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기 전엔 몰랐던 그 맛

네팔에서 먹은 달걀죽 위에 비친 한 사람.

by 기록하는 슬기


2년 전, 세계 여행 중이 었을 때다. 많은 여행자들이 말하길, 인도에서는 한 번쯤 물갈이가 심하게 온다고 했다. 그런 인도를 3개월 동안 여행했고, 다행스럽게도 나는 한 번도 물갈이의 공격을 받지 않았다. 인도 여행을 비교적 안전하게 잘 마치고 나는 꿈에 그리던 네팔 포카라로 향했다. 어두운 밤에 도착했지만 정말 듣던 대로 네팔 포카라는 공기부터 인도와 달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땅바닥에 소똥, 개똥이 없었다. 그걸로 난 이미 만족이었다. 함께 동행한 사람들 모두 포카라의 첫인상에 극찬을 아끼지 않으며 우리는 자축의 맥주 한 잔을 들어 올렸다. 이렇게 인도에서 네팔 포카라까지 무려 24시간이 걸리는 장거리 이동은 무사히 마무리가 되었다.


그러나 항상 불청객은 노크 없이 어느 날 불쑥 찾아오는 법. 포카라 입성 2일 차부터 나는 신고식을 혹독하게 치르게 된다. 분명 그날 오후까지는 컨디션이 괜찮았는데 저녁부터 온 몸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밤이 되자 그저 몸살 기운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1시간에 몇 번씩 화장실을 가기 시작했다. 그냥 장염이 아니라 '심한 장염 + 고열 + 감기 몸살'이었다. 홀로 숙소에서 끙끙거리며 겨우겨우 한국에서 챙겨 온 약을 찾아먹었다. 약효과는 미미했고 결국 한숨도 못 자고 화장실만 수 없이 들락날락했다.


두 시간쯤 잤을까. 어느새 해는 떠올랐고 다음날 아침이 찾아왔다. 문제는 오늘은 숙소를 옮기는 날이었다. 나는 포카라가 처음이지만 친오빠는 나보다 세계여행을 2년 전에 다녀왔는데 그때 이곳 포카라에서 5개월이 넘게 지내던 한인 숙소가 있다. 그 숙소 사장님, 사모님은 오빠에게 가족과 같은, 아니 어떤 면에서는 그 이상의 특별한 존재이신 분들이라 오빠가 일부러 그쪽 숙소에 내가 지낼 수 있도록 미리 말씀을 드렸었다. (도착한 날은 그 숙소에 방이 꽉 차서 이틀만 다른 곳에서 지내다가 이사를 하기로 했는데 하필 그게 오늘이었다.)


하지만 당시 내 상태는 몸의 뼈 마디마다 아픈 게 아니라 그냥 온몸의 피부 전체가 다 아팠다. 옷깃이 스치기만 해도 너무 아프고 몸에 힘이 아예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 20kg에 가까운 배낭을 메고 숙소로 걸어간다는 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조금 늦을 것 같다고 미리 숙소 사모님께 문자를 보내고 겨우 정신을 차려서 배낭에 짐을 꾸역꾸역 눌러 담았다. 어떻게 이 짐을 옮길까 막막하게 고민에 빠져있는데 동행 중 친한 커플 언니 오빠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기운이라도 좀 차리라며 과일 주스를 일부러 사오 신 것이다. 그리고 내 상황을 듣고는 바로 두 분이서 내 배낭 두 개를 각각 하나씩 나눠 메시고는 그 숙소를 잘 안다며 같이 가자고 하셨다.


무슨 정신으로 걸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언니 오빠를 붙잡고 한발 한발 움직이니 사진에서만 보던 그 숙소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건물에 들어서니 오빠의 블로그 속에서 자주 보았던 익숙한 사모님의 얼굴이 보였다. 사모님도 날 보시자마자 단번에 알아보셨다. "S 동생? 슬기 맞지?"라고 물으시고는, 내 상태를 보시자마자 "얼른 방으로 가자!"라고 하시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셨다.


