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커피가 맛있는 이유

그리고 그때 그 커피가 그리운 이유

by 기록하는 슬기


커피와 관련된 일을 오래 하기도 했고, 그만큼 커피를 좋아하는 내가 요즘도 커피를 마실 때마다 생각나는 곳이 있다. 바로 '호주'다. 2018년 1월, 워킹홀리데이로 호주에 도착하자마자 공장에서 일했던 4개월을 제외하고 7~8개월 동안은 바리스타로 일을 했었기에 그동안 커피는 정말 원 없이 마셨고, 만들었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호주라는 나라 자체가 '커피'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난 나라라서 일반적으로 시드니, 브리즈번, 멜버른과 같은 정말 큰 대도시의 시티가 아닌 이상 스타벅스 같은 프랜차이즈 커피 브랜드는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내가 살았던 서쪽의 대도시 퍼스는 유일하게 스타벅스가 망한 도시라는 닉네임이 붙었을 정도로 커피 부심이 엄청난 곳이다.


그런 호주의 카페에서 일할 때 가장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이 있다. 손님마다 너무 까다로운 주문을 받는 것이었고, 또 그대로 만드는 것이었다. 한국 카페에서는 보통 "아이스 아메리카노 라지 사이즈 두 잔이요."라고 끝나는 주문에 비해 호주에서는 "따뜻한 라테 작은 사이즈로 주시는데, 우유는 아몬드 우유로 바꿔주시고요, 온도는 엄청 뜨겁게 해 주세요. 그리고 위에 거품은 쫀쫀하게 만들어주세요." 이런 식이다. 처음에는 '영어'라는 의사소통 때문에 내가 헷갈리는 줄 알았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영어가 문제가 아니라 한국에서도 이렇게 매번 주문을 받으라고 한다면 머리가 돌아버리는 건 매 한 가지였을 것 같다.


또 어찌나 커피 하나를 주문할 때에도 선택 가능한 옵션은 많은지, 우유 종류만 해도 보통 다섯 가지에다가, 온도는 물론이고, 원두 종류에, 우유 거품에, 그리고 샷의 양까지. (샷을 주문할 때 1샷, 2샷이 아니라 "1샷 주시고요 3/4 샷 더 주세요."식의 주문까지 가능했다.) 그래도 기억력이 좋은 덕분인지 한국 카페 중에서도 미치게 바쁜 서울 빌딩 숲 속 카페에서 몇 년을 버텼기 때문인지 다행히 나는 하루하루 빠르게 이런 호주 카페 시스템에 적응했었다.




내가 퍼스라는 곳을 좋아하고 그리워 할 수 있는 이유 중에 하나는 그때 마셨고 만들었던 커피와 그때 함께 했던 사람들. <2018. 퍼스에서 좋아하던 카페에서>




이러한 커스터마이징 커피 주문은 까다롭고 귀찮다고만 여겼던 내 생각이 확 바뀐 계기가 있다. 바로 내가 다른 카페에 가서 손님이 되었을 때였다. 호주에 살 때에도 쉬는 날이면 어김없이 노트북과 공책을 바리바리 싸 들고 카페에 가서 글을 쓰곤 했었는데 그때마다 똑같은 카페를 갔었다. 사실 그때 나는 그 카페의 바리스타들을 배려한다는 생각으로 '내가 손님으로 가면 까다롭게 안 시켜야지!'라고 마음먹고 매일 똑같이 간단한 주문만 했다. 내가 커피를 만드는 사람이다 보니 까다로운 주문이 손과 머리를 한 번씩 더 바쁘게 만드는 일인지 잘 알기에 갈 때마다 그저 "카푸치노 레귤러 사이즈 주세요~"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쉬는 날에 나는 같은 카페를 갔고 어김없이 "카푸치노 레귤러 사이즈 한 잔 주세요~"라고 했다. 그러자 나를 알아본 카페 직원이 반갑게 안부 인사를 하고는 내게 이렇게 물어봤다.

"항상 카푸치노만 드시던데, 온도나 우유 폼 텍스처나 다 괜찮아요? 필요한 거 있으면 말씀해주셔도 돼요."

규모도 꽤 큰 카페였고, 내가 갔던 시간에 항상 적지 않게 바빠 보였기에 이렇게 내게 먼저 친절하게 다른 옵션이 필요하지 않냐고 물어봐 주는 그 바리스타 분의 질문과 태도는 내 예상 밖이었다.

얼떨결에 나는 "어? 음.. 그러면 많이 뜨겁게 해 주시고요, 폼은 조금 더 두껍게 내주세요. 위에 초코 파우더도 넉넉히 뿌려주시고요.. ^^"라고 대답을 해버렸다.



덕분에 예전에 몰랐던 내 입맛에 딱 맞는 취향의 커피를 알게 됐다. 그리고 나에 대해서도. <2018. 휴무날이면 매일 같이 출근하던 돔 카페에서 일단 첫 잔으로 마셨던 카푸치노>



그렇게 해서 나온 내 입맛에 꼭 맞춘 카푸치노를 받고 첫 입을 딱 마셨는데, 뭐랄까. 왜 그동안 그 많은 손님들이 이렇게 주문을 하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커피든 어떤 음식이든 처음 먹는 딱 그 한 입의 맛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지 않나. 시간이 지나면 음료든 음식이든 식기 마련이고 그에 따라 맛도, 향도 조금씩 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내 취향에 맞게 만들어진 커피를 첫 입에 딱 마시니까 정말 '나'만을 위해 만든 커피를 받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역으로 생각해서 커피를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보면 커스터마이징 커피는 '한 사람'의 커피를 만드는 기분이었다. 대부분 한국 카페에서 일할 때 나 스스로를 돌아보면 '커피를 만드는 기계' 같았다. 정해진 레시피대로 뚝딱하고, 엄청 빠른 속도로 커피를 찍어내는 사람이랄까. 그런데 생각해보니 내가 호주에서 일하는 카페만 해도 매일 오는 단골손님들의 얼굴만 보더라도 내 머릿속에 '저 손님은 따뜻한 플렛 화이트, 저지방 우유, 라지 사이즈, 텀블러'라고 떠오르듯이 마시는 사람의 얼굴과 취향, 심지어 목소리와 말투까지 기억을 하면서 커피를 만들었었다.


