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실패'의 기억과 상처가 길고 깊은 누군가에게.
불과 2~3년 전쯤, '헬조선', '흙수저'와 같이 자신이 처한 현실을 부정적이고 자조적으로 표현하는데 자주 사용했던 단어가 하나 있다. 바로 '이생망 (이번 생은 망했어.)'이라는 세 글자다. 개인적으로 부정적인 의미의 신조어를 잘 쓰지 않지만 이 '이생망'이라는 단어는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많이 들었었다. 그 이유는 당시 가깝게 지내던 지인 중 한 명인 P가 늘 "난 이생망이야.."라는 이 한마디를 입에 달고 살았기 때문이다.
P는 다이어트 실패를 했을 때, 회사에서 과한 업무에 시달릴 때, 남자 친구와 다툼을 했을 때, sns로 수려한 외모를 가진 누군가를 봤을 때, 심지어 인터넷 쇼핑몰에서 산 옷이 맞지 않았을 때 등등 틈만 나면 누가 듣든 안 듣든 "이생망"이라는 말을 습관처럼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리고 작년 여름 어느 날이었다. 오랜만에 P를 포함한 여러 친구들과 다 함께 모인 자리가 있었다. 그중 나를 오랜만에 본 한 친구는 내게 요즘 글 쓰고 있는 일은 잘 되어가고 있냐고 물었다. 평소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내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데다가 실제로도 글을 써서 먹고살겠다고 마음먹고 글로서 뚜렷한 결과 (출판이라던가 큰 공모전에서 수상하는 일 등)를 아직 만들지 못했기에 나는 그 친구에게 간단하게 대답했다.
"음.. 난 뭐 그저 그래. 글 써서 먹고 산다는 게 1~2년 안에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니까.. 일단은 계속 쓰고 있어."
나의 대답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내 옆자리에 앉아있던 P는 테이블 위에 있던 나쵸를 우걱우걱 씹으면서 질문했던 그 친구를 바라보며 나를 대신해 짧고 강렬하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야. 어차피 얘도 이생망이야."
오랜만이었다. '이생망'이라는 단어도. 그리고 그 단어를 내뱉는 P의 그 목소리도.
그런데 처음이었다. '내 인생 = 이생망'이라는 그 말은 난생처음이었다.
사실 나는 지난 나의 실패나 실수, 포기의 과정을 자주 뒤돌아보고 후회하는 스타일이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이번 생은 망했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의 '내 인생 언젠간 빵 터지겠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다. 이런 나에게 P가 말한 "어차피 얘도 이생망이야."라는 말은 내게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날, 집에 돌아와 나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P가 보기에, 타인이 보기에 내 인생이 그렇게 별거 없어 보이는 걸까?' 물론 P가 어떤 진지한 의미를 가지고 내게 한말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자꾸만 P의 한 마디가 내 귓가에 아른거렸다.
어느 정도 내가 성장을 한 후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도전을 해봤던 일부터 한번 떠올려봤다. 그때부터 서른이 갓 넘은 지금까지 그 안에서 진한 글씨로 떠오르는 단어들은 정말 '이생망'이라는 단어와 어울려 보였다.
'대학교 입시 실패, 그 후 재수 도전, 하지만 다시 실패.
억지로 대학교에 입학한 후, 편입 준비하다가 포기.
대학교 졸업 즈음 내 의지가 아닌 타인의 꿈을 좇아 준비했던 7급 공무원은 중도 포기.
그 후 회사 입사 준비 도중 수차례 맛 본 탈락.
우여곡절 끝에 입사한 회사. 잘 다니나 싶었다가 몇 년 지나 다시 퇴사.
세계 여행 후 여행 크리에이터 (당시에는 여행 작가)가 되겠다고 떠남 - 성공적인 세계 여행 & 워킹 홀리데이인 줄 알았지만 한국에 들렸을 때 갑자기 심각하게 건강 악화 - 어쩔 수 없이 남은 여행과 워킹 홀리데이는 포기.
그 후 돌고 돌아 아주 오래전부터 간직해 온 '작가'라는 꿈을 세상 밖으로 꺼내어 도전하는 중인 현재, 수 없이 맞닥뜨려야 하는 공모전 탈락 소식.'
돌아보니 30년 조금 넘은 내 인생 속에는 화려하고 달콤한 성취, 성공의 열매보다는 짙은 회색빛의 쓰디쓴 실패와 포기의 발자국만이 초라하게 찍혀 있는 듯 보였다. 그리고 내 귓가에 내내 울렸던 "얘도 어차피 이생망이야."라는P의 그 한마디에 어렵지 않게 고개가 끄덕여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수록 계속해서 가슴 어느 한 구석이 답답해왔다. 그 안에서 꼭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네 인생이 왜 망해. 망했다고 말하기엔 너무 억울해!"