내게 그 숙소 사장님, 사모님은 약간 연예인 같은 존재였다. 이 곳에 오기 전 친오빠를 포함해서 많은 여행자들을 통해 이 분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지만 실제로는 만나본 적이 없는, 그렇지만 언젠가 한 번쯤 꼭 실제로 만나 뵙고 싶던 그런 분들이었다. 그분들에게 나도 그랬을까. 여행을 시작하고 자주 상상하던 순간이 눈 앞에 펼쳐졌는데 막상 현실에서 나는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도 겨우 할 정도로 많이 아팠다.


2층에 있는 방을 안내받고 사모님과 짧은 대화를 뒤로하고 난 곧바로 침대에 쓰러졌다. 누워있는 것도 잠시, 어제에 이어 오늘도 화장실을 끊임없이 갔다. 정말 남아있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때 누가 똑똑하고 방문을 두드린다. 문을 열어보니 사모님이셨다. 내 상태를 보시고 네팔 현지 약을 급하게 구해서 오신 것이다. 아무래도 물갈이가 심하게 온 것 같다면서 이 약을 먹으면 가라앉을 거라고 하셨다. 얼른 약을 먹고 자라면서 사모님은 금세 2층에서 사라 지졌다. 사모님 말씀대로 이 약을 먹고 자고 일어나면 제발 가라앉길 바라면서 약을 꿀꺽 삼키고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땀을 뻘뻘 흘리며 몇 시간을 내리 잤는지 눈을 떠보니 이른 아침이었다. 다행히 화장실을 가는 숫자는 확연히 줄었고, 여전히 몸이 멍든 듯 아프긴 했지만 그 세기도 약해졌다. 살짝 졸다가 깨다를 반복할 무렵 닫아 놓은 방문을 뚫고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기야~ 밥 먹어라~" 사모님 목소리 같았다.


이 숙소는 매일 아침 8시쯤 1층에서 모든 게스트들과 사모님, 사장님이 함께 아침 식사를 한다. 그것도 한식으로. 게다가 이 숙소의 조식은 맛있기로 소문이 자자하다. 나도 장기여행에서 가장 목말라하던 것은 '한식'이었기에 이 숙소의 조식에 대한 기대가 컸었다. 1층에서 맛있는 전 냄새, 찌개 냄새가 코를 맛있게 찌른다. 순간 ' 조금 가라앉았는데 먹어도 괜찮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가 문득 화장실을 쉴 새 없이 갈 생각을 하니 입맛이 뚝 떨어진다. 사모님께 오늘은 아침 식사를 못 할 것 같다고 말씀을 드리고 다시 침대에 널브러졌다.


2시간 정도 지나고 눈이 떠졌다. 벌써 오전 10시. 그렇게 기대하고 온 네팔 포카라인데 도착하고 며칠 동안 내 기억 속 포카라는 숙소의 침대와 화장실뿐이다. 천장을 보며 멍 때리고 있는데, 그때 문자 하나가 왔다.

"슬기야. 아무것도 안 먹으면 오히려 안 좋아. 죽 끓여놨으니까 내려와서 죽 먹고 약 먹어. 지금 내려올 수 있겠니?"

사모님이었다. 이 문자를 보는 순간, 오묘한 감정이 들었다. 그냥 단순히 '고맙다.'라는 감정보다는 그 문자를 읽은 순간 나를 둘러싸고 있던 공기가 따뜻해졌다고 표현해야 할까. 오빠는 언제나 세계여행 이야기가 나오면 사모님, 사장님 이야기를 빠트리지 않고 했다. 아니 여행 이야기 거의 반이상이 이 곳 포카라 사장님 사모님, 그리고 이 숙소에서 있었던 이야기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오빠의 여행뿐 아니라 짧지 않은 인생 속에 큰 울림과 따뜻함을 주신 분들이라고 익히 알고 있었다. 아직 많이 겪어보지는 못 했지만 오빠의 마음이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은 문자 한 통이었다.


