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수능을 본 분들께, 그리고 여전히 수능날 마음이 아픈 분들께
며칠 전, 도서관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주차를 마치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제법 차가워진 바람이 얼굴 정면과 온몸 옷가지 사이사이로 파고들었다. 몸이 워낙 차가운 내가 가장 좋아하지 않는 계절 겨울이 다가오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바쁘게 걸음을 옮기는데 문득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 바람.. 왠지... 수능 즈음 불어오는 바람 같은데.. 이제 곧 수능인가?'
확인해보니 이틀 뒤 정말 수능이라고 한다. 그러면 그렇지. 내 인생에서 '수능'이라는 짧고 무거운 이 두 글자를 어찌 내 온몸의 세포들이 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수능 본 지 10년이 지난 지금의 내가 '수능'을 느끼는 건 추워진 날씨보다 도서관 개관 시간이다. 수능 당일은 1시간 늦게 개관을 한다고 붙여놨었다. 사실 어제까지만 해도 여기저기 수능에 관한 기사, 수험생들에게 쓰는 글들, 심지어 유튜브에도 올라오는 수능 관련 영상들이 눈 앞에 시도 때도 없이 보일 때는 무덤덤했다. 아무렇지 않은 줄 알았다. 수능 본 지 10년이나 지났는데.. 이제는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니까.
오늘(수능 당일) 도서관으로 가는 길, 차 안에서 매일 듣는 라디오를 틀었는데 그 프로그램의 첫 곡으로 러브홀릭스의 'Butterfly'라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누가 들어도 이건 수험생들을 응원하기 위한 노래였다. 평소에도 딱히 즐겨 듣는 노래는 아니었지만 그 순간 10년 전에 수능을 보던 내가 떠올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두 번째 수능을 보던 그날, 2교시가 끝난 후 엄마가 싸준 보온 도시락을 책상 위에 올려 혼자 밥을 먹었던 그 장면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때 나는 재수생이어서 고사장에는 아는 친구가 없었다. (사실 아는 후배들이 몇 명 있었지만 모른 채 했다.) 머릿속으로 '체하면 안 되니까 조금만 천천히 먹자..'라는 생각을 하면서 겨우 한 숟갈, 한 숟갈 입으로 떠 넣었다. 그런데 자꾸 지난 1교시와 2교시 때 봤던 시험이 떠올라 입맛은 더 없어졌다. 그때부터 난 느꼈다.
'아.. 이번 시험도 힘들 것 같다..'
라디오에서 나오던 노래는 2절이 시작됐고, 그 순간 옆에 운전을 하고 계시는 아빠를 보니 또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 좀 전에 떠올렸던 장면과 같은 날이었다. 시험을 다 마치고 이미 어두컴컴해진 고사장 밖을 나와 나를 기다고 있는 아빠 차에 올라탔다. 차에 타고 있던 아빠 엄마는 "수고했어! 힘들었지?"라고 내게 물었다. 나는 그때 입 밖으로는 "응.. 아 지친다.."라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엄마 아빠한테 너무 미안하다..'라는 생각뿐이 없었다. 차 뒷좌석에 앉아 어두워진 창밖을 바라보며 그 순간 수많은 생각을 했었다. '이번 시험도 망한 것 같은데.. 어쩌지?', '집에 가서 가채점을 해볼까? 아니야 차라리 성적표 받을 때까지는 아무 생각하지 말자!', '근데 망한 거면 엄마 아빠 얼굴은 어떻게 보지..', '그럼 나 어떤 학교 가지.. 아.. 지방으로는 죽어도 가기 싫은데..'.
