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에겐 욕 다이어리가 있었습니다. 세상에 ‘욕’ 다이어리라니, 놀라우시죠? 그런데 사실입니다.
요즘 다들 자신의 MBTI 알고 계시죠? 저는 대문자 I, 내향인입니다. 검사할 필요도 사실 없었죠. 어릴 때부터 내향인이라는 걸 알 수 있을 만큼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이 쉽지 않았어요. 겉으론 아닌 척했지만요. 그리고 자존감과 자신감이 낮은 편이었습니다. 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고, 자신감이 부족하니 자연스럽게 사람들 사이에서 눈치를 많이 보게 되었습니다.
가족들, 특히 엄마의 눈치를 정말 많이 보고 컸어요. 엄마 한숨 소리만 들려도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았고, 혹시나 혼날까봐 긴장했어요. 칭찬을 받은 기억이 별로 없었습니다. 아무리 높은 점수의 시험지를 집에 들고 가도 잘했다는 소리 한마디를 듣지 못했습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는 집안일도 많이 돕고, 스스로 해결하는 일이 많아서 밖에서는 종종 성숙하다는 이야기를 듣곤 했는데, 집에서는 작은 실수를 해도 혼나기 일쑤였습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회사에서는 회사 사람들 눈치를 보았습니다. 가족에게는 전화만 와도 여전히 가슴이 뛰었습니다. 어디 하나 마음 편한 곳이 없었습니다. 혹여나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게 될까 두려웠어요. 좋은 사람이라는 칭찬을 듣고 싶어 했어요. 부탁을 받으면 거절을 잘 못했습니다. 불편한 점이 있어도 내색하지 못했고, 불만이 있어도 꾹 참았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대로 맞춰가려고 하며 살았으니, 속에 쌓이는 게 점점 많아졌습니다.
유일하게 내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곳은 다이어리뿐이었죠. 바로 그 욕 다이어리요. 거기엔 나를 막 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 이유도 없이 나를 미워하는 것만 같은 사람들에 대한 슬픔, 나는 한다고 하는데도 뒤에서 나를 안 좋게 얘기하는 사람들에 대한 격노, 아무리 애를 써도 사랑받지 못하는 딸이 되어야 하는 것에 대한 통증, 사람들에 대한 서러움과 반감으로 가득했죠. 도대체 왜왜왜 나한테 왜 그러는 거냐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몇 장이든 마음이 잠잠해질 때까지 글을 썼습니다.
아이를 낳고도 마찬가지였어요. 양가 식구들에게 서운한 감정이 생기거나 남편이 내 마음을 몰라주었을 때, 그럴 때마다 다이어리엔 또다시 부정적인 감정들이 잔뜩 쌓여 갔습니다. 그렇게 써 내려간 분노의 다이어리는 날이 갈수록 늘어났습니다. 마음속 이야기를 마구 쏟아내면 그 순간만큼은 조금 후련해지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했습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에 대한 미움만큼 자신에 대한 실망도 늘어나는 게 느껴졌거든요. 불평불만을 가슴에만 담아두고 겉으로는 내색하지 못하는 내 모습이 가식적으로 느껴졌어요. ‘사람들을 욕할 정도로 그렇게 무결한 사람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죠. 그런 의문이 생기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정작 나는 계속해서 그대로 있으려 하면서, 주변 환경이나 사람들만 변해줬으면 하고 바란다는 걸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앞 장으로 넘겨 일기를 천천히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일기에 쓴 글에는 그저 분노 표출만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몇 달 뒤 비슷한 일로 또다시 분노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했죠. 저도 모르게 얼굴이 점점 달아올랐습니다. 많이 부끄러워졌어요. 1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문제로 괴로워하고 짜증을 내고 버럭하고 있었으니까요.
‘이젠 내가 변해야 할 때다.’라는 문장이 마치 벼락 맞은 것처럼 제 머리를 때렸습니다. A4 용지 한 장을 펼쳤습니다. 불편하고 불만이고 불안한 나의 마음을 모조리 적었어요. 미운 상대도 적고, 어린 시절 괴로웠던 상처도 적고, 아쉬웠던 과거에 대해서도 적었습니다. 꼬리를 물며 적은 종이 한 장은 어느새 앞뒤로 가득 찼더군요.
글자로 빼곡하게 가득한 종이를 손에 들고 벅벅 찢었습니다. 단 한 글자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할 정도까지 잘게 잘랐어요. 그리고 미련 없이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그동안 썼던 욕 다이어리와도 이별했습니다. 그 행동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기를 선택하겠다는 선포와도 같았습니다.
전문은 <엄마의 틈새 시간> 책에서 읽어보세요⬇️
쉼표구름의 "엄마의 틈새 시간"중에서
https://brunch.co.kr/publish/book/112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