이번엔 그 마음의 소리를 들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 전에 '실패, 포기, 탈락'만을 떠올린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지금까지 내가 잘 해온 일들을 어려움 없이 떠올리기 시작했다.
내 최대 강점이라면, 일단 나는 성실한 편이다. 초-중-고-대학교 때까지 (16년 내내) 조퇴는 물론 지각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중-고등학교, 대학교 때 수업시간에도 단 한 번도 졸아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당시 속해있던 학교 내에서 성적은 늘 상위권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간 그 대학교를 졸업할 때도 4년 동안의 총학점이 가장 높은 학생이었다.
회사에서도 이 특유의 성실함과 부지런함 덕분에 상사들에게도 인정받았었고 퇴사를 할 때도 한국에 돌아와 재입사를 해달라는 제안까지 받았었다. 세계 여행 때는 다른 여행 인플루언서들처럼 몇 만 명의 팔로워들이 생겨나지는 않았지만 내 블로그를 읽고 외국 어느 낯선 길바닥에서 나를 알아봐 주는 구독자를 만난 적도 있었고, 어떤 구독자분은 다른 도시에 있다가 내 블로그에 빠져서 일부러 내가 있는 곳까지 나를 보러 와주시기 까지 했었다.
워킹홀리데이 때도 꼭 호주에서 바리스타를 하겠다며 도전했었다. 무엇보다도 서툰 영어와 호주 카페 경력이 없다는 점은 그 도전의 치명적인 장애물이었다. 실제로 50일 넘게 카페에만 이력서를 주구장창 돌렸고 그나마도 가끔 잡히는 면접과 트라이얼 때는 쓰디쓴 탈락을 맛봤었다. 심지어 첫 번째로 합격한 카페에서는 첫 출근날 1시간 만에 해고를 당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끈질기게 계속 다시 이력서를 돌리고 면접을 보러 다녔다. 하루에 많게는 3개의 면접을 본 날도 있었다. 결국은 텃세 세기로 유명한 퍼스라는 도시에서 메인 바리스타로 자리를 잡았었다.
이렇게 잘 해왔던 것들을 하나, 둘씩 생각하기 시작하니 어렵지 않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스스로를 칭찬하기 바빴다. 지금도 잘 해온 일들을 더 쓰라면 더 쓸 수 있다. 하지만 함정은 바로 이것이다. 반대로 지금까지 실패했던 일들, 후회되는 일들을 쓰라면 그것 또한 밤새워서라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늘 이생망이라는 말을 달고 사는 P의 인생을 겉에서 바라본다면 절대 '망했다.'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P는 서울의 유명 대학을 졸업했고, 외국어 능력도 뛰어나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연봉을 받으며 외국계 회사에서 일하고 있으며, 남자 친구와 오랜 시간 연애를 하고 있다. 그 누가 P를 보고 감히 '너 망했다!'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늘 P는 그녀의 삶에 불만족했다. 그건 늘 그녀는 그녀가 실패한 일들만 집중해서 보고 그 기억을 오랫동안 껴안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렇다. 지나온 내 인생, 앞으로 만들어갈 내 인생은 단 한 번 뿐이고, 그걸 살아가는 사람은 단 한 사람, '나'뿐이다. 이런 인생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망한' 인생이 될 수도 있고, '잘 살아온', '더 잘 살아갈' 인생이 될 수도 있다. 즉, 인생이란 그 인생을 살아온 주인공이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순식간에 다른 인생이 된다.
모든 것이 완벽한 인생도, 그런 삶도, 심지어 그런 물건도 없다. 좋은 시기가 있으면 안 좋은 시기도 있기 마련이고, 좋은 점이 있으면 안 좋은 점도 있기 마련이다. 그게 삶이고, 삶을 채우고 있는 모든 존재들의 공통점이다. 그러니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양면적인 인생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하느냐, 그 후 어떻게 만들어가느냐가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
만약 지난 인생 속 유독 '실패'라는 말이 아프게 느껴진다면 우리의 뜻과는 상관없이 이미 시작되어버린 이 인생 속에서 이미 너무도 열심히 살아왔다는 증거가 아닐까. 오랜 세월이 흘러도 실패의 상처와 아픔이 지속된다면 그만큼 그 도전은 간절했었고, 뜨거웠던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지나간 실패를 오로지 실패로서 인정해주고 안아주자. 그리고 착각하지 말자.
그 도전이 실패했던 거지, 내 인생이 실패한 건 아니니까.
오늘도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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