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다녀온 여행지'와 '전 남친'의 공통점

여행과 사랑을 그리워하는 이유

by 기록하는 슬기


코로나 19가 심각해지기 전, 작년 12월부터 올해 1월 중순까지 내가 매일 같이 출석도장을 찍던 한 사이트가 있었다. 바로 항공권 가격을 비교해주는 사이트였다. 그때 나는 어디론가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재정적인 문제로 이전 장기여행처럼 길게 떠날 수는 없었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여행 기간은 1~2개월이었고, 선택할 수 있는 여행지의 폭 또한 좁았다. 항공권이 많이 비싸지 않은 곳, 물가가 저렴한 곳, 그러면서도 내가 좋아할 만한 곳. 이 모든 조건들을 만족시키는 나라는 동남아 국가들, 인도, 네팔이었다.


하지만 위의 나라들 중 대부분은 이미 다녀온 경험이 있었고, 게다가 최소 2주에서 길게는 3개월 넘게 여행했던 곳들이었다. (방문 빈도수가 가장 높은 곳은 태국이고,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은 인도였다.) 그래도 자세히 지도를 보니 동남아 여러 국가들 중 내가 가보지 않은 나라도 2~3군데 있었다. 그런데 내가 매일 검색 사이트에서 찾는 도시는 태국의 방콕과 인도의 델리, 콜카타, 고아였다.


처음에는 일단 태국으로 들어간 후 가보지 않았던 동남아의 작은 도시들 위주로 여행을 하려고 했지만 계속해서 내 머릿속에서는 인도 어느 거리를 거닐고 있는 내 모습이 그려졌다. 고민 끝에 나는 내 인생 두 번째 인도 여행을 가겠다고 다짐했다.


구정이 끝나고 바로 인도행 비행기표를 사려던 내 계획은 코로나 19라는 무시무시한 전염병으로 인해 조금씩 지연이 되다가 결국에는 3~4년 뒤로 미뤄져 버렸다. 물론 현재 나의 상황, 우리나라의 상황만 보자면 다른 곳에 비해 너무 다행스럽지만 이번 연도에 야심 차게 준비했던 나의 계획이 예상치도 못한 변수로 인해 깨졌기에 아쉬운 마음은 숨길 수 없었다. 그나마 이런 내 마음을 달래주는 건 지난 세계여행 때 찍은 사진들 뿐이었다.




만인의 연인 아니지, 만인의 도시 '태국 치앙마이' <사진 태국, 치앙마이. 2017. 06>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많다는 건 분명 좋은거야. <사진 (왼쪽부터) 인도 고아 - 파키스탄 훈자 - 네팔 안나푸르나 라운딩 중>



얼마 전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어느 날 밤이었다. 한껏 센티해진 기분에 세계여행 중 찍은 사진을 한 장, 한 장 음미하며 봤다. 동행이 있었던 여행지에서는 사진 속에 내 모습이 자주 나타났고, 동행이 없던 기간에는 거의 멋진 풍경과 생소한 장면들이 사진 속에 담겨있었다. 특히 필터를 하나도 넣지 않은 고화질 미러리스 카메라로 찍은 사진 속 인도는 지나치게 사실적이었다. 인도 여행 후 2년 6개월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나도 모르게 여러 겹의 뷰티 필터를 씌운 채로 인도의 모습을 기억했던 것이다.


그리고 두 눈을 감고 한 번 상상을 해봤다. 사진 속에 있는 좁고 지저분한 (실제로 길바닥에 소똥, 개똥으로 가득하다.) 거리 위에 내 몸뚱이보다 큰 배낭을 앞뒤로 짊어지고 걸어가고 있는 나를. 그리고 그 와중에 지나가는 인도 장사꾼들이 "헬로~ 마이 뿌렌드~ 웨어 알 유 고잉?"이라며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는 상황을. 아마 그 속에 나는 이렇게 혼잣말을 할 것 같다.

'아 내가 미쳤지. 인도를 왜 다시 왔지?'



아찔함과 동시에 두 눈이 번쩍 떠졌다. 그리고 보고 있던 사진들을 정리하고 불을 끄고 잠자리에 누웠다. 조금 전에 보던 인도 사진들의 잔상 때문인지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고 있을 때, 불현듯 친구 P가 예전에 내게 한 말이 떠올랐다.

"도대체 너는 인도가 왜 좋은 거야? 진짜 나는 돈 주고 가라고 해도 절대 못 갈 것 같아."


