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생각하면 부들부들하지만 덕분에 단단해졌죠.
제주도에 지내면서 유독 자주 생각나는 곳과 때가 있다. 바로 3년 전 호주에서 보냈던 시간이다. 섬이라는 비슷한 지리적 환경 때문에 생기는 종잡을 수 없는 특유의 섬 날씨 때문일까. 아니면 이유는 다르지만 매일 같이 출근하는 카페라는 공간 때문일까. 습기를 가득 머금고 있는 뜨끈한 바람을 뚫고 카페로 걸어갈 때면 3년 전 비바람을 뚫고 편도 1시간 30분이 걸려서 카페로 출근하던 바리스타 캐띠(영어 이름 'Cathy')의 시절이 생각난다.
특히 요즘 제법 습해지는 제주의 여름 날씨 때문인지 지겹게 비가 내리던 우기의 퍼스가 생각난다. 그리고 그 우기 때, 퍼스에 입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리저리 치이며 상처 받고 견디던 그때의 내가 떠오른다. 게다가 바리스타로 처음 일한 카페에서는 본의 아니게 인종차별부터 임금 문제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좋지 않은 일을 겪었었다. 그 카페는 젊은 부부가 운영하는 브런치 카페였는데 각자 국적이 다른 이민자들이었다. 베트남 출생이지만 어린 시절 호주로 이민 온 여자 사장, 부모님은 포르투갈 사람이지만 짐바브웨의 국적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여자 사장을 만나 호주 영주권을 갖게 된 남자 사장이었다.
언뜻 생각하면 이민자 출신의 사장들이 나같이 외국에서 일을 하러 온 노동자들을 더 잘 이해해주고, 잘 대우해줄 것 같지만 현실은 그와 정반대다.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당했던 차별과 그 상처를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약한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아니 오히려 더 심하게 갚는다. 그와 동시에 그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들은 호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나를 대하는 태도와 호주 바리스타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 가벼운 이야기를 할 때는 비슷해 보이지만 누군가 실수를 했거나 자신들에게 조금이라도 피해가 가는 상황이 만들어질 때면 확연히 그 태도는 달라졌다. 그리고 남자 사장과 둘이 일하는 날이면 내게 동양인 손님들을 가리키며 서슴없이 외모를 평가하고 비하하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더 슬픈 현실은 그런 인종 차별을 당할 때마다 기분은 더러웠지만 그리 큰 충격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도 인종차별을 받아서 그런지 '그런가 보다..'하고 넘겼었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이었다. 그날은 원래 내가 일하는 날이 아니었지만 직원 한 명이 펑크를 내서 내가 대타로 출근을 했다. 그 카페의 가장 바쁜 날과 시간은 주말 오전 10시~오후 2시였다. 게다가 날씨가 화창하면 그 동네 주민들이 모두 그 카페로 "준비, 출발!"을 외치고 모이는 것처럼 카페 외부와 내부 테이블을 꽉꽉 채웠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일하던 카페가 퍼스에서 유명한 브런치 맛집이었다고 한다.) 하필이면 내가 대타로 일했던 그날이 퍼스 우기 중에 너무 오랜만에 찾아온 '맑은 날'이었다.
그 당시 나는 그 카페에서 2개월 넘게 일했던 시기라 일이 능숙할 때였는데도 그렇게 바쁜 건 처음이었다. 그날은 내가 대타로 나온 거라 메인 바리스타는 다른 친구가 하고 있었고 나는 멀티 플레이로 일을 했다. 서빙을 위주로 하다가 바쁘면 설거지도 하고, 그러다가 커피도 만들고 왔다 갔다 역할을 바꾸며 일을 하고 있었다. 참고로, 조금만 바빠도 예민 지수가 곱하기 100000000은 되는 부부 사장들인데 그날은 역대급의 '바쁨 X 예민함'이었다.
가장 바쁜 시간인 오후 12시쯤이었다. 빠르게 음식 서빙을 마치고 그릇이 모자라 보여서 바로 접시들을 헹구고 식기세척기로 옮겨 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여자 사장이 가시 돋친 날카로운 목소리로 키친에 "조금 전에 10번 테이블에 머핀 누가 서빙했어?????"라고 물었다. 키친 뒤편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어서 잘 들리진 않았지만 '10번 테이블'이라는 단어가 내 귀에 콕 박혔다. 그 순간 나와 딱 눈이 마주친 여자 사장은 당장이라도 이 건물 전체를 얼릴 것 같은 싸늘한 눈빛으로 "이거 Cathy 네가 했니?"라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갑자기 여자 사장은 손에 들고 있던 머핀을 내게 보여주고 바로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렸다. 그리고 키친과 바 안에 모든 직원들이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말했다.
"이거 봐봐! 이런 머핀을 그대로 서빙하면 어떻게!!!! 너 때문에 손님한테 컴플레인 들어왔잖아!!!"
베이킹에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 너무 익힌 건지 너무 덜 익힌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딱 봐도 정상적으로 만들어진 머핀은 아니었다. 그런데 웃긴 게 머핀을 굽는 사람들은 옆에 있는 셰프들이고 게다가 그 머핀이 겉이 이상했던 게 아니라 속을 갈라야 그 상태를 볼 수 있던 건데 나한테 그렇게 쥐 잡듯이 소리를 질렀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여자 사장이 셰프가 아닌 내게 화를 낸 이유는 하나다. 요리를 하지 못하는 그 사장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셰프들이 관두는 거였다. 그러니 셰프들 보란 듯이 가장 만만한 내게 화를 낸 것이다.
