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했던 도시, 태국 치앙마이.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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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in 치앙마이 1편과 이어집니다.)
그리고 나는 대답했다.
"저 솔직히 말해도 되죠?"
그 사람은 내가 뱉는 물음표가 채 끝나기도 전에 답했다.
"그럼요. 솔직하게 말해주는 게 저한테도, 슬기 씨한테도 좋을 것 같아요."
"음.. 저는 잘 모르겠어요. 오빠가 저한테 주는 관심이 그저 좋은 건지, 아니면 정말 제가 오빠를 좋아하는 건지요. 그런데 이렇게 헷갈리는 와중에도 오빠라는 사람이 궁금해요. 그리고 이렇게 같이 있는 시간이 좋아요. 제가 지금까지 여행을 하면서 '그 순간에 집중하자'라는 걸 배웠는데, 이번에도 실천하기 참 힘드네요. 우리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이번에 그 사람은 내 물음표가 끝나고도 짧지 않은 침묵을 지킨 후 입을 뗐다.
"우리 서로가 서로를 궁금해한다는 거만큼은 확실하네요. 그러면 만나봐요 우리. 끝이 보이더라도 일단 시작해 봐요. 앞날은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나는 슬기 씨가 여기 있는 동안만큼은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어쩌면 나는 그 사람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던 내 마음을, 텅 빈 내 마음을 누군가의 단단한 문장으로, 누군가의 흘러넘치는 관심으로 잡히기를, 채워지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예전에는 '좋아하면 안 되는데..', '참아야 하는데..'와 같은 생각 때문에 머리와 가슴이 매일 실랑이를 벌이느라 에너지를 소모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치앙마이에서의 여행이라기보다 '생활'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게 된 우리는 제법 각자의 루틴과 서로의 루틴이 생겼었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바스락거리는 침대 속에서 여유가 지겨워질 때까지 만끽하다가 그제야 씻고 노트북을 챙겨 카페로 향했다. 그곳에서 혼자 간단하게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밀린 여행기를 쓰면 금세 오후 4~5시가 됐다.
하늘에서는 늘 그 시간에 비를 뿌려댔는데 카페 통유리창 너머로 바라보는 동남아의 스콜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비가 한차례 오고 난 후,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 그 사람이 나를 보러 카페로 왔다. 그 사람은 낮에는 바쁘게 일을 하고 저녁 즈음에는 항상 내가 있는 곳으로 왔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그 카페에서 음식을 시켜놓고 같이 공부를 하기도 하고, 가끔 날씨가 좋은 날이면 오토바이를 타고 라이딩을 하곤 했다. 그리고 또 가끔은 이제 우리의 이름까지 기억하는 그 아지트, 포장마차를 찾아가 술과 대화를 나눴다.
참 웃기지만 나는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조금 지쳐갔다. 나는 그 사람과 있는 동안 진짜 내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 사람이 왠지 싫어할 것 같은 행동과 말은 전혀 하지 않았다. 서운하다고 느꼈어도 참았다. 왜냐면 우리는 이제 곧 헤어지니까. 끝이 보이는 만남에 굳이 흠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반대로 솔직했던 그는 그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줬다. 때로는 정말 철없는 아이 같은 모습부터 때로는 아주 무뚝뚝한 30대 중후반의 남자의 모습까지도. 내 앞에서 모두 보여줬다. 내가 그에게 호감을 느꼈을 때의 모습보다 사실은 더 자주 그 반대의 모습을 마주해야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내게 말했다.
"나 살면서 다른 사람 앞에서 이렇게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다 보여주는 거 처음이야. 그런데 네 앞에서는 너무 마음이 놓여."
미안하지만 그때 나는 그와 정반대의 마음이었다. 모르겠다. 시작부터 그와 나의 감정이 달라서였는지, 나는 나의 떠남을 더 확고하게 생각했기에 그랬는지. 그렇게 하루하루 평온한 듯 그렇지 않은 치앙마이에서의 일상이 흘렀다. 그리고 치앙마이에 도착한 지 두 달을 딱 채운 날 나는 결심했다. 이곳을 떠나기로.
