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추억'이 필요한 이유.
며칠 전, 예전에 책상 서랍 어딘가에 보관해둔 한 서류를 찾고 있을 때였다. 서랍의 깊이가 깊은 편이라 바닥에 깔린 서류가 한눈에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서랍 속에 쌓여있던 잡동사니들을 하나둘씩 밖으로 꺼내기 시작했다. 그 잡동사니들을 꺼내자마자 나는 반가움에 "어? 이게 여기 있었네?"라는 말이 자동으로 나왔다. 서류를 바로 찾기도 했지만 저 대사 속 '이게'는 내가 5년 전 쓰던 휴대폰이었다.
궁금한 마음에 휴대폰에 충전기를 꼽고 전원을 켜봤다. 분명 새 휴대폰으로 바꿀 때 쓰던 휴대폰에 저장되어있던 것들을 거의 다 지웠던 걸로 기억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당시 쓰던 메모 어플에는 소주 두 병 마신 후 썼을 법한 감성 넘치는 글들이 100개가 넘게 아직도 저장되어있었다. 사진첩에는 나를 닮은 20대 중반의 앳된 한 여자의 셀카들이 줄을 잇고 있었고, 지금은 연락이 닿지 않지만 당시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도 몇 장 남아있었다.
그렇게 한 장, 한 장 사진을 넘기고 있는데 시꺼먼 색의 한 비디오가 나왔다. 분명 내가 찍은 영상일 텐데 겉 화면만 봐서는 뭘 찍은 건지 알 수 없었다. 그 영상을 재생시켜보니 1분 남짓하는 짧은 영상 속 주인공은 나와 당시 남자 친구였다. (그 사람과 찍은 사진을 모두 지웠는데, 딱 하나 이 영상이 남아있었나 보다.)
영상 속 배경은 인천 바닷가였고, 시간은 밤, 둘의 얼굴을 보니 횟집에서 각 소주 1.5병씩 마신 직후의 상태였다. 주변에 밝은 조명이 없어서 밤바다는 잘 나오지 않았지만 우리 둘의 얼굴과 목소리는 또렷하게 녹화가 되어있었다. 나와 그 사람의 표정에는 '설렘'과 '행복'이 잔뜩 묻어있었고, 목소리는 평소 옥타브보다 훨씬 높은음에, 왜 웃는지 이해가 안 가지만 우리 둘은 계속 웃고 있었다. 그리고 영상이 끝나기 5초 전쯤 카메라만 바라보며 뭐라고 떠들고 있는 나와 그런 나를 바라보는 그 사람의 사랑이 뚝뚝 흐르는 두 눈동자마저 너무도 또렷하게 녹화가 되어있었다. 그 영상 속 우리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내 기억 속 그 순간은 흠잡을 때 없이 완벽했다.
그 사람을 떠올려도 이제는 보고 싶다거나 혹은 화가 난다거나 하는 그 어떠한 감정이 생기지도 않는데, 이상하게도 그 영상을 본 후 난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영상 속 '그날의 기억'이 불쑥 내 머릿속을 뒤덮기 시작했다.
인천으로 여행 갔던 그날은 오전부터 부슬부슬 가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대중교통만을 이용해 이동해야 했기에 날씨는 그 여행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설상가상으로 인천에 미리 알아 놓은 곳들은 휴일과 겹쳐서 카페며 식당이며 모두 문을 열지 않았었다. (심지어 한 카페는 며칠 전 공사에 들어갔었다.) 어쩔 수 없이 가까운 곳에서 점심을 먹고, 한 카페에 들어가 시간을 보냈다.
저녁만큼은 맛있는 곳에서 먹자고 굳은 다짐을 한 우리는 바닷가 주변에 횟집을 열심히 검색했다. 택시를 타고 도착한 횟집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게다가 바다가 보이는 창가 자리는 예약이 꽉 찼다며 홀에 딱 두 명이 앉을 수 있는 작은 테이블을 안내해줬다. 일단은 그 자리에 앉아 주문을 했다. 반찬들과 메인 메뉴인 회까지, 모든 세팅은 순식간에 끝났다. '저녁은 성공하겠지' 기대하며 우리는 바로 젓가락을 움직였다. 음. 결과적으로 우리는 맛있는 초고추장에 소주를 신나게 마셨다. (그다음부터 블로그 후기는 더욱 믿지 않기로 했다.)
