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의 등굽은 성곽

낙산의 등굽은 성곽

by 참새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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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을 따라 굽이굽이 이어지는 낙산공원 길을 걷다 보면, 발바닥에 닿는 돌 하나하나가 수백 년 전 누군가가 흘린 땀방울 같아 괜히 경건해지곤 해요. 혜화역의 시끌벅적한 소음이 발뒤꿈치 밑으로 서서히 멀어질 때쯤, 비로소 코끝에 닿는 건 눅눅한 흙 내음과 오래된 성벽이 머금은 서늘한 돌의 숨결이죠. 낙타의 등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제 눈엔 세상을 묵묵히 등에 업고 가는 거대한 거인의 뒷모습처럼 보이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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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을 오를 때면 늘 지난 가을의 실수가 떠올라 쓴웃음이 나요. 새로 산 구두가 발에 익지도 않았는데 무작정 이 언덕을 올랐거든요. 결국 중간쯤 가서 뒤꿈치가 다 까져버렸죠. 벤치에 앉아 쓰린 발을 만지는데, 지나가던 할아버지 한 분이 툭 던지듯 말씀하시더라고요. "이 길은 욕심내서 오르는 게 아녀, 그냥 바람한테 길을 좀 내주면서 걷는 거지." 그땐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오늘 다시 이 길에 서보니 알 것 같아요. 성곽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제 어깨를 스칠 때마다 마음속에 쟁여뒀던 뾰족한 생각들이 조금씩 마모되는 기분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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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의 돌들은 모양이 제각각이에요. 어떤 건 모서리가 닳아 둥글고, 어떤 건 이제 막 깎아낸 듯 날이 서 있죠. 그게 꼭 우리네 삶 같아서 자꾸 손으로 쓸어보게 돼요. 누군가와 치열하게 부딪히며 둥글어진 마음도 있고, 여전히 세상이 무서워 날을 세우고 있는 마음도 있잖아요. 낙산공원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성벽 너머로 보이는 서울의 풍경은 참으로 묘해요. 발밑엔 낡은 창신동의 지붕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저 멀리엔 불빛 번쩍이는 고층 빌딩들이 신기루처럼 서 있죠. 과거와 현재가 이 성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 같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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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서 숨을 고르며 내려다보는 서울은, 낮게 깔린 안개처럼 아련해요. 만남이 이별을 전제한다는 그 자명한 사실이, 이곳에 서면 슬프기보다는 오히려 다행스럽게 느껴져요. 영원할 것 같던 저 성곽도 세월에 깎여나가고, 매일 뜨겁게 사랑하던 연인들도 결국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야 하니까요. 이별이 있기에 지금 이 순간 성곽 너머로 떨어지는 노을이 더 시리도록 아름다운 거겠죠. 끝이 있음을 아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그 지독한 다정함이, 낙산의 성벽을 따라 길게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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