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와 '선배'의 차이에 대하여
2년 전 세계여행 중 인도 우다이푸르라는 도시에서였다. 전 날 조드푸르에서 버스를 타고 하룻밤을 꼬박 내리 달려 우다이푸르에 새벽 일찍 도착했다. 미리 어플을 통해 예약해 둔 호스텔로 갔더니 너무 이른 시간이라며 거실(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방청소가 끝나는 대로 입실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당시 조드푸르에서 우연히 친해져 함께 여행 중이던 콜롬비아 친구와 나는 피곤함에 못 이겨 숙소 거실 소파에 앉아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었다.
1시간 정도 지났을까. 투숙객들이 하나 둘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어디선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한국말에 본능적으로 나는 눈이 떠졌다. 비몽사몽 한 상태에서도 멀리서 들리는 한국말, 그리고 바로 알아볼 수 있는 한국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 한국 여자분은 친구에게 자신은 준비가 다 됐으니까 거실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하고는 내 소파 옆 자리에 앉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분께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드렸다. (인도 여행 중 한국인이 많은 도시를 빼고 우연히 한국 여행자를 만나면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곤 했다.) 그분도 이미 나의 존재를 눈치채고 계셨는지 "어? 안녕하세요~ 오늘 오신 거예요?"라며 내게 인사를 해주셨다.
내 또래로 보이는 그 여행자분께 나는 오늘 우다이푸르에 막 도착해서 정보가 없다며 이 도시 내의 교통수단에 대해 물어봤다. 그분은 며칠 동안 이 도시를 지내면서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내게 여러 가지 정보를 자세히 알려주셨다. 그리고 그분은 내게 이렇게 물어봤다.
"아.. 근데 인도 여행 얼마나 하셨어요?"
사실 이 질문은 긴 여행 중 정말 익숙하게 들었던 질문이다. 그리고 특히 '인도'에서는 더욱. 워낙 위험하고 여행하기 힘든 여행지로 알려진 만큼 '인도 여행의 노하우' 혹은 '주의해야 할 점'을 서로 주고받고 싶은 마음에서 그 질문을 자주 하는 듯했다.
"저 인도는 이번이 처음인데, 먼저 북인도 여행하고 라자스탄 지방으로 왔어요. 인도에 들어온지는 한 달 정도 되어가요~"라고 내가 대답하자 그 여행자분은 "아 생각보다 인도 들어온지는 좀 되셨네요."라고 하며 바로 질문을 이어나갔다.
"그러면 북인도는 언제쯤 가셨어요? 저도 직전에 다녀왔는데~"
"아 정말요? 저희 잘하면 레(Leh, 북인도 라다크 지방의 큰 도시)에서 마주쳤을 수도 있었겠어요! 저는 8월 말부터 9월 초까지 있었어요."
"아 저는 9월 초에 갔어요.. 그러면 판공초 가셨을 때 어느 마을에서 숙소 잡으셨어요?"
나는 단순히 나와 그녀가 다녀왔던 곳 중 겹치는 곳이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보는 줄 알았다. 나는 숙소 이름은 기억이 안 나지만 마을 이름(A)과 주변에 생각나는 것을 설명했고 그녀는 대뜸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아 근데 왜 A마을에서 지내셨어요? 그 마을 말고 B마을이 훨씬 더 좋은데!"
"아 당시에 B마을에는 숙소가 몇 개 없고 비싸다고 해서요. 저희 일행은 거의 장기 여행자나 학생이라 숙소 비용도 부담스럽더라고요.."
나의 대답에 이어 그녀는 "얼마 주셨는데요?"라고 묻더니 10분 넘게 자신이 묵었던 마을과 내가 묵었던 마을을 요목조목 비교했다. 그리고 그녀는 홀로 결론을 이렇게 내렸다.
"A마을 보다 B마을이 훨씬 좋아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 당시에 내 기분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아니 불쾌했다. 앞으로 갈 곳에 대해 추천해주는 것도 아니었고, 다짜고짜 '너는 틀렸어. 거기 말고 다른 곳을 갔어야 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북인도 여행에 무척이나 만족했고 또 그 어떤 여행지보다 특별하고 소중한 추억을 만들었기에 누군가가 나의 경험과 기억을 함부로 말하는 게 상당히 거슬렸다. 물론 내 성격 상 상대방에게 대놓고 기분 나쁜 티를 내지 않았지만 그녀의 친구가 얼른 준비를 마치고 빨리 이 대화가 자연스레 마무리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북인도 여행 이야기 이후로도 그녀는 자신이 나보다 미리 갔던 인도의 다른 도시에서 겪은 경험담을 말하며 '뭐는 절대 하지 말아라.', '잠은 어디서 자라.' 등등 물어보지 않은 질문에 대한 답들을 늘어놓았다. 그녀와의 대화가 지쳐갈 때쯤 다행히 그녀의 친구가 거실로 나왔고, 나는 좋은 시간 보내시라며 잽싸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사실 이런 경험은 긴 여행을 하면서 빈번하게 겪었던 작은 에피소드 중 하나에 불과하다. 한국에서 회사 생활을 하며 '꼰대 문화'가 싫었고, 여행을 다니면 그 '꼰대 문화'로부터 자유로워질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세계 여행 중에 특히 태국 북부 작은 도시, 미얀마, 인도, 파키스탄, 네팔과 같이 많은 여행자들이 자주 찾지 않는 곳에서는 이른바 '여행 꼰대'들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었다.