오빠는 여행 가기 전 나에게 말했다.

"네가 그곳에 가서 내가 느꼈던 그런 깊은 따뜻함을 느껴봤으면 좋겠어. 알잖아, 우리가 차갑고 좀 그렇잖아. 근데 나도 거기 있을 때 많이 부드러워졌고 마음도 많이 열렸어. 너도 가게 되면 내가 뭘 말하는지 알게 될 거야."



나는 바로 1층으로 내려갔고 사모님께서는 로비에서 다른 게스트 한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사모님은 나를 보자마자 "어우~ 내려왔구나. 잠깐만!"이라고 하시고는 서둘러 부엌으로 들어가 죽을 데워서 갖다 주셨다. 노란 달걀이 흰쌀밥과 보기 좋게 엉켜있었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진동하는 따뜻한 달걀죽이 벌써부터 코끝을 자극했다. 사모님께서는 조식 때 내가 밥을 못 먹은 게 마음에 걸리셔서 일부러 죽을 따로 만들어 놓으셨다고 했다.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리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죽 한 숟가락을 입에 넣었다. 죽이 입 안으로 들어오자 인도 여행 중에 늘 뾰족하게 곤두서 서있던 날들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또 한입을 입에 넣으니 고소한 향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돌려보니 거짓말처럼 햇살에 비춰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페와호수가 눈에 들어왔다. 짐을 옮길 때 분명 그 길을 따라 걸어왔는데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사모님이 직접 끓여주신 죽을 한 입, 두 입 먹으니 이제야 주변이 보였다. 마치 어두컴컴한 저녁에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와 밝은 형광등 스위치를 하나, 두 개 킨 것처럼 주변이 밝게 보였다. '아.. 정말 나 네팔 포카라에 와있구나..' 새삼 느꼈다.



숙소 1층 로비에서 바로 보이는 페와호수.



고마운 마음에 화장실 가는 걱정은 뒤로 해두기로 하고 사모님께서 만들어주신 죽을 싹싹 비워냈다. 그런 나를 지켜보시고는 사모님은 "아프더라도 잘 먹어야 돼!"라고 한 마디 해주셨다. 어쩐지 귀에 익숙한 대사였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엄마가 생각났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엄마와 그렇게 친하지는 않다. 내 주변 친구들을 보면 대부분 아빠와는 어색하고 엄마랑은 가깝게 지내던데 우리 집은 그 반대다. 아빠와는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편하게 나눌 수 있는 반면 엄마랑 있으면 뭔가가 어색하다.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생계를 책임지고 직장에 나가셔서 같이 보낸 시간이 적기도 하고, 엄마 스타일이 그렇다. 특히 자식들에게는 좀 더 쿨하셨던 것 같다. 엄마는 어린 시절부터 오빠와 나를 독립심 있게 키우고 싶어 하셨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도 엄마나 아빠가 알림장을 보고 준비물이나 숙제를 챙겨준다거나 심지어 여자아이였던 나의 머리를 묶어준 적도 없다.


우리 남매는 엄마가 원하는 대로 독립적으로 잘 컸지만 늘 어딘가가 비어있다고 느꼈다. 어쩌면 그런 결핍이 나와 오빠의 우애를 더욱 끈끈하게 만들어주기도 했지만 우리는 늘 따뜻함이 고팠다. 그래서인지 난 엄마를 떠올리면 애틋해서 눈물이 난다거나, 보고 싶다거나 그런 적은 아직 단 한 번도 없다. 여행하는 내내 낯선 곳에서 홀로 지독하게 외로울 때도 부모님이 너무 보고 싶어서 전화기를 붙잡고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는 그런 장면은 내 여행기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내 성향 탓에 외로움도 우울함도 자주 찾아왔지만 그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한편으로는 그걸 즐겼다. '나란 인간 원래 우울하지 뭐..'라고 하면서. 그런데 집 떠나고 6개월 만에 문득, 이 따뜻하고 고소한 죽과 사모님의 말 한마디가 엄마를 떠올리게 했다.


