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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계산인 홍석경 Oct 19. 2022

그리스 영웅 헤라클레스가 신라로 건너가 건달이 된 까닭

헤라클레스의 동방 오디세이

그런데 상식적으로 판단했을 때, 이게 과연 가능키나 한 일이었을까? 반인반신 헤라클레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셀 수 없이 많은 그리스 영웅 가운데서도 가장 연장자였다. 그가 활약했던 시기는 그리스 역사에서 암흑기라 불리던 기원전(BCE) 8세기 이전이었다. 반면에 신라의 전성기는 불국사와 석굴암이 세워졌던 기원후(CE) 8세기였다. 헤라클레스 시대와 신라의 전성기는 아무리 짧게 잡아도 무려 1500년 차이가 나고, 지리적으로도 헤라클레스의 고향인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한반도는 직선으로 8,500km 이상 떨어져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헤라클레스가 신라로 건너올 수 있었단 말인가? 두 문명 사이에는 시공간을 훌쩍 뛰어넘는 웜홀(wormhole)로 연결돼 있었다는 얘기인가?


그렇다! 지구의 동쪽 끝 한반도와 서쪽 끝 지중해에 자리한 두 지역의 문명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시공간적으로 훨씬 가까이서 만날 수 있게 한 역사적 웜홀이 존재하였다. 이것은 BCE 334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동방원정을 통해 닦아놓은 길이었다. 그리고 이 길을 따라서 중앙아시아, 아프가니스탄, 북인도까지 진출한 그리스 문명과 인도 불교의 운명적 만남이 있었고, 이후 수백 년에 걸쳐 끊임없이 파미르 고원을 넘나든 인도 불교의 포교승, 중국의 구법승, 그리고 소그드 상인들이 완성한 실크로드가 있었다. 자, 그러면 동서 문명을 연결시킨 일련의 역사적 사건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사진 1. 알렉산드로스 동상 (테살로니키): 그의 시대엔 등자(발걸이)가 없었다. 등자는 2-3c에 아시아 유목민족이 발명하여 8c 무렵 유럽에 전달되었다.

BCE 4세기 후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동방원정 중에 주요 점령지마다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였다. 그리스 문명은 지중해 연안을 벗어나 북인도까지 확산되었으며 각 지역의 토착 문명과 융합되어 헬레니즘 문명을 탄생시켰다. 아프가니스탄에 자리를 잡은 그리스-박트리아 왕국(Greco-Bactrian Kingdom; 250-130 BCE)과 박트리아 왕국에서 분리되어 남쪽의 인더스 강 유역에 터를 잡은 인도-그리스 왕국(Indo-Greek Kingdom; BCE 180-CE 10)은 BCE 2세기경에 이웃한 인도의 마우리아 왕조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 문명과 인도 불교의 역사적인 만남이다. 인도 불교는 다시 파미로 고원 너머 타림분지 주변의 오아시스 지역(호탄, 누란, 쿠차, 둔황)으로 전파되었으며, 마침내 기원후 1세기에 중국 한나라에도 소개되었다.


BCE 130년 무렵,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은 동북쪽 초원지대에서 내려온 유목민(스키타이족, 월지족)의 계속된 공격으로 멸망하였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이 남긴 찬란한 헬레니즘 문명과 이 지역에 유입된 불교는 고스란히 월지족이 세운 쿠샨 제국(CE 30-375)에 계승되었다. 마침내 CE 1세기 무렵, 쿠샨 국의 간다라와 마투라에서 인간의 모습을 한 불상이 탄생하였다. 불상이 존재하지 않았던 무불상 시대에는 부처를 큰 의자, 발자국, 또는 진리의 수레바퀴로 묘사하였는데, 그것은 붓다께서 열반에 드셨기 때문에 형상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사진 2. 헤라클레스의 동방 오디세이 헤라클레스의 상징물인 사자머리 패션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변화되었고, 영웅의 이름 역시 달리 불리었다. (1) 헤라클레스 대리석상(CE 68-98, 로마) (2) 바즈라파니 부조(CE 1-2c, 간다라), (3) 당삼채 무인상(7c말-8c중, 중국 당), (4) 경주 석굴암의 간다르바 부조(후대신라-고려 초)

 

쿠샨 제국에서 아폴론의 얼굴 모습을 한 부처상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그를 수행하면서 지킨 보디가드는 불법의 수호신 브라흐마(범천)가 아닌 헤라클레스였다. 이것은 헬레니즘 문명을 계승한 쿠샨 제국에서 헤라클레스의 용맹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던 데다, 불교 도상학이 체계가 잡히기 전이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헤라클레스의 상징물은 머리에 뒤집어쓴 네메아의 사자 가죽과 올리브 몽둥이다. CE 1-2세기경 간다라에서 제작된 불교 부조에는 ‘바즈라(vajra·벼락)를 든 사내’라는 뜻의 바즈라파니(vajrapani)가 마치 헤라클레스처럼 사자 가죽을 머리에 뒤집어쓴 채 제우스의 필살 무기인 벼락을 오른손에 쥐고 붓다를 경호하는, 즉 불법의 수호자로 새겨져 있다.


간다라에서 탄생한 불상은 대승불교와 함께 중국을 거쳐 마침내 4세기 무렵에 한반도에 도착하였다. 이 기나긴 동방 여정에는 당연히 붓다의 보디가드 헤라클레스도 함께 하였다. 그런데 헤라클레스의 동방 오디세이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 데다 무엇보다 모국인 그리스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그의 사자머리 패션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변형되었고 그의 이름 역시 달리 불리었다. 그리스 영웅 헤라클레스가 신라로 건너와서 건달이 된 사연이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온다.

사진 3. 영웅 헤라클레스가 신라에 와서 건달이 된 까닭은? (1) 헤라클레스의 12가지 과업을 부조로 묘사한 로마시대 석관의 일부분 (기원후 3c 중반) (2)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 기단부에 새겨진 건달바(신라말-고려초). 그는 불법을 수호하는 팔부신중의 일원이며, 헤라클레스의 상징물인 사자머리 가죽을 뒤집어쓰고 공후를 뜯는 모습으로 나온다.


헬라스 세계에서 인간을 괴롭히던 온갖 괴물과 짐승을 퇴치하여 명성을 드높인 헤라클레스의 앞에는 더 이상 괴물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이름만 들어도 사시나무처럼 온몸이 떨린 괴물들이 깊은 바위 산속에 숨어서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심심해진 헤라클레스는 새로운 모험을 찾아 동쪽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는 이름을 바즈라파니로 바꾸고 쿠샨 국의 고타마 붓다의 경호원으로 취직했다. 그런데 사자머리 가죽만 봐도 공포에 질려 오줌을 지리던 괴물들은 헤라클레스 앞에 그림자도 비치지 않고 숨죽이며 지냈다. 잠시라도 힘을 쓰지 않으면 온 몸이 근질거리는 헤라클레스는 할 일 없는 붓다의 경호원을 사직하고 또다시 새로운 모험을 찾아 파미르 고원을 넘고 중국을 거쳐 마침내 신라에 도착했다.


하지만 지상에서 이미 불국토를 실현한 신라에서 그가 힘쓸 일은 여전히 없었다. 크게 실망한 헤라클레스는 이제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올리브 몽둥이를 깎아 다듬고 구부린 다음 여기에 줄을 매달아 하프와 비슷하게 생긴 공후(箜篌)를 만들었다. 신라에 완전히 눌러앉은 그는 타고난 딴따라 기질을 발휘하여 공후를 뜯으면서 건달처럼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이 모습을 본 신라 사람들은 헤라클레스를 건달바라고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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