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관한 고찰
생각은 늘 마음에 속는다
인간을 만드는 것이 이성이라면,
인간을 이끄는 것은 감정이다.
- 프랑스 명언
요즘엔 반려동물들, 특히 고양이에 관한 영상들이 인기다. 그 원인에 대한 분석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엉뚱하게 행동하기 때문에 재미있는 영상이 많이 나와서인지, 혼자 사는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 반려동물, 특히 독립적인 고양이에 대한 관심이 증가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보고 있으면 귀엽기도 하고 마음에 위로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같은 고양이라고 하더라도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은데, 대부분은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도 멋대로 행동하거나, 자신이 필요할 때만 애교를 부리고, 또 목욕을 시키거나 병원에 데려가는 등 싫은 행동을 하려고 하면 도망가거나 공격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럼에도 그런 모습들조차 고양이의 자연스러운 행동임을 알기에 마냥 귀엽게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심지어 위험에 처해 구조가 필요한 상황에 있음에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위협하거나 공격하여 도우려는 사람들이 도리어 다치는 일이 발생해도, 우리는 단순히 일어난 일에 분노하며 그 동물을 미워하는 것이 아닌, 그 동물들이 사람에게 버림받았거나 좋지 않은 트라우마를 안고 있으리라 생각하며 안타까워한다.
우리는 동물들을 보며 마치 ‘사람 같다’, 때로는 ‘사람보다 낫다’ 와 같은 말들을 하곤 하는데, 나는 어쩌면, 때론 정말로 그렇기도 하지만, 우리가 서로 살아가면서 이해하는 것이 부족한 처지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최근에 동생과 자주 부딪히는 일을 겪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방을 함께 쓰고 있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청소년기 때부터 홀로 유학 생활을 하며 살아왔고, 동생은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그러다 나는 군대에 입대하기 위해 한국에 왔고, 올해 내가 군대를 제대한 이후로 방을 함께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 형제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일단 나와 나의 동생의 성향은 아주 다르다. 어떤 일이든 계획과 충분히 숙고할 시간이 필요한 나와는 달리, 동생은 즉흥적이고 생각보다는 감각에 의존하는 성향이 강하다. 방을 함께 쓴다는 것은 단순히 공간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상대방에 의해 삶이 개입될 수 있다는 뜻이고, 이는 나에겐 내 스스로의 마음과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단순히 물건들을 제자리에 두지 않고 정리하지 않는다든지, 옷을 허락 없이 빌려 입고 나가고 세탁하지 않은 체 둔다든지, 이런 단순한 사건들에 대한 문제가 아닌, 나의 삶이 존중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행동들이 내겐 너무나 스트레스였다. 무엇보다 이런 것들에 대해 아주 예민한 나와는 달리, 내 동생은 전혀 그런 점들에 대해 무감각하다는 것 또한 나의 화를 돋우기에는 충분했다. 무엇보다 이런 부분들에 대해 설명하고 이야기하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화를 내는 모습이 반복되자, 결국 나는 동생과 대화도 잘 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러 가지 해결방안을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별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방을 새로 얻을 수도 없었고, 이곳엔 아는 사람도 없어 함께 대화를 하며 공감할 수도 없었다. 나의 삶의 무대는 이곳이 아니었기에 학교를 다니거나 할 수도 없었고, 시기가 좋지 않은 만큼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는 일 같은 건 상상조차 할 수도 없었다. 그나마 시작했던 취미들도 다 금지였다. 나의 삶이 없다는 것. 그리고 나의 삶을 누군가가 항상 개입한다는 것은 예민한 성향을 타고난 체, 개인적인 삶만을 살았던 나에겐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그러다가 사람에게 반감을 가진 고양이에 대한 영상을 접한 것이었는데, 그 예민한 모습이 나의 모습 같기도 하고 내 동생처럼 보이기도 해서, 저 고양이보다도 내 스스로나 동생에 대해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 숙고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사실 나의 모습이 전과 같지 않음은 알고 있었다. 나의 삶이 건강하고, 나의 사람들과 건강한 교류가 있었을 때는 웬만한 일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했으니까. 그러나 군대에 있으면서 점점 나의 언어는 거칠어졌고, 군을 제대한 이후로도 나의 삶이 회복되지 못하자, 나의 입엔 비판적인 말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언어가 거칠다는 것은 그 마음에 분노를 안고 있다는 것. 항상 비판적인 말을 하는 사람은 그 마음에 비통함이 있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나의 마음에는 내가 군대에서 보고 겪은 정의롭지 못한 상황들에 대한 분노가 가득했고, 시간이 지남에도 회복되지 않는 나의 삶과 상황에 대해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것에서 억울하고 부당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물론 예전처럼 다시 나의 건강한 삶을 찾고 싶었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타인을 잘 이해하고 싶었지만, 나의 마음엔 내 스스로를 위한 공간조차 없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하려는 사람은 사실 그 마음이 조급하기 때문이라는 것. 20대 초반의 동생이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불안함과 조급함, 그리고 나와 주변 사람들에게 느끼는 열등감 또한 아예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어쩌면 내 동생도 스스로의 모습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오히려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타인 앞에서, 그것을 인정하는 일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을지 모른다.
결국 우리 둘 다 이유나 상황은 다르지만 스스로의 마음에 여유가 없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스스로를 좋게 바라볼 수 없었기에 삶의 모든 것에 대해 좋지 않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분명 누군가의 잘못도 존재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나의 삶이 힘든 이유는 나의 마음에 여유에 문제라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 그런 대우를 받으며 자랐었다. 말하지 못하고 울고 떼만 쓰며 아무것도 혼자 하지 못함에도 비판받지 않고 보살핌을 받았던 시절.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걷고 자라고, 성인이 되어 사회에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스스로에 대한 여유를 잃고 타인에게 기대하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관계는 이해와 멀어지기 시작한 것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런 사실을 깨닫는다고 해서 당장 무언가가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동생의 행동이 변하지도 않을 테고, 나의 삶이 갑자기 회복되는 일도 일어나리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나의 마음이 향해야 할 방향은 전과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작은 다짐을 해보았다. 필요없는 나쁜말은 하지 않기. 가벼워도 좋은말은 아끼지 않기.
도스토옙스키는 거침없이 남을 비난하기 전, 먼저 자신을 살리는 법부터 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는 건, 어쩌면 우리는 남에게 비판을 할 때에 나는 그렇지 않은데 남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 그렇다면 사실은 나 또한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아는 마음으로도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해야 하는 것이 올바른 대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부드럽게 말하는 사람은 그 마음이 안정된 사람이고, 진실을 입에 담으려면 마음이 담대해야 하며, 위로를 건네려면 마음에 사랑을 담아야 한다고 했다. 우리의 말들은 우리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 것일 뿐, 사실은 그 사람의 좋고 나쁨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거친 말을 하는 그의 마음은 그저 상처받은 고양이와 같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