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로망을 깨뜨린 한 사람

나만의 자유와 방랑, 여행을 여전히 꿈꾸는 한 사람의 이야기

by 기록하는 슬기

2017년 장기 여행을 떠나기 전에 나는 '여행자', '방랑자'의 삶에 대해 막연한 로망을 가지고 있었다.

여행자나 방랑자를 떠올리면, '사회적 알람에 맞춰 살아가기보다 자신이 원하는 속도와 방향에 맞춰 살아가는 사람, 외로울지라도 그 이상으로 자유로운 사람, 당장 가진 것은 없지만 그럼에도 마음속만큼은 현실 속에서 허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보다는 꽉 차있는 사람, 누군가의 삶을 대신 살기보다 자신의 삶을 사는 사람'이 그려졌다. 그래서 한때 나도 그런 삶을 꿈꿨었다.


하지만 어떤 꿈이든 그 꿈을 이룬 후 그 꿈이 삶이 되었을 때, 그 꿈이 정말 내게 맞는 꿈이었는지 아니었는지 알게 된다고 한다. 나도 1년 7개월 동안 방랑자의 삶을 실제로 살아보면서, 특히 이미 방랑자의 삶을 오랜 세월 살아온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 꿈은 내 꿈이 아니라는 것을 머리로 피부로 알게 됐다.


2017년 6월, 태국 방콕의 한 한인 호스텔에서 우연히 만났던 M 언니는 1년 7개월간의 장기 여행, 아니 20대 이후로 만나온 많은 사람들 중에 내 가치관을 바꿔버린 신선하고도 큰 충격을 준 한 사람이다. 여자 도미토리 룸에서 처음 마주쳤던 언니와의 첫 만남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방문을 열고 나타난 언니는 정리가 되지 않은 부스스한 머리 스타일에, 목이 깊게 파인 늘어난 흰색 민소매 티셔츠에 빛바랜 붉은색 냉장고 바지를 입고 있었고, 얼굴과 팔뚝의 피부는 불그스레하게 타 있었고, 등에 낡고 큰 배낭을 메고 있었다. 딱 봐도 오랜 시간 동안 길 위에 있던 사람 같았다.


보통 이렇게 한인 호스텔에서 만나면 간단하게 통성명을 하는데, 언니는 내가 여행에서 만난 사람 중 처음으로 실명을 밝히지 않은 사람이다. 언니는 자신의 닉네임인 두 글자를 알려줬다. 조금 특이하긴 했지만 밝고 친화력 좋아 보이는 언니의 성격 덕분에 별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첫인상처럼 언니의 친화력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언니는 그날 같은 호스텔에서 머무는 모든 사람들과 빠르게 친해졌고 저녁에는 언니의 주도 아래 다 함께 모여 요리를 하고 식사를 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언니에 대해, 언니의 그동안의 스토리에 대해 듣게 되었다. 언니의 나이는 마흔 살이고, 서른 살 이후로 틈만 나면 이렇게 동남아 여행을 길게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3년 동안 운영해오던 호프집을 정리하고 떠나온 여행이라고 말했다. 현재 결혼은 하지 않았고, 연애도 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저 자신은 이렇게 훌쩍 떠날 수 있는 지금의 자유로운 삶이 너무 만족스럽다고 했다.




P20170708_110258970_A5192106-45E8-49FE-802C-A57D316E2CEC.JPG 해보지 않으면 몰랐던 상상 속 '자유'로운 삶 <사진 : 태국, 치앙다오>



여행을 시작하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그 당시, 나는 언니의 그 이야기를 듣고 잠시 가슴이 설렜었다. 내가 꿈꿔오던 방랑자의 삶과 닮아있는 언니의 삶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자유로운 언니의 모습은 내게 '비혼'에 대해 조금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해 줬다. 만약 결혼을 했다면, 가정이 있다면 언니는 지금 이렇게 살지 못했을 테니까.


저녁 식사 자리는 생각보다 길어졌다.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은 M 언니와 나, 내 또래였던 남자 두 분이었다. 술을 좋아한다는 언니는 이미 많이 취한 듯 보였다. 언니는 취기가 올라오자 내 또래 남자분들에게 듣기 불편한 조언을 계속해서 하기 시작했다. 중간에서 뻘쭘하게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 다행히 숙소 사장님께서 잠시 나오셨다. 사장님은 이제 많이 늦었으니 자리를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상을 치우려고 하자 언니는 반쯤 풀린 눈으로 "사장님, 우리 그냥 좀 더 놀게요!"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술을 한 방울도 드시지 않는 사장님은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이 태연하게 언니에게 말했다.

"아, 그러면 지금이 1시니까 딱 30분만 더 이야기하시고 정리해주세요~"


기분이 좋아진 언니는 잔에 남은 맥주를 깨끗하게 비우고 화장실에 다녀온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10분, 20분이 지나도 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혹시 방에 들어가서 침대에서 자고 있나 싶어서 방에 가봤는데 언니는 없었다. 걱정되는 마음에 남자 두 분과 함께 언니를 찾기 위해 호스텔을 샅샅이 살폈다. 그때 남자 한 분이 "어? 누나 여기 있어요! 거실로 내려오세요!"라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아까 거실에 언니가 없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곧장 내려갔다. 언니는 거실에 있던 큰 소파 위가 아닌 소파와 벽 사이, 그 틈에 낀 채로 잠이 들어있었다.


