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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퇴사를 말한 날'

그렇다고 다시 회사로 돌아가고 싶은 건 절대 아니에요.

by 기록하는 슬기

4년 전, 1월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와 똑같이 회사에 출근한 나는 창밖 뷰만 끝내주게 좋은 내 자리에 털썩 앉았다. 평소에도 출근 시간보다 여유를 가지고 출근을 하지만 오늘은 조금 더 일찍 도착했다. 출근을 일찍 한 날 뒷자리에 팀장님이, 옆자리에 대리님이 없을 때 늘 하는 일은 통유리창 너머 보이는 파아란 하늘과 멀리 보이는 롯데타워를 휴대폰 카메라로 담는 일이다. 가끔 볼 때도 멋진 하늘이었는데 오늘따라 더욱 이 자리의 이 창밖 뷰가 가끔 떠오를 것 같은 아련함이 불쑥 찾아온다. 그렇다. 나는 오늘 팀장님께 '퇴사를 하겠다'라고 말씀드리기로 결심한 날이다.


팀장님께서 워낙 내게 의지를 많이 하고 계셨기에, 팀 내에서 맡은 업무가 다각도로 많았기에 퇴사를 정식적으로 말하기까지 힘들었다. 나도 '퇴사' 앞에서 언제나 확신에 찼던 것은 아니다. 경력이 많지 않아 적은 금액을 받았지만 그래도 한 달에 한 번씩 따박따박 나오던 월급과 이제 정말 이 회사와 팀에 소속감이 생겨서 왠지 내가 빠지면 다른 팀원들이 고생할 것 같은 책임감에 '퇴사'라는 두 글자를 입 밖으로 내뱉기 망설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 결심하지 않으면 오래전 꿈이던 세계 여행이 너무도 멀어질 것만 같았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팀장님과 몇몇 팀원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한 후 커피를 다 같이 사서 다시 회사로 돌아가는 길, 나는 팀장님을 조용히 불렀다.

"팀장님! 저.. 드릴 말씀 있어요."

팀장님은 내 말투와 표정을 보고 그때부터 진지한 이야기라는 것을 직감하셨던 것 같다. 가던 길을 멈추시고 팀원들과 거리를 둔 후, 내게 이야기해 보라고 하셨다. 팀장님께 이전부터 내가 가지고 있던 목표, 꿈과 관련된 이야기를 모두 솔직하게 해 드렸다. 팀장님은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멍한 눈빛으로 충격을 먹은 듯 "아.. 이제 슬기님 가면 어떡하지???????"를 혼잣말처럼 되뇌시기 시작하셨다.


일단 팀장님은 내게 내가 하던 일의 인수인계하는 기간을 두 달 동안 해줄 수 있냐고 물어보셨다. 대부분 넉넉잡아도 인수인계는 한 달 정도로 생각하지만 당시 우리 팀은 회사 내에서도 이제 막 시작하는 스타트업 같은 분야라서 각자 맡고 있는 일이 너무도 많았다. 팀장님의 오른팔답게 나는 흔쾌히 팀장님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중에 전해 들은 이야기지만 그날 팀장님은 퇴근할 때까지 다른 대리님들과 줄담배를 피시며 "이제 어떡하지..?"를 무한 반복을 했다고 한다.)




P20161123_100654870_98D76499-5E43-4CEF-AD75-B57A65024255.JPG 날씨 좋은 날, 내 자리에서 바라보는 창밖 뷰는 아직도 가끔 생각난다.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평소 일대일로는 별로 소통이 없던 부장님께서 내 자리로 오시더니 미팅룸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셨다. 왠지 어제 팀장님께 말씀드린 퇴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실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부장님까지 한 달을 더 연장해서 일을 해달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라는 불길한 생각을 하면서 미팅룸으로 향했다. 미팅룸 문을 열고 들어가자 워낙 시원+깔끔한 성격의 부장님은 바로 사족 없이 본론부터 말씀하셨다.


"슬기님, 00 팀장님한테 2개월 후에 퇴사한다고 얘기 들었어요. 퇴사하고 세계여행 갈 거라고 하던데.. 그래서 하는 말인데 우리 회사가 싫어서 그만두는 게 아니라면, 여행하고 다시 재입사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요. 원래 우리 회사가 퇴사한 후에는 재입사 안 하게 되어있는데 이렇게 팀 내에서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예외로 다시 재입사가 가능해요. 만약 슬기님이 원한다면 내가 인사팀에 말해서 서류랑 다 준비해서 서류 작성할 수 있도록 도와줄게요."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부장님의 제안에 일단 나는 신경 써주셔서 너무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는 조금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씀드렸다. 부장님과 짧은 대화를 마치고 얼떨떨한 마음으로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가는 길, 회사 사무실의 전경이 내 눈에 꽉 찼다. 이 회사는 처음에 분명 내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었는데, 이미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삶의 일부분이 되어있었다. 낯설기만 하던 19층 우리 부서의 사무실의 풍경이 갑자기 애틋해지는 것 같았다.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우리 회사 정도면 완전한 S급 대기업은 아니지만 그래도 IT계열 회사라 복지도 좋고, 회사 내 분위기도 좋고. 만약 내가 이전에 했던 경력까지 인정해 준다면 직급이 올라가는 건 시간문제일 테고, 그러면 연봉도 올라가고. 장기 여행 다녀온 이후에 서울에서 자리잡기에는 현실적으로 이만한 직장도 없지..'