우리 집은 멀리서 보면 참 평범한 가정이다. 그 가족의 일원으로서 속 사정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 그런데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 하나 없듯 나름의 고충은 있었다. 나는 30년 인생을 살아오면서 엄마와 터놓고 진짜 대화다운 대화를 한 적이 거의 없다. 나는 밖에 나가서는 사람들한테 살갑게 잘하는 편인데 엄마한테는 그게 잘 안된다. 물론 엄마도 그리 살갑지는 않다. 그럼에도 네팔에서 '죽'을 보고 엄마 생각이 난 건 내가 어렸을 때의 기억 때문이다. 내가 아플 때면 엄마는 소화가 잘 돼야 한다면서 부드러운 죽을 끓여주시며 그때만큼은 다정하게 말해줬다. 그래서 어렸을 때 나는 아픈 게 좋았다. 엄마가 그때만큼은 나한테 관심도 가져주고 말 한마디, 한마디 따뜻하게 해 준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엄마는 흰 죽이 아니라 달걀도 넣고, 김치도 살짝 썰어 넣고, 가끔은 마법의 수프(라면수프)도 살짝 넣고 마무리는 참기름 몇 방울 떨어뜨려서 감칠맛과 고소함이 줄줄 흐르는 김치죽을 만들어주시곤 했다. 그리고 꼭 다 먹고 약을 먹으라고 했다. 사모님이 말씀하셨듯 "아플수록 잘 먹어야 돼!"라는 평범한 한 줄의 대사와 함께.







나는 긴 여행 속에서 강렬한 행복감과 그에 비례하는 외로움, 고독함을 번갈아 견뎌내며 느낀 점이 하나 있다. 나는 늘 따뜻함과 사랑을 갈망하는 사람이지만 내가 먼저 그 따뜻함과 사랑을 베풀지 못하는 모순적인 인간이라는 것. 솔직히 난 내가 이렇게 된 것을 엄마 탓을 해왔다. '어렸을 때 내가 따뜻한 말 한마디와 그런 눈빛을 더 많이 받지 못하고 커서 그래..'라고 생각하며 엄마를 원망했다. 어느 책에서 읽었는데 원망은 마음에 들지 않는 내 모습을 인정하지 않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온 힘을 다 해 사랑하지 못할 때나, 사랑 앞에서 늘 두려워서 도망가고 싶을 때나, 스스로 참 차가운 인간이라고 느껴질 때 나는 괜스레 어린 시절 엄마한테 받은 차가운 상처들을 떠올렸다. 마치 이 모든 게 엄마의 잘못인 것처럼.


그런데 길 위에서 난 뜻밖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만난 사람들이 나와 시간을 보내고 헤어질 때 하나 같이 나에게 해줬던 말이 있다. "슬기야, 너는 참 따뜻한 사람이야." 정말 몰랐었다. 나는 기껏해야 미지근해질 뿐 다시 금세 차가워지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을 줄 줄도, 받을 줄도 모르는 그런 사람. 오랜 시간 길 위에 있으면서 나는 나의 껍데기를 벗었고 나란 사람은 누구보다 쉽게 뜨거워졌고 또 그 온기가 오래가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먼저 마음을 열고 진심을 줄 수 있는 그런 멋진 짓을 할 때도 있었다.