그 모습을 처음에 딱 보고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떠오른 세 글자가 있다.

'추하다.'


조금 전에 언니의 당당하고 멋진 모습을 봐서 그런지 지금 거실 구석에서 취해서 잠든 언니의 모습은 정말 별로였다. 언니와 함께 같은 방콕의 호스텔에서 지낸 건 총 3일이었고, 그 후에 우연히 태국의 다른 도시에 있는 호스텔에서 언니를 다시 만나 4일간 같은 도미토리 룸을 썼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방콕에서 첫날 언니가 소파와 벽 사이에 잠이 들었던 건 가장 추하지 않았던 모습이었다. 언니의 좋지 않은 술버릇은 함께 지내던 게스트들을 늘 불편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다른 도시에서 만났을 때 언니는 당시 호스텔 사장님과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며 싸우기까지 했다.


그때 여자 게스트가 나랑 언니뿐이라 도미토리 룸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언니와 이야기를 많이 나눴었다. 술에 취하지 않은 언니의 모습과 술에 취한 언니의 모습을 긴 시간 보면서 내가 느낀 건 '추하다.'가 아니었다. 내가 보기에 언니는 위태로워 보였다. 그리고 외로워 보였다. 언니는 '자유'를 위해 자발적으로 '선택한 외로움'을 지니고 있다기보다 '자유'를 책임지지 못하는, '감당할 수 없는 외로움'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모든 여행자, 모든 방랑자가 이러한 외로움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실제로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중 정말 멋지게 자신의 삶을 책임지면서 길 위에 삶을 누리는 사람도 만났었다.


하지만 많은 방랑자에게 느낄 수 있던 외로움은 M 언니가 지닌 외로움과 닮아 있었다. 내가 만난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스스로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했다. 자신들은 책임질 배우자가, 가족이 없기에 자신만의 삶을 온전히 살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들이 말하는 자유에는 '책임'이 없었다. 그리고 책임질 가족이 없는 그들의 삶 속에는 그 자신들 또한 없었다. 내가 보기에는 그들의 마음속과 삶 속 어딘가가 텅 비어 보였다.


실제로 만난 그들의 삶은 내가 상상했던 방랑자의 삶과 너무도 달랐다. 나는 덜컥 겁이 났다. 10년 후, 내가 만약 M 언니와 닮은 외로움을 지닌 채 위태롭게 살아갈 날들을 떠올리니 끔찍했다. 무서웠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봤다. 내가 생각했던 '자유'에 대해. 내가 '꿈꿨던 삶'에 대해.


여행을 떠나기 전에 나는 그게 무엇이라도 현실 속에서 많이 가지지 않아도 되는 마음,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버릴 수 있는 마음, 이러한 마음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사람만이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자유로운 삶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멋있어 보였다.


하지만 여행을 떠난 후에, 여행이 모두 끝나고 제자리로 돌아온 후에 나는 깨달았다.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자유로운 삶이란 어떤 대단한 것을 포기하고, 버려야 하는 삶이 아니라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내 자리를 지키면서 책임을 다 하며 사는 삶, 현실 속에서 자신의 능력으로 가질 수 있는 것들을 가지고,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 하며 사는 삶이라는 것을.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고, 그것이 바로 내가 꿈꿨던 삶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4년 전,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났던 그 시간들이 내게는 더욱 소중하다. 아마 해보지 않았으면 몰랐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어딘가 떠나 있는 사람들의 사진과 글, 영상을 보며 마음속 깊이 질투와 동경을 동시에 하고 있었을 것이다. 내게 맞는 옷이 무엇인지 모른 채 당장 떠나지 못하는 이 상황과 나를 보며 아쉬워만 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떤 삶이 더 대단하고, 더 낫다고 감히 말할 수 없다. 사실 M 언니와 같은 방랑자의 삶을 사는 사람들도 그들 스스로 그들의 삶에 만족한다면 아무런 문제는 없다. (대신 자신의 삶으로 인해 다른 사람의 삶에 피해를 주면 안 된다.)


그저 삶이란 나한데 어울리는 옷을 찾는 과정이 아닐까.

나한테 어떤 옷이 어울리는지 알기 위해서는 입어보는 방법밖에 없듯이 겉 보기에 멋있어 보이는 삶이라면 일단 해보는 수밖에 없다.

내가 꿈꾸던 여행자로 사는 삶의 로망은 깨졌지만 그럼에도 참 다행이다. 나란 사람에게 조금 더 어울리는 옷을 찾은 것 같아서.


내게 맞는 옷은 정처 없이, 기약 없이 '홀로' 떠도는 삶이 아니라 돌아올 곳과 돌아오는 날이 있는, 그리고 내 옆에 누군가와 '함께'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삶이었다.







오늘도 제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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