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한 도시, 태국 치앙마이.
많은 장기 여행자들 사이에서 '사랑의 도시'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바로 태국의 치앙마이다. 장기 여행자 혹은 태국 여행을 했던 사람들 중에 치앙마이에 머물렀다면 한 번쯤 실제로 겪었거나 혹은 전해는 들어봤을 것이다. '치앙마이에서의 로맨스'에 대해. 나도 지난 세계 여행 때 만났던 사람들 중에 치앙마이에서 오래 지냈던 몇몇은 그곳에서 이미 한 편의 청춘 드라마, 멜로 영화를 찍고 왔다는 것을 익히 들어왔다. (실제로 내 여행 친구 중 한 명은 치앙마이에서 만난 인연과 결혼까지 했다.)
내가 햇수로 가장 많이 갔던 나라 태국, 그리고 가장 오래 머물렀던 도시는 치앙마이일 만큼 나도 사실 치앙마이에서 멜로 영화 한 편, 아니 한 씬 마저 안 찍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인 거 너무 티 나겠지. 그러니까 때는 세계 여행을 떠났던 2017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늘에는 쨍한 태양과 진한 회색빛의 먹구름이 쉴 새 없이 번갈아가며 땅을 뜨겁게 데웠다가 두꺼운 빗방울로 금세 물바다를 만들던 어느 우기에 일어난 일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때 이전 남자 친구와 헤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장기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혼자 마음속으로 이별을 오랫동안 준비했고, 여행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별을 통보했다. 그 이유는 앞으로 내 여행이 언제 어떻게 끝날 줄 모르니까. 나를 기다린다는 그에게 기다려달라고 하기 싫었다. 여행이 끝나면 결혼을 준비하자는 그의 말이 달갑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와 그는 성격과 성향은 잘 맞을 수 있었지만 인생의 큰 가치관은 달랐다. 나는 그의 곁에서, 그는 나의 곁에서 오래 하면 할수록 행복해질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내게 다시 잘해보자고, 기회를 달라고 말했지만 나는 철저히 외면했다. 그의 눈물 섞인 목소리를 한 번 더 듣는다면 내 결심은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것임을 알기에. 그렇게 이기적인 이별을 하고 몇 개월이 지나 내가 간 곳은 치앙마이였다. 20대 초중반, 홀로 동남아 일주를 할 때 치앙마이에서 좋았던 기억만 있었다. 조금 익숙한 곳을 간다면 마음 또한 편안함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에 치앙마이를 다시 찾았다.
이번에는 치앙마이에서 한 달 이상을 살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장기 숙소를 소개해준다는 한인 게스트 하우스부터 찾아갔다. 지도에 찍힌 대로 작은 골목 맨 끝에 도착을 했는데, 내 앞에는 가정집인지 게스트 하우스인지 모를 집 한 채만 덩그러니 보였다. 반쯤 열린 대문을 밀고 들어가 노크를 하고 "사장님~"하고 불렀다. 문고리를 살짝 돌려보자 문은 쉽게 열렸다. 좁은 문틈 사이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자 게스트 하우스 1층 로비에서 한 남자분과 눈이 마주쳤다. 그분은 나를 보더니 서둘러 문을 활짝 열어줬다.
하얀 얼굴에 밝은 갈색 머리카락, 루즈 핏 파스텔 톤의 반발 셔츠를 입고 있는 이 분이 사장이라기엔 너무 젊어 보였다. 내 속마음을 읽은 건지 그분은 곧바로 자신은 사장이 아니라 여기 머무는 게스트라고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면 사장님이 올 거라고 했다. 그리고는 부엌으로 가 시원한 생수를 건네주며 "멀리서부터 걸어오셨어요? 배낭 엄청 무거워 보이는데요.."라고 했다. 땡볕 아래에서 내 몸보다 큰 배낭을 짊어지고 걸어온 내 몰골을 본 것 같다. 그 사람의 질문에 대답할 새도 없이 일단 "엇.. 물..!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물부터 벌컥벌컥 마셨다. 그게 바로 그 사람과 나의 첫 만남이다.
그 사람은 나중에 알고 보니 나보다 나이가 10살 가까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하던 사업을 모두 정리하고 태국에 정착하기 위해서 왔다고 했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고 싶다면서 첫 번째 도시로 치앙마이를 골랐다고 했고, 나를 처음 만난 날이 치앙마이에 도착한 지 3일째 되는 날이었다고 했다.