그전에는 무턱대고 호주 사람들이 커피, 음식을 주문할 때 이것저것 바꾸는 걸 까다롭다고만 생각했었다. 내가 '원래' 맞다고 생각했던 방식과는 다르니까. 그리고 실제로 조금 더 손이 많이 가는 것은 맞으니까. 그런데 이런 문화에서 약 1년 정도 살아보니 문화의 다양성 그 이전에 '나' 스스로에 대해 돌아보게 됐다. 그동안 새로운 것이나 낯선 것에 별로 색안경을 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나도 모르게 '우리는 이렇게 안 하는데, 쟤네는 저렇게 하지?'라고 생각하면서 조금이라도 실질적으로 내게 불편함을 느끼게 한다면 그건 바로 '원래 익숙하던 것'보다는 '별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내가 그렇게 커피를 만드는 일, 그런 사업을 하고 싶어 했었으면서 내가 바리스타들을 배려한답시고 간단하게 주문한다는 것 자체가 참 프로답지 못한 생각이었다. 먼저 내게 어떤 다른 옵션이 필요하지 않냐고 물어봐 준 그 바리스타가 어쩌면 정말 프로다운 행동을 보여줬던 것이다.


호주에서는 바리스타라는 직업을 꽤 전문적인 직업으로 여기기 때문에 다른 서비스 직종에 비해 받는 임금도 꽤 높은 편이다. 대신 아무리 작은 동네의 카페든지 시티의 큰 카페든지 바리스타로서 직업을 갖는 과정 또한 어렵고 복잡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모든 게 다 타당한 이유가 있던 것이었다. 호주라는 곳이 왜 커피에 대한 자부심이 높은 지도, 바리스타가 돈을 잘 벌 수 있는지도, 왜 손님들은 자신의 취향에 맞게 조금은 어렵게 주문을 하는지도, 그리고 왜 호주 커피가 맛있을 수밖에 없는지도. 모두 다 맞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한국에 돌아와서 '호주'라는 장소, 그 시간이 문득문득 떠오를 때는 많았지만 가장 그리울 때는 따로 있었다. 바로 카페를 갈 때마다, 유독 맛있고 따뜻한 커피가 마시고 싶은 날이면 꼭 생각이 난다. 특히 오늘 같이 비가 오는 날이면 주문서에는 Cathy's Cap (제 영어 이름이 Cathy, 'Cap'은 호주 사람들은 종종 카푸치노를 줄여서 '캡'이라고 쓰고, 말해요.)라고 쓰여있던, 따끈따끈을 넘어서서 뜨거운 머그잔에 무거운 우유 거품이 봉긋하게 올라가 있던, 초코 파우더가 듬뿍 뿌려져 있던, 그 온기와 향기, 그 맛이 사무치도록 그립다.


그리고 호주에서 느꼈던 '커피'와 같던 그 일상 또한 함께 그리워진다. 많이 썼지만 동시에 향긋했던, 자유로웠지만 동시에 외로웠던, 고된 노동이 끝없이 이어졌지만 그럼에도 매 순간순간 만족하며 몰입하며 살 수 있던 그때 그 시절과 그 안에 내가 그리워진다.


가끔 이런 날이 있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순간 또한 충분히 좋지만 이따금씩 어떤 날씨, 어떤 냄새, 어떤 음식, 어떤 글귀, 어떤 음악이 가져다주는 과거의 한순간, 한 장면이 있다.

당장 돌아갈 수 있다고 해도 돌아갈 것도 아니지만 가끔 떠오르면 '그립다'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그런 시절, 순간들.


오늘은 내게는 그런 날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리는 빗줄기를 보면서 호주에서 후드득 떨어지는 비를 피해 들어갔던 어느 카페에서 따뜻하게 마셨던 커피 한 잔이 생각나는, 그때의 그 일상, 그 안에 내가 보고 싶은, 그런 날, 그런 밤인가 보다.






퇴근길인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은 출근길. 새벽 5시에 눈 떠서 새벽 6시부터 커피 만들던 나날들.








출퇴근길 늘 나와 함께 했던 비. 지겹고 지겹던 우기의 퍼스. 덕분에 아침부터 비가 내리는 날이면 유독 퍼스가 생각난다.






가끔 하늘 위에 선명히 그려진 무지개를 만날 때면 유치하지만 그때의 나에게 주는 메시지 같았다. '고되고 외로운 내 일상 속에도 이제 비는 멈추고 무지개가 뜰 거야'라는.








현재 하고 있는 일과 새로운 프로젝트를 준비하면서 새 글 업로드가 늦어졌습니다.

늦었지만 잊지 않고 저의 이야기와 저를 기다려주시고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조금 더 부지런히 움직이고, 배우고, 듣고, 보고, 읽고, 쓰고, 나누겠습니다.


항상 고맙고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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