이번만큼은 평소에 당하던 자잘 자잘한 차별과는 달랐다.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났다. 하지만 여자 사장은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자기 말만 소리 지르듯 해버리고 그 자리를 바로 떠나버렸다. 잠시 키친에는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니 평소에 나와 친하게 지내는 셰프들은 나에게 미안하단 표정을 짓고 있었고, 다른 바리스타 동료는 입모양으로 "잊어버려!"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막내 셰프는 내게 조용히 다가와 나지막이 이렇게 말했다.
"Cathy! 미안해 괜히 우리 때문에.. 근데 너무 신경 쓰지 마~ 저 사장 원래 이상하잖아.."
동료들의 이런 위로를 듣는데 순간 울컥했다. 내가 너무 스스로 작아지고 초라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눈물을 보이면 나 스스로 작고 초라한 사람임을 자처하는 것 같아서 꾹 참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밝은 척 다시 사람들을 대하며 일했다.
바쁜 시간이 지나고 오후 3시 즈음 나보다 먼저 출근했던 오픈 조 멤버들이 하나 둘 퇴근을 했고 여자 사장과 나, 단둘이 남아 마감을 하고 있었다. (호주 브런치 카페는 마감을 보통 오후 4~5시면 한다.) 서로 한 마디도 안 했지만 우리 둘은 당장이라도 깨질 것 같은 살얼음 같은 이 분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어색하게 둘이서 한 시간 넘게 마감 청소를 모두 마쳤을 때였다. 가방을 챙겨서 퇴근 하기 직전, 여자 사장은 대뜸 무척이나 상냥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내게 이렇게 말했다.
"Cathy.. 아까는 머핀 때문에 소리 질러서 미안해.. 너도 알겠지만 오늘 우리 너무 바빴잖아. 내가 너무 예민했던 것 같아. 미안해~"
이 말을 듣는 순간 '그래도 사장이 사과를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솔직히 무서웠고 역겨웠다.
그동안 그 여자 사장에게 받은 차별들이 결코 무의식이라거나 실수가 아님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나에게 상처 줬던 말과 행동을 해오면서 스스로 다 알고 있었음에도 계속해서 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누가 봐도 내게 그렇게 소리 지르며 화풀이를 했던 게 심했다는 것을 뒤늦게 느낀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평소에 욕을 먹어도 먼저 웃고 다가가는 내 모습과 달리 끝까지 굳은 얼굴로 일하던 내 표정을 보고 직감했던 것 같다. 지금 사과를 하지 않으면 내가 이 가게를 곧 그만둘 것을.
이 여자 사장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가게' 뿐이 없었다. 그 가게에 피해가 갈 것 같은 순간 늘 사장의 미간에는 진한 주름이 생기면서 언성은 높아졌고 날카로워졌다. 사장 입장에서 보면 이제야 내가 쓸 만한 직원이 됐는데 당장 관둔다고 하면 장사에 타격이 생기니 헤어지기 전에 나에게 억지로 사과하는 게 내 눈에 보였다. 아무리 다른 언어로 소통한다 할지라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직감'은 무시할 수 없다.
사실 그전부터 그들이 자존감을 깎는 듯한 언행을 내게 줄곧 해왔었지만 참고 또 참았었다. 이유는 당시 내가 호주 바리스타로서 경력이 없었고, 영어실력도 모자랐기에 그런 차별과 서러움을 겪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날 깨달았다. 나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었기에 여자 사장이 내게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이전에 그 카페 사장들이 내게 차별을 하고 말도 안 되는 걸로 화를 낼 때 그들에게 내 의사를 표현했었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때 나의 커피 실력과 영어 실력을 핑계 대며 나를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이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영어라는 언어가 조금 서투르다는 이유로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무조건적으로 잘못했지만 그런 행동을 합리화하면서 그저 받아들이기만 했던 나에게도 문제는 있었다.
그때 알았다. 나 스스로를 생각하고 대하는 태도가 결국 타인이 나를 생각하고 대하는 태도가 된다는 것을 말이다.
6월의 제주, 사방에서 불어오는 습한 바람을 맞으며 카페로 걷는 길에 생각보다 자주 생각난다.
3년 전, 타인에게 상처 받고 그 상처를 당연하다 생각했던, 나 스스로에게 그 상처를 허락했던 내가 떠오른다.
그리고 현재 나를 돌아본다.
나는 지금 괜찮은지.
타인에게 받는 상처를, 그리고 스스로에게 주는 상처를 당연하게 허락하고 있지는 않은지.
마지막으로, 나는 나 스스로를 잘 지키고 아껴주고 있는지를.
개인적으로 추진 중인 프로젝트와 맡은 업무 때문에 브런치에 예전처럼 자주 글을 올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남겨주시는 댓글들 모두 챙겨보고 있고, 하루에도 몇 번이고 틈날 때마다 들어오는 곳은 브런치입니다.
그리고 저는 아직 제주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조금만 지금 상황이 안정이 되면 브런치에 자주 글 올리도록 할게요.
언제나 제 글과 저를 궁금해해 주시고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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