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연말병을 실컷 앓아야 하는 이유
나는 매년 11월 말부터 12월 말까지, 일명 '연말병'이라고 불리는 병을 앓는다. 매년 겪는 연말병의 과정은 이러하다. 처음에는 '아.. 벌써 이렇게 한 해가 가는구나..'라는 한 줄로 한 달 정도 남은 올 해를 인식한다. 그리고는 연초로 쭉 거슬러 올라가 본다. 그다음에는 연초에 내가 하려고 했던 일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얼마나 그 목표들을 달성했는지, 어떤 것을 못(안)했는지, 떠올려보며 다이어리에 생각나는 대로 적어본다.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나면 보통 꽉 찬 만족감보다는 뭔가 모를 헛헛함에 깊은 한 숨이 나올 때가 많다. 이때부터 제대로 된 연말병은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연말병이 시작됨과 동시에 깊은 한 숨이 나오는 이유는 때에 따라 다르다. 어느 때에는 그저 시간이 너무 빠르다는 생각에 한 숨이 나오기도 하고, 어느 때에는 일 년이라는 시간보다 나의 나이와 현실을 떠올리며 한 숨 짓기도 하고, 또 어느 때에는 패기 가득했던 1월의 내 모습과 너무도 달라진 12월의 내 모습을 보고 한 숨을 푹 쉬기도 한다.
어김없이 이번 연도에도 연말병은 찾아왔다. 먼저 2021년 한 해는 내게 정말 특별했다. 처음으로 '제주'라는 곳을 여행이 아닌 '삶, 일상'이라는 배경으로 살았던 일 년이었다. 또한 '글쓰기'만으로 먹고살아보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온몸으로 부딪혀낸 일 년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이번 연도 연말에는 유독 많은 생각들과 감정들이 내 머릿속과 가슴속을 매웠다. 그러고는 늘 그랬듯 나는 2021년에 내가 '한 것 리스트'와 '못(안) 한 것 리스트'를 생각나는 대로 쭉쭉 적기 시작했다.
날씨가 쌀쌀해지기 시작했던 11월부터 몸과 마음에 힘이 빠져서 그런 걸까. 나는 사실 이번 연도에 내가 목표했던 것들을 많이 못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난 1월부터 12월까지 내가 해온 것들을 적어보니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해냈고, 해오고 있었다. 잠시 다이어리에 적은 '한 것 리스트'를 옮겨보겠다.
★한 것★
-제주살이 1년
-글쓰기로 내 생계 책임지기
-슬기 드림 메일 구독 서비스 연재(휴재 없이 1월부터 8월까지)
-크몽에서 글쓰기 전문가로 활동
-글쓰기 클래스 오픈 (+ 수강생분들과 장기간 클래스 진행 중)
-운동 루틴 유지
-유튜브 시작('시작'만 했다. 꾸준히 이어오고 있지는 않다.)
이렇게 보니 1년 전 내가 다짐했던 것 중 가장 굵직굵직한 목표들은 대부분 해낸 것 같았다. 내게 있어서 핵심적인 목표는 '내가 좋아하는 곳에서 내가 좋아하는 일로 살아남기'였다. 다른 건 몰라도 '2021년 12월 30일의 나는 내가 좋아하는 제주에서 내가 좋아하는 글쓰기를 하며 어찌 됐든 살고 있다.' 이렇게만 보면 헛헛함이 묻어나는 한 숨보다는 뿌듯함이 흘러넘치는 미소가 나와야 더욱 어울리지 않나 싶을 수도 있다. 이 타이밍에서 바로 옆에 적어둔 '못(안) 한 것 리스트'를 옮겨보겠다.
★못(안) 한 것★
-출판
-기본적인 생계(월세+최소한의 생활비)를 안정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파이프라인 구축
-아침 일찍 규칙적으로 일어나는 습관
-영어 공부 습관
-혼자 여행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중에 '못'한 것은 없다. 그저 내가 '안'한 것이다. 남는 시간들을 조금만 더 활용을 잘했다면, 조금 더 적극적으로 움직였다면 이 리스트에 있는 목록 중에 반 이상은 바로 위에 '한 것 리스트'에 적혀 있었을 것이다. 결과를 떠나서 시도 자체는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았던 일들을 떠올리니 아쉬움이 짙어졌다. 그래서 한 숨이 나도 모르게 새어 나왔던 것 같다.
올 해도 연말병은 한 달 가까이 나에게 잦은 한 숨을 선물해줬다. 그런데 이 연말병은 꼭 올 해의 끝, 12월 31일에 가까워질수록 그 병세가 약해진다. 아니, 한 달 동안 엉켜있던 나의 머릿속과 가슴속이 서서히 정리가 된다는 표현이 맞겠다.
2021년 1월부터 12월까지, 지난날의 나를 떠올려본다. 30년 조금 넘게 살았지만 그중에는 처음 만나는 내 모습도 있었고, 또 익숙한 내 모습도 있었다. 2021년 동안 마주한 수많은 장면 중에 가장 선명하게 남는 내 모습이 있다. 바로 '참 애쓰는 내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2021년에는 내가 '첫 번째'로 도전하는 일이 많았다. 저기 위에 적은 '한 것 리스트'만 보더라도 그중 다섯 개가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시도해보는 일이었다. 물론 구체적인 결과에 대해서는 아쉬움, 후회, 미련과 같은 감정들을 느끼며 슬퍼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처음 하는 일답게' 했을 뿐이었다. 망설이고 주저했고, 그렇지만 결국은 시도했고, 실망하기도 하고, 쉬었다가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했다.'
2021년을 하루 남긴 오늘에서야, 앞으로 오랫동안 떠올리고 기억해야 할 2021년의 내 모습이 또렷하게 보인다.
조금은 오래 걸릴지라도,
내 속도 맞춰서 나 답게 하나, 하나 해 나가는 내 모습.
가끔은 나의 선택을, 나를 의심할지라도,
항상 그래 왔듯 결국에는 나의 선택과 나를 믿고 책임지는 내 모습.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특별하고 소중한 나만의 여정이라 여기고 즐기는 내 모습.
마지막으로,
2021년의 나에게,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처음 살아보는 2021년, 그 안에서도 처음 해보는 일들을 겪고 해내느라 애썼어.
정말 잘했고, 잘 살았어.
그리고 지금도 넌 이미 충분해."
저는 매년 연말병을 이렇게 실컷 앓고 나야 다음 연도를 맞이할 준비가 되는 것 같아요.
음.. 살았던 한 해를 잘 보내줘야 다가오는 새 해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달까요.
우리 모두 잊어야 할 내 모습을 자꾸 꺼내기보다는,
잊지 말아야 할 내 모습을 자주 꺼내고, 기억해주고, 칭찬해줬으면 좋겠어요.
처음 사는 2021년,
그리고 처음 겪는 이 모든 일들을 책임지고, 해 내느라, 살아내느라 모두 모두 애쓰셨어요.
2022년에도 항상 여러분의 일상과 삶을 응원합니다.
고맙습니다.
-기록하는 슬기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