꼭 그 사람 때문이 아니었다. 여행이 끝나갈 무렵이었다면 모르겠지만, 나름의 계획과 루트를 가지고 시작한 장기 여행이었기에 너무 오래 지체하면 안 됐다. 다음 나라로 떠날 비행기 티켓을 끊기 전에 미리 그에게 말했다. 그는 알았다고, 이해한다고, 대답했지만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내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치앙마이 북부에 작은 마을로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출발하는 날, 하필이면 태풍의 영향으로 하늘에서는 무섭게 비바람을 뿌려댔다. 그래도 서둘러 이동을 한 덕분에 우리가 가기로 한 목적지에는 해가 떨어지기 직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허기가 진 우리는 비를 쫄딱 맞은 채로 작은 식당에 들어갔다. 두꺼운 빗방울이 낡은 지붕에 닿을 때마다 나는 그 소리는 우리의 목소리마저 잘 안 들리게 컸지만 그럼에도 좋았다. 하염없이 내리는 비가 만드는 선선함, 습한 공기, 그리고 소음이 이곳을 나중에 더 잊지 못하게 할 것 같았다.
어설픈 팟타이, 그리고 여러 병의 맥주로 배를 채운 우리는 숙소로 돌아왔다. 빗물이 그대로 묻어있는 동그란 테이블 위에 오는 길에 사 온 큰 사이즈의 Singha 맥주병과 이름 모를 태국 과자를 올려놓았다. 우리는 아주 천천히 아주 오랫동안 맥주를 마셨다. 마지막이라는 이유에서였을까. 그날따라 대화가 끊기지 않았다. 그 사람은 대화 도중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그리고 아마 그 사람은 기억 못 하겠지만 술에 많이 취했을 때 잔뜩 꼬인 혀로 그는 내게 말했다.
"슬기야. 그냥.. 그냥.. 그냥 나랑 여기서 살면 안 돼? 나 너 너무 잡고 싶다."
돌이켜 보면 그 사람은 더 이상 내가 붙잡히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여행을 마치고 이틀 뒤 나는 치앙마이를 떠났다. 그 사람은 공항까지 나를 바래다줬다. 애초에 끝을 알고 시작해서였을까. 나는 그를 온전히 사랑하지 못했다. 나의 이별은 생각보다 더욱 덤덤했다. 마음 한구석은 아려왔지만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탑승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에 올라타 출발 전, 마지막으로 그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그러자 그에게 바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대답이 없었다. 그는 울고 있었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울다가 겨우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 우리 집으로 오는데 모든 길거리, 가게 다 너랑 함께 했던 기억밖에 없어.. 지금부터 실감 나.. 네가 없는 게."
그런 그에게 나는 그 어떤 위로의 말도 해줄 수 없었다. 그저 그의 울음소리에 귀 기울여 줄 뿐이었다. 곧 이륙을 한다는 안내 방송에 급하게 그와 마지막 인사를 하고, 창밖을 바라봤다. 자꾸만 그 사람의,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 사람은 나를 정말 사랑했던 걸까. 나는 그 사람에게 어떤 마음이었을까. 나는 그 사람에게 왜 노력을 했던 걸까. 그마저도 또 다른 사랑이었던 걸까.'
답 없는 질문들을 되뇌며 이제는 곧 기억이 되어버릴 이곳을 눈으로, 머리로, 가슴으로 바쁘게 담았다. 비행기는 이륙 준비를 마쳤는지 덜컹덜컹 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치앙마이와, 그 사람과, 그 시절과 멀어져 갔다.
오늘도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저의 기억, 저에게 닿았던 한 장면이 한 편의 글이, 작품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저의 이야기를 찾아주시는 독자분들 덕분입니다.
항상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오늘은 제가 아주 많이 사랑했던 도시, 태국 치앙마이의 몇몇 장면들을 공유하며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