내가 기어코 우기고 우겨서 한 재수였다. 내가 내 실력을 객관적으로 알고 있었다면 재수를 할 일도 없었고, 오히려 그렇게 바라던 인 서울은 현역 때 가능했었다. 자신의 실력을 과대 평과 하면서 노력은 제대로 하지 않았던 이 재수생은 죽어도 가기 싫다던, 쳐다도 보지 않았던 한 학교로 입학하게 되는 결말을 맞게 된다.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있는데 이제 그만 수능 생각을 하라는 듯 라디오에서는 DJ의 말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3분여 되는 시간 동안 너무 깊게 그 기억에 빠져있어서 그런지 내 기분은 조금 울적해져 있었다. 단순히 나의 수능 실패 기억 때문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에 수능을 보고 있을 아이들이 떠올랐다. 그들 중 분명 나 같은 아이도 있겠고, 그보다 더 상처를 받는 아니도 있겠고, 혹은 반대로 만족하거나 덤덤히 받아들이는 아이도 있겠지. 그런데 만약 나와 같거나 비슷하다면 그 아이가 앞으로 극복해야 할 마음의 상처가 어렴풋이 상상이 가서 더욱 마음이 아팠다.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가끔 그런 이야기를 한다. "아.. 벌써 나이가 이렇게 됐네. 20살 때로 돌아가고 싶다.." 그러면 앞에 앉은 또 다른 사람이 "맞아.. 그땐 좋았는데.. 못해도 25살이라도 돌아가도 좋을 것 같아."라고. 난 이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 말은 즉슨 이 이야기에 동의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주 만약에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 해도 나는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아니,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나의 지난 20대는 '학력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발버둥 쳤던 치열하고도 처절한 시간들이었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내게 '대학교'라는 것이 중요한지 그 근본적인 이유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작은 도시에서 늘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던 탓이었는지, 혹은 엄마의 직업 때문이었는지, 어렸을 때부터 언론과 학교에서 주입식으로 받은 '학력 만능주의' 때문이었는지. 그냥 그때 내게 '대학교'는 엄청 중요했다. 좋은 대학교에 못 가는 사람은 다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고등학생 때는 거들떠도 보지 않던 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부터는 '내가 별 볼일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공부했다. 내가 무시했던 이 학교에서 1등을 하지 않으면 꼭 진짜 내가 이 학교에 있을만한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4년 내내 그런 마음으로 나는 목표 없이 '오기'로 공부했다.
대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나는 여전히 나의 학력을 뛰어넘을만한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였는지 모른다. 팔이랑 어깨, 무릎, 발목이 나갈 정도로 힘에 붙이는 고된 일도 기어코 견뎠다. 물론 조금 편하게 사무직이나 다른 일을 지원할 수 있었지만 이왕 시작한 일이라 '포기'를 하기 싫었다. '포기'를 하면 또 재수를 망할 때 그때처럼 나는 뼈저리게 후회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후로 여자 혼자 가기 어렵다는 나라 위주로 세계 여행을 간 것도, 그리고 20대 후반 이제는 한국에 돌아와 자리 잡으라는 말에 더욱 단호히 결정했던 호주 워홀도,
어쩌면 이 모든 내 행동은 '학력 콤플렉스'를 어떻게든 극복해내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사실 지금도 나는 내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20대 초반의 나'보다 '30대 초반의 나'를 비교하면 지금이 훨씬 좋다. 조금씩 마음에 드는 나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게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까지 오는데 지난 10년 특히 졸업하고 5년 정도는 심적으로, 정신적으로, 더불어 육체적으로도 많이 힘들었다. 이 모든 게 '학력 콤플렉스'에서 온 거라고 본다면 얼마나 '콤플렉스'라는 게 무서운지 새삼 느껴진다. 아직도 나는 '학력 콤플렉스'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그 과정에 있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 있다.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나의 시야는 그 전보다 더 깊어졌고 넓어졌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세상을 보는 시야와, 삶을 대하는 나의 시각이 달라졌다. 그러면서 진정한 '나의 삶'을 찾게 만든 그 계기가 되었다고 할까. 단순히 '학력'을 극복하기 위해 시작했던 이런저런 나의 도전들이 내게 가져다준 건 예상보다 더 많은 것을 느끼고 겪게 해 줬다.
내게 학력 콤플렉스는 스스로를 초라하게 만들었던, 괴롭혔던 원인이기도 했지만 결국 나를 더욱 멋진 사람으로, 그리고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들었던 '원동력'이었다.
마지막으로 오늘 수능을 마친 누군가에게, 그리고 10년 전의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나는 '꼭 원하는 대학교에 가길 바랄게!'라는 무책임한 응원은 하지 않을게. 성적이 잘 나와서 원하는 학교에 가면 정말 좋겠지만 아마 조금씩 현실에 순응해야 할 순간이 올 거야. 내가 생각하지 않았던 학교에 어쩔 수 없이 원서를 쓰거나, 그마저도 혹시나 떨어질 수도 있어. 그런데 정말 중요한 건 '대학교'는 끝이 아니라는 거야. 인생이라는 긴 과정 속에 하나의 과정일 뿐이야. 단지 그 과정이 조금은 큰 존재감을 갖기는 하지만 결국 전부가 되진 않아. 대학은 단지 대학이야. 한 개인과 대학은 같지 않아. 명문 대학교에 갔다고 다 좋은 사람, 다 멋진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듯, 마음에 들지 않는 대학에 갔다고 너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아니야. 어느 조직에 속하든 너 자신의 존재를 지켰으면 좋겠어. '네가 원했던 대학'에 가면 좋겠지만, 그보다 나는 '네가 너를 스스로 좋아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길 바랄게. 그렇게 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온 마음을 다 해 진심으로 응원할게. 오늘 너무 수고했어."
지금까지 저의 이야기를 들여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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