그와 나는 같은 숙소에 머무는 동안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서였을까. 성숙해 보이는 그의 생각과 말투, 그리고 여유가 느껴질 때마다 전 남자 친구가 떠올랐다. 전 남자 친구에게 보이지 않았던 점들이 그에게 보일 때마다 나는 괴로웠다. 어차피 완전한 이별을 했기에, 이별을 하고 몇 개월이 지났기에 죄를 짓는 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자꾸 나는 전 남자 친구의 마지막 울먹이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아이러니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 사람이 나를 보는 눈빛과 내게 건네는 다정한 목소리는 나를 위한 진통제 같았다. 그 사람의 몸짓, 말투 하나하나 너무 달콤해서 나는 이별 후 더 겪어야 할 아픔을 뒤로 미루기로 했다. 치앙마이에서 여럿이 함께 몰려다니던 사람들은 어느새 모두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고 그 사람과 나, 단둘이 지내는 시간이 더욱 길어졌다.
낮이면 그 사람은 내가 머무는 숙소 앞으로 왔다. 나는 자연스레 오토바이 뒷자리에 올라타 함께 치앙마이 외곽을 드라이브했다. 정해진 것 없이 어떤 도로 위를 달리다가 비가 오면 편의점에 들러 컵라면을 나눠먹고, 뜨거운 햇볕에 피부가 따가워질 때면 산속 작은 카페에 들러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해 질 녘, 다시 치앙마이로 돌아와 우리는 늘 얼음이 동동 띄워진 시원한 맥주를 나눠 마셨다. 우리가 우연히 발견한 현지인들만 가는 로컬 포장마차가 있었는데 그곳은 우리의 아지트가 됐다. 푸드 트럭 몇 대가 공터에 줄지어 있고, 그 앞에는 다양한 꼬치들이 노란 불빛 아래 숯불에 구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선택받은 꼬치들은 바로 숯불 위로 올라가고, 그 옆에는 큰 덩어리의 얼음과 캔맥주가 가득 담긴 아이스박스가 있었다.
우리는 그 공터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여러 테이블 중 한 자리를 골라 앉았다. 조금은 지저분한 테이블 위에 맥주 잔과 꼬치 몇 개를 올려놓고, 삐꺽 거리는 의자 위에 앉아 참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눴다. 그때 우리가 나눈 대화 내용의 기승전 '결'은 '우리가 만나서는 안될 이유'에 대해서였다. 당시 나는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나온 세계 여행의 초반이었기 때문에 그곳에 머물 수 없었고, 그 사람은 그곳에 정착을 목적으로 왔기 때문에 그곳을 떠날 수 없었다.
그 자리에서 몇 번이고 취할 때까지 대화를 나누고도 해가 지고 나면 어김없이 저녁마다 그 포장마차를 찾았다. 그날도 똑같은 꼬치에 똑같은 맥주를 시키고 앉아 트럭에서 흘러나오는 태국 노래를 듣고 있었다. 그때, 그 사람은 오늘은 굳은 결심을 했다는 듯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고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슬기 씨. 음.. 지금 제가 제 감정을 표현하면 안 되는 거 알고 있어요. 어차피 곧 우린 헤어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런 말을 한다고 해도, 우리가 서로 마음을 확인한다 해도, 우린 결국 한 달 뒤면 헤어지잖아요. 그래서 일부러 저 사실 슬기 씨한테 연락 안 하려고 휴대폰도 몇 시간 동안 안 보고 멀리 두고 해 봤거든요? 근데 그게 잘 안 돼요. 궁금하고 생각나고 보고 싶고. 전 이렇게 슬기 씨가 내 옆에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슬기 씨는 어떤 마음이에요?"
솔직히 말하면 이 얘기는 내게 그다지 새롭지 않았다. 이전에도 마시는 맥주의 양이 늘어나면서 그와 늘 이런 식의 대화를 나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그 사람의 눈빛은 조금 다르긴 했다. 뭔가 오늘 결단(?)을 내리고 말겠다는 강렬한 눈빛이랄까. 그의 눈빛을 읽었기에 나도 오늘은 조금 더 솔직해지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대답했다.
(이번 이야기는 총 2편으로 나누어집니다. 다음 이야기는 2편에서 계속됩니다.)
오늘도 제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글을 쓸 수 있는 이유는 '제 글을 읽어주시고 느껴주시는 분들' 때문이고, 덕분입니다.
항상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