 우리에게 추위란, 뷰파인더 너머로 세상을 담아내겠다는 뜨거운 열정 앞에서 맥없이 녹아내리는 사소한 장애물에 불과했습니다. 두꺼운 파카를 겹쳐 입어도 스며드는 한기 속에서, 감독의 '액션' 소리가 떨어지면 현장은 순식간에 팽팽한 긴장감으로 얼어붙었고 스태프들의 입에선 하얀 입김이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왔습니다. 오직 그날의 분량을 완벽하게 담아내겠다는 일념 하나로 모두가 카메라 앞의 피사체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때, 프레임 밖 한편에서는 또 다른 치열한 생존의 현장이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얼음장처럼 딱딱하게 굳은 논바닥을 곡괭이로 깨내어 구덩이를 파고, 인근 폐가에서 주워온 마른 장작과 깨진 슬레이트 지붕 조각을 모아 불을 지피는 일은 촬영만큼이나 중요한 과업이었습니다. 잘 먹자 ^^
기다리고 기다리던 감독의 우렁찬 '컷, 오케이!' 소리가 논두렁에 메아리치면, 그제야 팽팽했던 긴장의 끈이 탁 풀리며 참아왔던 허기가 밀물처럼 밀려들었습니다. 약속이나 한 듯 장비들을 내려놓고 불을 피운 구덩이 주변으로 옹기종기 모여들면, 타닥타닥 타오르는 장작불 위에 위태롭게 얹힌 슬레이트와 은박지 위에서 동네 정육점에서 공수해 온 삼겹살 30인분이 지글거리며 익어가고 있었습니다. 땅속 항아리에 묻어두었던, 살얼음이 살짝 낀 쨍한 김장김치까지 곁들여 구워내는 그 냄새는 영하의 추위를 단번에 잊게 만드는 마법과도 같았습니다. 매캐한 연기에 눈을 비비면서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젓가락을 바삐 움직이며 입안 가득 뜨거운 고기 한 점을 밀어 넣을 때의 그 황홀경이란, 감히 어떤 미사여구로도 표현하기 힘든 행복 그 자체였습니다.
서로의 얼굴이 불빛에 붉게 물든 채, 하하 호호 웃으며 나누어 먹던 그날의 삼겹살 맛은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혀끝에 생생하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배고픔을 달래는 한 끼 식사가 아니었습니다. 꽁꽁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함께 고생한 동료들과 나누는 뜨거운 전우애였고, 열정 하나로 그 혹독한 겨울을 버텨냈던 우리 청춘의 가장 진솔하고 따뜻한 위로였습니다. 지금도 찬 바람이 불어와 옷깃을 여미게 되는 겨울날이면, 문득 그 시절 눈발 날리던 논두렁 위에서 타오르던 거친 장작불과 그 곁을 지키던 사람들의 온기가 그리움처럼 피어오르곤 합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 가장 춥고도 가장 뜨거웠던 그 겨울의 맛이 사무치게 그리운 밤입니다. 뭐가 그리 급하다고 먼 여행을 떠난 후배도 있고 지금은 연락 안 되는 동료들도 많습니다 어디에 있건 뭐를 하건 늘 건강하고 편안하고
2026년 오가며 만날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