그리고 나서야 보였다. 내가 그동안 가족에게서 받아온 관심과 사랑이 그제야 보였다. 멀어지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특히 그리움이란 감정이 그렇다. 그리움이란 서로에게 거리와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멀어지고 시간이 흘러야 그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리움의 감정을 느낀 후 보이는 것이 있다. 그건 그 사람의 '진심'이다. 그때 그 사람에게 느꼈던 진심이 있어야 나중에 그리움도 느껴지는 것이다. 나는 길 위에서 사모님이 만들어주신 달걀죽을 먹고 엄마가 해줬던 죽이 떠올랐고, 엄마가 떠올랐고, 엄마를 그리워했다. 그리고 나서야 그 당시 받았던 엄마의 진심이 보였다. 그 후 한참 뒤에는 엄마의 인생이 보였다. 그리고 이해가 갔다. 난 그 인생에 고마웠고, 또 미안했다. 그때 엄마는 최선을 다했던 것이었다.



아파야 엄마가 잘해준다고 느끼면서 '죽'을 맛있게 먹던 어린 날의 나와 자신을 찾겠다며 긴 여정을 떠나 네팔이란 나라에서 '죽'을 먹던 28살의 나는 몸은 아팠지만 마음만은 그 어느 때 보다 따뜻했고 아늑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죽이 입으로 들어와 식도를 타고 뻣뻣하게 움직이던 위장을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게 만들어주듯 차갑게 얼어붙었던 내 마음도 위장과 동시에 서서히 그 따뜻함과 고소함으로 향긋하게 녹아버렸다. 그건 오랜 시간 불 앞에서 죽을 만들었던 그 사람들의 손끝에서 나온 그 진심을 먹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모님의 달걀죽을 먹고 그다음 날부터 드디어 꿈에 그리던 아침 한식을 매일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건강을 빠르게 회복했고, 2주간의 히말라야 트레킹까지 무사히 다녀오게 되었다. 그 후로 난 포카라에 푹 빠져 2개월이 넘게 그곳에서 지냈는데 뒤돌아보면 가장 기억에 남던 장면은 히말라야 어느 봉우리의 정상이 아니다. '포카라'라고 하면 노란색과 하얀색이 얼기설기 섞여있던 따뜻한 사모님의 달걀죽과 마법의 수프가 들어갔던 고소한 엄마의 김치죽부터 떠오른다.


그리고 네팔을 떠난 후 알았다. 매일매일 옹기종기 모여 반찬을 나눠먹고 따뜻한 국을 나눠먹던 그때 그 사람들은 이미 나의 식구(食口) 였다는 것을. 매일 아침 밥상에서 우리는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 나눠먹기도 했고, 지나온 각자의 추억을 나눠 먹기도 했다. 매일 바뀌는 반찬을 보며 자주 들었던 한 마디가 있다. "사모님! 이거 우리 엄마가 해준 맛이랑 비슷해요! 맛있어요!" 매일 무심한 척 올라오는 반찬에는 우리의 이야기가 있고, 누군가의 얼굴이 담겨있다. 마치 내가 달걀죽을 보며 엄마를 떠올린 것처럼.




떠나고 나서 가장 그리운 것은 '익숙한 사람', '익숙한 맛'이다. <매일 숙소 1층에서 나눠먹던 조식>





우리는 항상 늦다. 우리는 매일 먹던 아침상을 못 먹게 되고, 그들과 멀어지고서야 매일 밥상 위에 올라오던 그 반찬들의 진정한 맛을 알게 된다.


네팔 여행 이후로 나는 1년 동안 낯선 땅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다. 그곳의 생활은 여행 때보다 나를 더 지치게 했고, 외롭게 했다. 그래도 달라진 게 있다면 그럴 때마다 엄마와의 어색한 전화 통화를 자주 했다는 것. 그리고 우리 가족을 어렵지 않게 떠올렸고, 엄마가 늘 만들어 주던 평범한 밥상을 떠올리며 그곳에서 견뎌냈다는 것이다. 함께 지낼 때는 몰랐던 집밥의 맛을 나는 집 떠나 6개월 후에 알았고, 그 이후로 1년이 넘도록 길 위에서 그 맛을 그리워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익숙한 밥상 위 밥과 반찬을 만날 수 있음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이 맛을 너무 늦지 않게 알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