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글이 숨 쉴 수 있는 이곳에서 받은 용기와 희망에 대해
며칠 전 지난 세계여행 중 만난 동생 R과 반년만에 재회를 했다. (R은 나보다 조금 늦게 한국으로 돌아왔고 근 1년간 취업 준비를 하고 있다.) 우리는 소주 한 잔을 기울이며 그간 서로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언니, 나 저번에 썼던 00 기업, XX 기업 있잖아. 다 잘 안됐어. 솔직히 그중에 00 기업 떨어졌을 때 좀 충격이 컸거든.. 그리고 얼마 전에 전화로 언니한테 말한 다른 회사도 결국 연락 없었어. 그래서 나 이번 연도에는 지원하는 분야도 조금 넓혀보려고 해. 나 얼마 전에 새로운 자격증 공부도 시작했어. 계속해서 지금까지 준비한 분야만 지원할 수는 없을 것 같더라고."
R은 무척 차분하게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몇 개월간 겪은 이 과정을 내게 단 3~4줄로 말하기까지 얼마나 깊은 한숨을 쉬었으며 발표 당일 쿵하고 떨어지는 심장을 몇 번이고 붙잡았는지 그녀의 눈빛은 숨기지 못했다. R의 이야기가 끝나고 나는 오른손으로 소주잔을 집어 올려 그녀의 소주잔과 짧고 부드럽게 부딪힌 후 한입에 씁쓸한 소주를 털어 넣고 이렇게 말했다.
"그래. 너 한다면 하잖아. 분명 너한테 맞는 기회는 올 거야."
미지근한 소주를 목 끝으로 밀어내고 자연스레 "크~" 소리를 내며 소주의 쓴맛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내게 그녀는 나의 근황에 대해 조심스레 물어왔다.
"언니는 요즘도 계속 글 쓰는 거지? 좀 어때..? 할 만 해?"
"응. 매일 도서관 가서 글 써. 음.. 사실 글 쓰는 건 정말 좋아. 당장 돈을 못 번다는 게 힘들어서 그렇지."
나의 대답을 듣고 R은 이전보다 더욱 조심스럽게 내게 질문을 건넸다.
"언니는 그 작가.. 그러니까 그 언니 글 쓰는 거.. 그건 언제까지 해 볼 생각이야?"
사실 이 질문을 받자마자 바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생각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막연하게 '언제까지 내가 버틸 수 있을까?'라는 걱정은 해봤지만 '언제까지 해보고 안 되면 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 혹은 계획은 애초에 없었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생각을 정리하고 나는 R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음.. 네 말은 내가 지금 이렇게 글 쓰는 게 당장 돈을 못 버니까 언제까지 이렇게 글만 쓰면서 생활할 거냐는 그 말이었지?"
"응.. 아무래도 예술 쪽은 바로바로 돈을 벌기 힘들잖아. 엄청나게 오래 걸릴 수도 있는 거고.. 게다가 언니는 집에서 생활은 하지만 나처럼 부모님한테 조금씩이라도 도움을 받는 것도 아니고.."
"맞아. 나도 '돈'을 생각하면 엄청 답답해. 애초에 글 쓰기로 마음먹을 때 가장 걱정했던 부분이기도 해. 얼마 전에 유독 나도 미래에 대해 덜컥 겁이 나더라고. 곰곰이 생각해봤어. 더 늦기 전에, 더 경력 단절이 오래되기 전에 회사로 돌아가야 하는 걸까. 근데 예전에 나도 회사 다니면서 글 쓰는 걸 시도해봤었는데, 나는 안되더라고. 만약 회사를 다니면 글은 또 나한테서 멀어지게 되는 게 사실이야. 당장 경제생활을 어렵게 해야 한다는 것도 두렵지만 내가 다시 글을 포기한다는 게, 나한테는 그게 더 두렵더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돈은 아끼는 거고, 또 돈은 없으면 중간중간 단기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당장 생활은 가능하니까.. 나는 지금부터 끝을 생각하기보다는 내 마음이 할 수 있을 때까지 해보려고. 그러고 싶어."
이미 준비한 듯 술술 나오는 나의 대답에 R은 더 이상 걱정 어린 말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 언니는 긍정적이니까 잘할 수 있을 거야!"
R의 마지막 한 줄 대사는 문득 7개월 전 한여름 강남역 어느 지하 선술집에서 소주잔을 부딪히던 나와 그녀를 불러왔다.
당시에도 R은 열심히 취업 준비 중이었고, 나는 아무런 선택을 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중이었다. R과 한참 동안 장난 섞인 이야기를 나누다가 R은 조금 진지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언니, 그러면 이제 언니는 무슨 일 해볼 생각이야? 그전에 나한테 말했던 회사에 들어가게?"
"아.. 사실 나는 회사는 진짜 다시는 들어가기 싫어. 누구는 배부르다고 할 수 있지만, 나는 이제는 정말 '내 일'을 하고 싶어. 너한테 진지하게 말은 안 했었지만 오래전부터 나 작가가 꿈이었거든.. 그래서 지금 고민이야. 마음잡고 글을 써볼지, 아니면 늦기 전에 회사로 돌아가야 하는지.."