내 자리로 돌아가 앉으니 바로 뒷자리에 있던 팀장님께서 "얘기 잘했어요?"라고 물어보셨다. 사실 알고 있었다. 부장님께 팀장님이 내 퇴사 이야기와 재입사 이야기를 했을 것이라는 것을. 끝까지 나를 생각해 주고 배려해 주시는 마음에 팀장님께 너무 미안하면서도 고마운 마음이 가득했다. 어린 시절부터 꿈이었던 세계여행을 위해서 퇴사를 결정하게 되면 '시원'하기만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섭섭'한 마음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게다가 달콤한 제안에 며칠 동안 내 머릿속은 더 복잡했다.


며칠 뒤, 부장님과 그때 그 미팅룸에서 다시 이야기를 나눴다. 부장님은 내게 물어보셨다.

"슬기님, 생각해 봤어요? 어떻게 결정했어요? 그런데 재입사와 관련된 서류를 쓴다고 해도 꼭 무조건 다시 돌아와야 하는 건 아니에요. 너무 부담 갖지는 말아요."

"음.. 부장님. 이렇게 제안해 주시고 제 결정 기다려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저 이 회사 정말 좋고, 다 마음에 드는데요.. 재입사 서류는 안 쓰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제가 여행 다녀와서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요."

워낙 성격과 표현이 깔끔하신 부장님께서는 더 이상 길게 이야기하지 않으셨다.

"아, 하고 싶은 게 다른 일이 있구나? 그럼 그거 해봐야죠. 알겠어요. 혹시 마음 바뀌면 00 팀장님한테 말하고요. 그럼 일 봐요~"







아직도 가끔 퇴사를 이야기한 날, 재입사 제안을 받은 날이 가끔씩 떠오른다. 그때 나의 결심을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그건 명백한 거짓말이다. 여행에서 돌아와 몸도 마음도 많이 아픈 후 1년 간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가 있었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잡코리아, 사람인, 알바몬 등' 구직 사이트를 전전하며 입사지원서조차 쓰지 못할 때는 그런 결정을 했던 내게 욕 한 사발을 해주고 싶었다. 회사에서는 나처럼 해외 생활을 오래 해서 경력이 단절되는 사람을 싫어하기에 이전 회사 정도의 규모와 인지도를 가진 곳에 재취업을 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럼 그때 왜 그 좋은 제안을 거절했냐고, 그 이유를 좀 들어보자고 하신다면 나는 그때 일종의 '보험'같은 것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분명 재입사와 관련된 서류를 작성하고 여행을 간다면 나는 여행 중에도, 여행이 끝난 후에도 내심 안심이 될 것이다. 내가 돌아갈 곳이 있다는 생각에. 그리고 다른 길로 갈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나는 더 겁을 낼 것 같았다. 내가 세계 여행을 가는 진짜 본질적인 이유에 대해 깨닫게 된 것이다. 조금 더 나를 세상에 던지고 싶어서, 다양한 길로 걸어보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고 싶어서, 그렇게 나를 알아가고, 나를 좋아하고 싶어서, 그리고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다는 그 마음으로 긴 여정을 결심했었다.


만약 그때 내가 재입사를 결정하고 다시 그 회사로 돌아갔다면 지금보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는 더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을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당장 쉬워 보이는 길이, 안정적으로 보이는 길이, 덜 위험해 보이는 길이 결코 끝까지 그대로 평탄한 길로 이어져있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분명 나는 '나의 일'이 아닌 '회사의 일'을 아주 어렵게 아주 힘들게 견뎌내다가 얼마 안돼 살기 위해 도망쳤을 수도 있다.



그 결정을 내리고 4년이 흐른 지금 나는 정말 진심을 다해서 그때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지금 아무리 월세 내는 날이 다가오면 밤잠 설칠지라도, 카드값 빠져나가는 날 일주일 전부터 위산이 과다 분비되어 위통에 시달릴지라도, 그럼에도 나는 지금 내가 지내는 장소인 제주라는 곳이, 그리고 지금 하는 일인 글쓰기라는 나의 일이 좋다.


나는 지금 나의 시간과 나의 삶이 좋다.

지금 나는 진정으로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시간 속에서 그러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P20160825_132401795_DD944939-A6FE-43E0-A0CC-7E461C176DA8.JPG 하지만 이전에 이 자리에서 보낸 시간들이 있기에 제가 지금 이곳에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잘 알아요. 여전히 고맙습니다. 그때 함께했던 분들과 시간들 모두.






오늘도 저의 이야기를 찾아주시고 들어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저의 지난 선택에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 글 쓰는 사람이 되기로 다짐하고 지금까지 이어올 수 있는 이유는 제 이야기를 공감해 주시고 저를 응원해 주시는 여러분들 덕분입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 )



*브런치 새 글은 매주 월요일, 목요일에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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