그때 나는 간단명료하게 인도가 좋은 이유에 대해 설명할 수 없었다. 솔직히 나도 내가 왜 인도를 좋아하는지 잘 몰랐기 때문이다. 여러 언론에서 접했던 것처럼 인도는 실제로 위험하고, 또 위생적으로도 문제가 많다. 게다가 사기꾼들은 어찌나 많은지 순수하게 도와주려고 오는 사람들마저 구분하기 힘들 정도이다. 그런데 나는 왜 그런 인도를 좋아하는 걸까.


1년 7개월이라는 장기여행이 모두 끝난 지 1년이 훌쩍 넘은 지금에서야 나는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내가 인도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는 인도라는 그 여행지 자체가 좋았다기보다 그 당시 인도에서 느꼈던 내 감정이 좋았던 것이었다. 그 감정을 느끼게 했던 요소 중에 분명 장소 또한 중요하지만 그 속에서 만났던 사람들, 들었던 음악, 먹었던 음식, 온몸의 피부로 느꼈던 공기, 습도, 온도 등 나를 스치고 갔던 모든 것들의 조화가 절묘하게 어우러졌기 때문에 나는 인도를 좋아했던 것이고, 또 그리워하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여행지가 너무 좋아서 다시 갔다가 실망하게 되는 경험을 심심치 않게 한다. 분명 그 장소는 그대로이고 그곳을 두 번째로 찾아간 '나'라는 사람은 똑같은데, 뭐가 변했기에 실망하게 되는 걸까. 그 이유는 처음 갔을 때 그 감정을 기억하고, 기대하고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와 같은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쉽게 실망을 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과거 속에 우리가 좋아했고, 그리워했던 것은 그 장소 자체가 아니라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이었던 것이다.




인도 여행 1일차, 이 사진을 찍으면서 속으로 말했다. '왠지 인도를 좋아하게 될 것 같아.' <사진 인도, 델리 빠하르간지. 2017.08>
인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게 (좋든 나쁘든)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사진 인도, 바라나시. 2017. 11>



뜬금없지만 문득 전 남자 친구 J가 떠올랐다. J와의 연애 이전에도 몇 번의 연애를 했었지만 이별 후 유독 잊기 힘들었던 사람은 J였다. 사귀는 동안 하트가 줄줄 흘러나오던 그의 두 눈을 바라보면 내 마음은 금세 편안해졌고 따뜻해졌었다. J만큼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고, 그 사랑을 온 마음과 온몸을 다해 표현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느꼈기에, 그를 쉽사리 잊을 수 없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J와의 기억을 한참 동안 놓아주지 못하고 있다가 이별 후 사계절이 2번이 바뀌고 나서야 그와 그의 기억을 모두 떠나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왜 이렇게 오랫동안 J를 그리워했었는지를.


물론 J라는 사람 그 자체를 많이 그리워했었지만 이별 후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내가 그리워했던 건 정확히 '그 사람'이 아니었다.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느꼈던 '내 감정'을 그리워했던 것이었다. 그가 줬던 사랑과 관심 덕분에 느낄 수 있었던 안락함과 따뜻함을 놓아주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게 인도 여행과 전 남자 친구의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이 둘은 내게 분노, 짜증, 슬픔, 두려움, 싫증, 후회 등의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게 했지만 그것들을 모두 녹여버릴 만큼의 강렬한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게 해 줬다는 것이다.




어딘가를, 누군가를 여행할 때 나는 행복해보인다. <사진 2017. 08. 북인도 라다크>



'몇 년 뒤 내가 다시 인도를 간다면 어떨까?' 하고 상상해봤다. 그리고 곧바로 '혹시 이전의 인도 여행 때 느꼈던 감정을 못 느껴 실망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의 물음표가 따라왔다. 하지만 그 두려움 때문에 내가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인도 여행을 포기하기는 싫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 전 여행과 달라서 실망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 자체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그전 여행과는 달리 새로운 감정을 느끼고 또 다른 매력을 느끼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새로운 사람을 여행하는 연애 또한 그렇다. '그때 만났던 그 사람처럼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은 없을 거야', '그 사람과 함께 있던 내 모습, 내 감정은 만날 수 없을 거야.'라고 예단하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게 될지도, 그리고 그 속에서 느껴질 감정은 나 자신도 그 누구도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늘 마음속에 인도를 간직하고 그리워하고, 동시에 언젠가 다가 올 사랑을 꿈꾸는 건 '여행'과 '사랑'이라는 두 글자를 떠올렸을 때 처음부터 끝까지 사라지지 않는 감정은 '기대'라는 감정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여행과 사랑을 그리고 기대한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다.

행복하고 싶고, 행복의 감정들을 느끼고 싶은 건 우리 모두의 본능이니까.








오늘도 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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