"언니.. 그런데 글이나 여행, 이런 거는 지금 몇몇 유명한 작가나 유튜버들이나 돈 벌지. 지금 언니가 시작하기에는 너무 힘들지 않아? 언니는 경력도 있고 해서 회사에도 어렵지 않게 들어갈 수 있잖아.. 일단은 취업을 해야 하지 않을까?"
지난여름 밤의 R과 이번 겨울밤의 R이 내게 전하는 말의 내용은 많이 바뀌었다. 돌이켜보면 7개월 전 R은 내게 그렇게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누가 봐도 나는 내가 가려고 하는 그 길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나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R은 내가 못 해낼 거라는 생각보다는 스스로 자신이 없는 내 모습을 본능적으로 느꼈던 것이다.
그 여름날 그녀와의 만남을 가진 후 규칙적으로 매일 글을 써온지는 이제 6개월이 되었다. 여전히 R은 취업 준비생, 나는 작가를 꿈꾸는 사람이다.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아 보이는 R과 '나'이지만 우리는 그 사이 조금은 많이 변했다. R은 그간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 분야만 고집하지 않고 더 다양한 분야로 시야를 넓혀 도전하고 있고, 나는 방황의 시간을 마치고 내가 선택한 그 길 위를 차근차근 걸어 나가고 있다.
글을 쓴다고 마음먹은 지 6개월 차, 나는 그동안 9개의 공모전에 출품했고 그중 단 하나의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2019년 8월부터 브런치를 다시 시작했는데, 당시 내 브런치에는 단 3개의 글이 발행되어 있었고, 구독자는 26명 (그마저도 활동한 지 오래돼서 반은 유령 회원이었다.)이었다. 그 후 오늘까지 총 발행한 글은 53개, 그리고 구독자는 210명이다.
매번 마주하지만 도통 익숙해지지 않는 공모전 탈락이라는 비보를 받을 때, 혹은 정성 들여 며칠 걸려 쓴 글이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할 때마다 나는 단순히 우울해진다기보다 내 글에 대한 자신감은 뚝 떨어졌고, 이 길 위를 걷는 스스로에 대한 불안감은 가득 차곤 했다. 그런 와중에 어떻게 이렇게 반년을 버텼냐고, 그리고 어떻게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쓰려는 용기가 나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그 답은 바로 '브런치'다.
위에 언급했듯이 지금까지는 그렇다 할 큰 결과물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내게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언제쯤 내 글이 저기 올라갈까 늘 꿈만 꾸던 '브런치 editor's pick 메인'자리에 내 글이 두 번이나 올라가 보기도 했고, 브런치 페이스북 페이지에도 내 글이 올라가는 영광을 맛보기도 했다. 그리고 심심치 않게 다음(daum) 사이트 '여행', '직장 인 IN' 메인으로 내 글이 올라가기도 했다. 7년 전부터 다른 사이트에서 블로그를 운영해왔지만 브런치는 '글 쓰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플랫폼이다 보니 내 글이 좋은 반응을 얻었을 때 오는 그 성취감과 짜릿함은 확연히 달랐다. 브런치에 글을 올리며 침체되어 있고, 어둡기만 했던 내 마음속이 금세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고, 밝아졌다. 그리고 내 글에서도 심장 박동 소리가 느껴졌다.
사람이 삶을 살며 가장 허무하고 슬픈 순간 중 하나는 '이 세상에서 내가 필요 없는 존재'라고 느껴질 때,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이 '이 세상에서 필요 없는 일'이라고 느껴질 때라고 한다. 내가 공모전에서 탈락할 때마다, 고심해서 쓴 글이 주목받지 못했을 때마다 힘들었던 이유는 단지 탈락이라는 두 글자가 아닌 꼭 내 글이 이 세상에서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꼭 수많은 관중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소리쳐도 '나'라는 존재가 그들에게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아무도 내 눈빛을, 손짓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들은 내게 늘 침묵을 지켰다. 그런 적막함과 어두움이 길어지고 짙어질수록 자꾸만 약한 마음이 차오르곤 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신기하게도 브런치만이 내게 이렇게 응답해줬다.
"아니야. 너와 너의 글은 이 세상에 꼭 필요해. 포기하지 마.
내가 널 이렇게 응원해."
반년마다 만나는 R을 6개월 후에 만나게 된다면, 우리는 어떤 표정으로 서로의 근황을 전할까. 다음에 보면 R의 지친 눈빛보다는 또렷한 눈빛으로 그녀의 근황을 듣고 싶다. 그리고 나는 그 답으로 이제 더 이상 그녀가 나를 걱정하는 근황보다는 그녀가 안도할 수 있는 그런 근황을 전하고 싶다. 그러기까지 아마 나는 브런치에게 앞으로도 지금까지 들어왔던 그 응답을 받으며, 그에 응해 더욱 힘내고, 희망을 느끼며 글을 써 내려가야겠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음에는 내가 브런치에게 응답하는 날이 올 거라 믿는다.
"나와 내 글을 이 세상에 필요하다고 느끼게 해 줘서 고맙다고.
덕분에 나는 그 시간을 견딜 수 있었다고.
덕분에 나도, 내 글도 숨을 쉴 수 있었다고."
오늘도 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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