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술이 고픈 밤, 대화가 고픈 밤, 그리고 사람이 고픈 밤.
그런 날이 있다. 퇴근 후 집으로 바로 들어가기에는 왠지 아쉬운 날. 바로 어제가 그랬다. 해야 할 작업을 마치고 카페에서 숙소로 가는 길, 며칠 전 갔던 수제 맥주집이 문득 떠올랐다. 빠른 걸음으로 달리다시피 걸어가 도착한 가게는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을 들어가려고 하면 덜컥 겁부터 난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오늘은 집에서 혼술을 하며 영화를 봐야겠다고 계획을 변경했다.
다시 신나는 발걸음으로 편의점을 향해 걸어갔다. 고심 끝에 고른 안주는 좋아하는 컵라면 하나, 통통한 소시지 바 하나, 미니 버터 구이 오징어 한 팩. 그다음에는 술을 담기 위해 술 냉장고 앞에 섰다. 여러 종류의 맥주 프로모션 스티커가 붙여져 있어서 하나하나 읽고 있는 도중, 내 눈에 꽂힌 건.. 다름 아닌 '한라산 소주'였다. '그래. 제주에서 이렇게 저렴하게 한라산 소주 마실 수 있을 때 마음껏 마셔두자.'라는 뻔뻔한 합리화를 하고 투명한 소주병을 집어 들었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후다닥 씻고 노트북, 안주, 술을 세팅하고 자리에 앉았다. 소주잔이 따로 없어서 머그잔에 소주를 따르는데 '골골골' 술 따르는 소리가 우렁찼다. 예전부터 보고 싶었던 영화 중 하나였던 공효진, 김래원 주연의 '가장 보통의 연애'를 틀었다. 이미 유튜브로 하이라이트 영상을 몇 번 봤지만 이렇게 제대로 보니 조각난 퍼즐이 맞춰지는 듯했다. 이 영화에서 가장 빠질 수 없는 요소 중 하나가 '술'이었던 만큼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아 더욱 재밌게 영화를 봤다.
일차원적으로 '술을 마시다가 남녀가 친해지고, 서로에 대한 호감이 생긴다.'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나중에 그 남녀는 "술이 문제야. 술만 안 마셨어도..."라면서 후회하기도 한다. 당연히 술을 마시면 긴장감이 풀리고 이성적인 판단력이 흐려지니까. 그런데 돌아보면 모든 술자리가 즐겁지만은 않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술'은 같지만 앞에 앉은 사람은 다르기 때문이다. 즉, 그 술자리가 재미있었다면 그 상대방이 남자냐 여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대화'가 재미있었던 것이고, 그 사람과 나는 전반적인 '코드'가 잘 맞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긴장감이 풀린 우리는 눈 앞에 그 사람에게 조금 더 빨리 호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머그잔에 '콸콸콸' 소주를 따라 작게 한 모금을 삼키고 "크...." 소리를 내고 곧장 소시지를 한 입 물었다. 노트북 화면 속 김래원과 공효진도 서로의 소주잔에 소주를 따르더니 원샷을 했다. 그리고 둘은 대화를 하고, 술 게임을 하고,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그렇게 취해갔다. 문득 예전 언젠가 영화 속 그 장면과 똑같은 순간을 즐기던 내가 떠올랐다. (맞은편에 앉은 사람이 이성이면 더 좋겠지만) 이야기가 잘 통하는 사람과 맛있는 안주와 그보다 더 맛있는 안주인 대화를 나눠먹으며 함께하는 그 자리가, 그 순간이, 그 감정이 그리워졌다.
그러고 보면 내 마음속 깊은 한편에서 잘 잊히지 않는 사람들은 나와 대화가 잘 통했던 사람들이다. 남자든 여자든 지금 당장 연락을 할 수 없는 관계라 할지라도 가끔씩 '00이랑 같이 있을 때 재밌었는데..'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을 좋아했었든 좋아하지 않았었든 그 사람과 함께 하는 술자리와 함께 나눈 대화가 즐거웠다면 쉽사리 그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다.
'깔깔깔' 웃는 그런 웃음보다도 함께 나누는 이야기가 '흥미'있어서 시간이 어떻게 가게 되는지도 모르는 그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있다. 아마 내가 이렇게 느꼈다는 건 상대방도 그랬었기에 이성적이든 인간적이든 어떤 끌림을 느꼈던 거 아닐까. 내가 잊지 못할 정도로 즐거운 대화를 나눴다는 건 상대방 또한 그 느낌을 느꼈겠지. 대화야말로 혼자는 절대 할 수 없는 거니까.
소주 한 병이 끝나갈 즈음, 공효진과 김래원은 둘이 처음으로 술을 마시고 취한 그 술집에서 그날 했던 게임을 이용해 서로에게 마음을 고백하면서 영화는 끝났다. 어두워진 노트북 화면에 두 볼이 발그레해진 채로 웃고 있는 내 얼굴이 순간 비췄다. 갑자기 내 얼굴이 노트북 화면에 비추어서 놀람과 웃김의 어느 사이에서 코웃음을 한 번 쳐주고, 나는 무의식이 시키는 대로 한 마디를 읊조렸다.
"하...... 외로워........."
난 이 외로움이 분명 좋은데, 또 가끔은 나랑 닮은 이 외로움을 가진 사람과 잠시나마 외로움을 잊고 싶은 마음은 욕심인 걸까.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모두 올라갈 때까지 멍-하니 앉아있다가 문득 예전에 친한 친구가 내게 해 준 말이 생각났다.
"남녀 사이든 친구 사이든 대화가 잘 통한다는 게 가장 센 거야. 다른 건 결국 다 짧은 시간이면 사라져."
그리고 나는 어제 홀로 그녀에게 들리지 않을 대답을 해봤다.
"맞아. 결국 우리가 못 잊는 건 잘 통했던 '대화', 내 마음을 읽어주는 듯한 그 '대화', 그리고 그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그 사람'인 것 같아. 네가 말했듯 대화가 가장 강력한 이유, 오랜 시간 잊지 못하는 이유는 그만큼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을 만나기 힘들다는 거겠지.
내가 가끔 그 사람을 떠올리듯 그 사람도 나를 가끔 떠올릴까. 그 사람에게도 나와 나눈 그 순간과 그 대화, 그 눈빛을 기억할까. 같은 장면, 같은 대화를 그리워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아주 가끔은 나랑 나눈 대화를 떠올리고 미소를 짓고, 다시 한번 나랑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면 좋겠어."
어제는 유독 누군가와 '짠'소리를 내며 부딪히는 두 개의 소주잔이 보고픈,
시끌벅적한 대화 속에서 우리 둘만의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누는 대화가 듣고픈,
그런 사람이 그리운 밤이었다.
오늘도 제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매일매일 글을 쓸 수 있는 이유는 제 글을 읽어주시고 느껴주시는 독자분들 덕분입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