그 후, 우리는 사귀는 동안에도 그 여행을 떠올리면 "아, 인천 여행 너무 아쉬웠어."가 아닌 "아! 그때 너무 재밌었는데.. 그때 진짜 좋았어!"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그 여행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입가에 은은한 미소부터 지어진다. 비가 오고, 몸이 지치고, 가는 식당마다 맛이 없고, 이런 자잘한 사건보다 그때 나와 그 사람의 표정부터 떠오른다. 그 사람과도 헤어진 지 딱 3년, 그리고 그 여행을 다녀온지는 5년이 흐른 지금도 이렇게 그때를 아름답게 기억하는 이유는 뭘까. 그 시간이 이제는 '추억'이 됐기 때문일까.
정말 '추억에는 힘'이 있기 때문일까.
10여 년 전에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한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주인공(삼순이)은 이렇게 말했다.
"추억은 아무런 힘이 없어요."
고등학생이던 당시에도, 30대가 된 지금까지도 삼순이의 그 한마디는 내 머릿속에 깊게 새겨져 있다. 왜냐하면 나는 '추억의 힘'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삼순이의 그 말이 맞는 것 같은 슬픈 예감이 자꾸만 들기 때문이다.
나는 '추억'이란 단어 속에 단지 '특별한 기억'이라는 뜻만 담겨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추억이라는 단어 속에는 '진심'이라는 의미가 있어야 그게 '추억'이라고 생각한다. 그 당시 진심이 없었다면 그건 추억이 애초에 될 수 없다. 시간이 흐르면서 기억은 너무도 쉽게 증발되니까. 당시 '진심'만이 그 기억의 휘발성을 약하게 만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추억'이란 생각보다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와 진심을 나눈 순간들이 있는 관계라면, 그 순간을 함께 기억해주는 관계라면, 그 힘으로 우리의 관계는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게 사랑하는 연인 사이든, 우정을 나눈 친구사이든. 그 어떤 관계라 할지라도.
하지만 나도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에 비례해 잦은 이별을 겪으며 깨달은 점이 있다. 추억의 힘은 생각보다 강하지 않아서 '미래'까지는 그 힘을 뻗치지 못한 다는 것이다. 추억만으로는 관계를 지속하는데 부족했다. 사전적 의미로 추억은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함. 또는 그러한 생각이나 일'이다. 그래서였을까. 추억의 힘이 아무리 강할지언정 추억은 항상 '과거'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자칭 '추억, 기억 맥시멀 리스트'로서 추억이 아무런 힘이 없다는 건 아니다. 추억은 한시도 쉬지 않고 달려가는 시간 속에서 과거의 어떤 순간, 특히 내게 어떤 특별한 감정을 느꼈던 그 순간을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가끔은 추억 속 웃고 있는 내 모습을 떠올리며 오늘의 눈물을 닦아낼 수도 있고, 때로는 추억 속 대견했던 나를 떠올리며 유난히도 힘겨운 오늘 하루를 견뎌낼 수도 있다. 추억의 힘이 그 추억을 함께 나누었던 그 누군가의 마음까지 닿진 못하지만 그 추억을 기억하는 나의 마음속 그 힘은 여전하다.
이 세상에 완벽한 건 없지만 적어도 추억 속 한 순간만큼은 완벽하니까.
아마 오늘 하루도, 지금 이 짧은 순간도 곧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문득문득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때론 '아련함'을 들고, 때론 '그리움'을 들고, 때론 '행복'을 들고.
그럴 땐 모두 잊고 추억 속 품으로 꼬옥 안겨버리자.
그 추억 속에 나는 결국 '내가 좋아했던 나'이자, '현재 내가 그리워하는 나'의 모습이 담겨있을 것이고,
그것만으로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겐 따뜻한 위로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게 바로 추억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힘'이지 않을까.
오늘도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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