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루라기 그리고 아빠.

철없는 29살 딸의 고백.

by 기록하는 슬기


여행을 시작했던 첫날부터 70일이 지난 지금까지 내 몸에 항상 지니고 다니는 가방 안쪽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물건이 하나 있다.

그것은 전자 호루라기.



늘 가방 안쪽에 품고 다니는 호루라기.




이 여행을 결심하고 떠나기 몇 달 전쯤, 부모님께 앞으로의 내 계획에 대해 말씀드렸다.

엄마 아빠는 이미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라는 듯 그리 놀라지 않으셨고, 오히려 엄마는 어디를 첫 국가로 갈 거냐고 물으셨다.

이런 반응이 일반적인 가정에서는 조금 특이할 수 있으나,

이미 친오빠가 긴 여행과 호주 워킹 홀리데이를 약 1년 8개월 정도 하고 돌아와서 그런지 '그다음은 얘겠지..'라고 예상하셨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우리 부모님도 참 비슷한 남매 낳아서 특이한 경험을 하고 계신다. 덧붙여 엄청난 걱정도.


장기 여행을 간다고 말씀드렸을 때, 부모님께서 너무도 무덤덤하셨기에 나는 이번 여행은 큰 걱정을 안 하시는 줄 알았다.

퇴사 후 출국 전까지 집에서 2개월 정도를 보내던 중 평범한 어느 날이었다.

TV를 보며 소파에 팔자 좋게 늘어져있는 내게 아빠가 물어보셨다.

"여기 학교 주변에 문구점 있잖아, 거기 지금 같이 가볼래?"

그때 나는 왠 뜬금없이 문구점인가 싶어서 "왜? 아빠 뭐 살 꺼있어?"라고 퉁명스레 대답했다.

아빠는 "거기 호루라기 팔겠지?"라고 대답하셨다.

그리고는 내게 여행 갈 때 호루라기 하나라도 챙겨가야 하지 않냐며 사러 가자고 하셨다.

솔직히 그때 나는 너무 귀찮았다. 그리고 '혹시 무슨 일이 생기겠어..' 하는 생각과 '무슨 일이 생긴 들 호루라기가 있다고 크게 달라질까?' 하는 안일한 마음에, "그냥 나중에 내가 나갈 일 있을 때 사 올게~"라고 말했다


며칠 후, 나는 당연히 호루라기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온몸을 소파에 맞긴 채 거실에서 TV를 보는데 아빠가 노트북으로 뭔가를 열심히 검색하는 모습이 보였다. 뭘 그렇게 열심히 찾나 순간 궁금해져서 아빠 어깨너머로 노트북 창을 쳐다보았다.


여러 개 띄어진 인터넷 창에는 '호신용 호루라기', '전자 호루라기', '호신 용품' 이 적혀있었다.




올해 초, 한 겨울에 아버지랑 함께 신륵사.



그 순간 심장을 주먹 한대로 제대로 맞은 것처럼 왼쪽 가슴팍이 욱신거려왔다. 겉으로는 혹여나 내게 부담이 되지 않을까 아빠는 일부러 티를 안 내고 계셨지만 나의 안전을 엄청 걱정하고 있었다. 워낙 가족의 '안전'을 가장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아빠인데, 딸내미 혼자 몇 개월 길어지면 1년을 돌아다닌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많은 밤을 설치며 걱정했는지 노트북 화면 너머로 보이는 수많은 인터넷 창들이 말해주는 듯했다.


그리고 나는 말했다. "아빠 내가 그거 찾아서 오늘 정말로 살게, 너무 걱정하지 마~"라고.

아빠는 됐다고, 이건 아빠가 꼭 사주고 싶다고 하셨다.

그리고 2일 후 바로 우리 집으로 도착한 호신용 전자 호루라기.

신기하게도 usb로 충전이 가능하고 빨간색 버튼을 누르면 엄청 높은 데시벨의 소음에 가까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빠는 그 소리를 들으시더니 만족한 듯싶으셨다. 이렇게 시끄러우면 위험한 상황에서도 조금은 덜 위험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출국 전 엄마 아빠랑 떠났던 여행 중, 순천만.




한 살, 한 살 더 나이를 먹고 머리가 커가면서 예전에 몰랐지만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 있다.

바로 부모님의 인생.

우리 엄마, 아빠도 나처럼 그들의 인생이 있었겠구나, 때론 꿈도 꿨었겠고, 망설이고, 실패하기도 했고, 또 무엇인가를 지켜내려고 노력했겠구나.

내가 돌아본 아빠의 인생은 아마도 반 이상이 가족이 아닐까 싶다. 나에겐 세상 어떤 아빠보다 가장 가정적이고, 아빠에게 언제나 1순위는 가족이다. 이제야 아빠의 인생이, 그 마음이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한 것 같다.

예전에는 아빠의 마음이 '고맙다.' 였다면, 이제는 지금까지 참고 이해해야 했던 아빠의 인생에 '미안하다'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이제는 내가 아빠를, 아빠의 인생을 이해하고 사랑해야겠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다.





아빠, 엄마, 나, (오빠). 행복합시다.





여행이 끝날 때까지 내 작은 가방 속에 호루라기는 늘 그 자리에 있을 것이고, 여행이 끝난 후에도 마음속 깊은 곳에 그 호루라기를 늘 품고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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