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종 기억이라는 것이 견고한 서랍 속에 정리된 사진첩 같을 것이라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언제든 서랍을 열면 그날의 공기, 그 사람의 온도, 우리가 주고받았던 눈빛이 선명하게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고 믿으면서 말이죠. 하지만 시간이라는 야속한 바람은 서랍의 틈새로 끊임없이 불어닥쳐, 가장 소중하다고 여겼던 순간들마저 풍화시키고 맙니다. 애석하게도 기억은 고체보다는 기체에 가깝습니다. 두 손으로 힘주어 움켜쥐려 하면 할수록 손가락 틈새로 빠져나가는 고운 모래알처럼, 혹은 새벽안개처럼 소리 없이 흩어지곤 합니다. 분명 내 안 어딘가에 저장해 두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꺼내어 보려 하면 흐릿한 윤곽만 남아있을 때의 그 당혹스러움은 마치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린 아이의 심정처럼 막막하기만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기억의 무게는 그것이 존재할 때가 아니라 소멸했을 때 비로소 정확히 측정됩니다. 매일 스쳐 지나가던 거리의 풍경이나 무심코 나누었던 저녁 식탁의 대화들이 실은 내 삶을 지탱하던 거대한 축이었음을, 우리는 그것들이 기억의 저편으로 날아가 버린 뒤에야 뼈저리게 실감합니다. "그때 더 많이 웃어둘걸", "그때 그 표정을 눈에 더 담아둘걸" 하는 후회는 늘 망각의 뒤를 따라옵니다. 기억이 날아가 버린 빈자리는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실감이라는 투명한 부피로 가득 차오릅니다. 그제야 우리는 깨닫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단순한 과거의 데이터가 아니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내 생의 한 조각이었음을 말입니다. 소중함이라는 감정은 항상 부재(不在)를 먹고 자라나는 슬픈 속성을 지녔나 봅니다.
어쩌면 기억이 날아가 버리는 것은 우리에게 남은 기억을 더 절박하게 사랑하라는 시간의 배려일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기억할 수 있다면, 우리는 오늘 마주하는 순간의 찬란함을 그토록 애틋하게 여기지 않을 테니까요. 언젠가는 잊힐 것이기에, 결국에는 희미해질 것이기에 지금 이 순간 들이마시는 숨결 하나, 눈앞에 있는 사람의 미소 하나가 사무치게 귀한 것입니다. 잃어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그 가치를 깨닫는다는 건 슬픈 일이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무언가를 잃어버린다는 건 그것이 내게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증명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자꾸만 날아가는 기억들을 탓하지 않으려 합니다. 대신 흩어지는 기억의 뒷모습을 보며, 지금 내 곁에 머물러 있는 것들을 한 번 더 힘주어 안아줄 뿐입니다. 잊히기에 아름다운 것들이 세상엔 너무나 많으니까요. 그래도 추억은 너무나 소중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