한국과 멀리 떨어져 있는 외딴곳에서 만난 그들은 사회생활을 하며 만났던 꼰대들과 다를 것이 없다. 그들이 내게 말하려는 하는 의도가 어찌 됐든 결국에는 '내가 너보다 여행 많이 했고, 너보다 여행하기 어려운 곳 많이 다녔어. 그러니 너는 내 말 들어. 지금까지 했던 너의 여행은 아무것도 아니야. 이런 여행이 진짜야.'라고 밖에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도 안다. 그들이 내게 그렇게 말한 이유는 '내가 처음에 이렇게 해서 고생했으니, 당신은 이점은 알아뒀으면 좋겠어요.'라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하지만 그 마음을 전할 때 넘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하지만 나는 당신의 여행을 존중해요.'라는 선명한 선이다.
내 친구 중 나와 여행 스타일이 정반대인 친구 C가 있다. C는 내가 오랫동안 여행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표현했다.
"이상하게 나는 TV에서 오지 마을이나 정글 같은데 들어가서 찍는 여행 다큐멘터리 보잖아? 그거 보면 네가 생각나. 왠지 너랑 잘 어울려.. 근데 나라면 절대 못할 여행.."
실제로 나는 오지 전문 여행가도 아니고, 정글은 커녕 동네에 있는 귀여운 강아지들도 무서워하는 겁쟁이 여행자일 뿐이다. 평범한 배낭 여행자들이 자는 호스텔에서 잠을 자고, 로컬 식당에서 돈을 주고 밥을 사 먹고, 취향에 맞는 카페에는 꼭 들어가야 직성이 풀리는, 그저 보통의 여행자일 뿐이다. 하지만 C에게 여행이란 깨끗하고 고급스러운 숙소에서 잠을 자고, 많은 후기들을 확인하고 검증된 곳에서 근사한 한 끼를 먹고, 야경이 보이는 루프탑 바에서 밤을 즐기는 것이다. 그런 C가 보기에 나의 여행은 정말 정글을 도전하는 마음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다.
나도 한때는 C가 추구하는 여행은 '진짜 여행'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진짜 여행'이란 무거운 배낭을 메고, 불편한 곳에서 잠을 자기고 하고, 또 오래 걸어서 온 몸이 새까맣게 타보기도 하고, 현지 문화를 직접 경험도 해보고, 그 분위기를 고스란히 느껴보는 것, 그게 여행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세상에 '진짜 여행'이란 기준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당사자가 충분히 만끽한 여행이라면 그게 진짜 여행이겠지 싶다.
내가 이렇게 생각이 바뀌게 된 이유는 나도 외국의 어느 고급 호텔에서 아침을 맞이하고, 예쁜 원피스를 입고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브런치를 먹고, SNS에 올릴 인생 샷을 남기고, 고급 마사지샵에 가서 스파와 마사지를 받고, 밤에는 도시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루프탑 바에 가서 달콤 쌉싸름한 칵테일 한입 호로록 마시고 "아.. 이게 여행이지.. 행복해.."라고 느꼈기 때문일까. 안타깝게도 아직 나는 그런 경험이 없을뿐더러 그럴 능력이 되지 않는다. 나의 여행 꼰대 기질이 산산조각 났던 때는 역설적이게도 장기 배낭여행을 하던 중 나보다 더 빡쎄고 긴 배낭여행을 했던 사람들을 만났을 때였다. 그런 분들 중 대부분은 자신의 철학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존중해주시는 멋진 분들이었지만 간혹 가다가 자신의 경험과 생각만이 옳다고, 더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셨다. 여행에서 만난 꼰대들은 오히려 사회에서 만난 꼰대들보다 더욱 그 레벨이 높았다. 그들이 겪은 멋진 경험이 오히려 그들의 시각을 더욱 좁고 딱딱하게 가로막는 두꺼운 벽이 된 것 같았다.
같은 시공간 속에서 같은 장면을 눈에 담고, 같은 소리를 귀에 담는다 해도 우리 모두에게 그 경험은 소름 끼치게도 제각각 다 다르게 흡수된다. 아무리 훈훈한 미담에도 몇몇의 악플은 늘 존재하듯 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마음은 모두 다르다. 어떻게 보면 내가 여행 꼰대라고 표현했던 그분들 또한 각자의 관점을 통해 겪은 세상을 내게 전달했던 것뿐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분들이 꼰대가 아니라고 하기에는 놓치고 있던 것들이 너무도 명확하게 보였다.
내가 지금까지 경험한 '꼰대'가 아닌 '인생 선배'인 분들은 이 두 가지를 지니고 있었다.
첫 번째는 끊임없이 자아 성찰과 자기 검열을 하는 습관,
두 번째는 나의 경험이 소중하고 특별하듯, 타인의 경험도 그만큼 소중하고 특별하다는 것을 진심으로 인정하는 마음과 그 마음을 표현하는 습관.
딱 이 두 가지만 지킨다면 여행에서,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사회에서 내 이름 뒤에 꼰대라는 단어보다 '인생 선배'라는 호칭이 따라붙지 않을까 싶다.
결국 '멋진 경험'이 있는 '꼰대'와 '멋진 경험'을 겪은 '선배'의 차이는
상대방을 대하는 태도 이전에 나 자신과 이 세상을 바라보는 그 시각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오늘도 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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