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을 말아먹다

Sweeter Than Honey

by 영어 참견러

나는 매일 꿈을 꾼다. 대부분 눈을 뜨는 순간 하얀 안개처럼 사라진다. 사실, 꿈에 많은 의미를 두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주 가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장면이 있다. 조금 전에 꾼 꿈은 기억에서는 사라졌는데, 한 문장이 자꾸 머리에서 맴돈다. '지식을 말아먹다.'


요즘처럼 더운 여름 입맛이 없을 때면, 가끔 물에 밥을 말아먹곤 한다. 하얀 밥과 물, 그리고 간단한 장아찌나 맛있는 김치만 있으면 입 안도 속도 개운해진다. 그런데, 지식을 말아먹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세상의 지식은 다양한 음식처럼 맛이 다르다. 영양이 풍부하고 신선한 음식이 있는가 하면, 기름지고 느끼하기도 하다. 어떤 지식은 너무 맵거나 짜다. 심하게 상해서 버리야만 하는 지식도 있다. 대부분의 지식은 책에서 나온다. 요즘 거의 모든 음식이 냉장고에서 나오듯이 말이다. 하지만, 냉장고에서 나온다고 해서 다 좋은 음식은 아니다. 식재료나 소스도 상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책에서 나온 모든 지식이 좋은 지식은 아니다. 때론 상한 맛이 나기도 한다.


쌀 한 톨도 잘 버리지 못하는 나로선 음식을 잘 버리지 못한다. 식탁에 오기까지 거쳐온 많은 사람의 정성과 손길을 생각하면 그러하다. 그럼에도 꼭 버려야만 할 때가 있다. 상하고 물러 맛이 변하고 냄새가 나는 경우에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버려야만 한다. 누군가에게 주려고 아껴둔 경우에는 마음이 쓰리고 아깝다. 아껴 똥 된 경우니까. 하지만, 아무리 보관을 잘해도 원래부터 재료가 신선하지 못하거나 땅에서 나올 때부터 약한 것들이 있다. 이기적인 유전자를 가진 인간의 장난질로 인해 보기엔 멀쩡하지만, 속이 썩거나 짓무른 과일이나 야채도 있다.


내 책장에도 그러한 책이 몇 권이다. 이러한 책은 제목이 보이지 않도록 뒤집어 놓는다. 누군가의 눈에 보이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기도 하지만, 내 눈에 보일 때마다, 세상 근심이 늘어가는 느낌 때문이다. 그럼에도 버리지 않고 보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언젠가 나름 귀하게 쓰일 때가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걸까? 그러고 보니, 음식은 어쩔 수 없이 버렸어도 책은 버린 적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책은 어디에 기증할 수도 중고서점에 팔 수도 누군가에게 추천할 수도 없는 책이다. 읽을수록 정신과 영혼에 해로운 책이니까. 이러한 책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고 있다시크릿님을 몇 년 전 독서모임에서 만났다. 그녀는 마음에 평안이 없고 불안하다고 말하더니, 요즘에는 우울증으로 고생한다고 한다.


난 어떠한 책이라도 하나의 교훈이나 지식은 얻을 수 있기에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요즘에는 그러한 미미한 충분조건에도 못 미치는 책이 눈에 종종 띈다.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 혹은 유명하다는 저자의 이름 딱지가 붙어서 말이다. 예전에도 그러한 책과 마주칠 때가 있었지만, 그저 이상하고 기분이 좋지 않다고 느끼기만 했다. 하지만, 요즘은 왜 그러한 맛이 나는지 바로 알게 된다. 바로 상한 것이다.


오늘은 영어 성경 낭독이 있는 목요일이다.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읽었고, 오늘부터는 마태복음을 읽을 예정이다. 구약에 있는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읽으면서는 계속 예수가 생각이 났다. 신약으로 돌아와 예수의 이야기를 읽으니 구약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시간과 공간과 상상과 저자를 초월하는 책. 청년 시절에 처음 성경을 읽으면서는 그 당시 읽던 다른 책이 쓰레기처럼 여겨진 적이 있다. 이유를 잘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상한 책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계절의 변화를 어찌 알았는지, 하지 날부터 부쩍 더워졌다. 차가운 물 한 바가지 가득 담아 뒷목과 등에 확 뿌리면 등골까지 시원한 그러한 지식의 맛이 그리워지는 날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어령 교수님이 보고 싶어 진다. 한 번도 마주 대한 적 없는 분인데, 만날 수도 없는 분인데, 왠지 그분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싶어 진다. 지적인 대화를 나눌 상대가 없어 외로웠던 분. 책 읽기를 풀 뜯어먹는 소처럼 했다는 그분. 나도 요즘 그러한 풀 뜯어먹는 시간이 좋다. 하지만, 이제는 싱싱하고 푸르는 풀도 메말라가고 있는 여름이다. 입맛도 없는데, 아니 무언가 맛있는 것을 먹고는 싶은데, 딱히 먹을 것이 없는 이 여름에 개운하게 성경을 말아먹어볼까?라는 생각이 드는 아침이다.


시편과 잠언에 있는 구절이 문득 떠오른다.


Taste and see that the Lord is good. It tastes sweeter than honey.






매거진의 이전글Eating Toget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