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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도 '재능'이 있긴 한 걸까?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재능'에 대하여

by 기록하는 슬기

"한글 이름은 한문 칸에 작성 안 해주셔도 돼요."


가끔 인적사항에 대한 공식적인 서류의 빈칸을 채울 때 내가 종종 듣는 말이다. 내 이름은 브런치 작가명에 쓰인 그대로 '슬기'이다. '슬기'라는 내 이름을 듣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글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도 내가 아는 다른 '슬기'들은 모두 한글 이름이기도 하다.) 하지만 '슬기'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 중에 나는 드물게 한자로 '슬기'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내 이름의 '슬'은 비파(거문고와 비슷한 동양의 현악기) '瑟', '기'는 기록할 '記', 그래서 '瑟記'이다.


이름에 어떤 의미를 두기도 하고, 의미를 두지 않기도 하지만 엄마가 말씀해주시길 나의 이름 '슬기'에는 '음악적 재능 (비파 슬)과 글 쓰는 재능(기록할 기)'을 가진 다재다능한 아이가 되길 바라는 의미가 있다고 하셨다. 음악과 글이라. 둘 중 하나라도 그 재능이 내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음악을 하는 분들, 글을 쓰는 분들을 포함하여 예술을 하시는 분들에 대한 깊은 동경이 있는지라 나중에 내 이름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내심 기분이 좋았다. 엄마의 바람대로 혹시나 그 둘 중 어떠한 재능이 내게 있지는 않을까 싶어서.



그렇다면 내게 음악적 재능(비파 '슬')이 있었을까.

돌이켜보니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당시 유행하던 피아노 음악 학원을 다닌 적이 있었다. 시키는 건 군소리 없이 곧잘 하는 스타일이었던 나는 학원은 빼놓지 않고 성실하게 다녔다. 그렇게 약 5년 동안 피아노 학원을 꾸준히 다녔지만 아쉽게도 내게 피아노란, 음악이란 딱 피아노 학원생 그뿐이었다. 주변에 몇몇 친구들은 피아노가 더 치고 싶어서 집에 피아노를 사달라고 부모님께 조르기도 했다는데 나는 피아노 학원에서 연습하는 그 1시간이면 충분했다. 때로는 그마저도 너무 지루하기도 했고, 무서운 선생님이 레슨 하는 날은 차라리 아파서 학원을 가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아쉽게도 어린 시절 나는 내 이름의 의미와는 달리 내게 딱히 특별한 음악적 재능을 찾지 못했다. 아니 그전에 나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었다.



피아노.jpg 그땐 몰랐지만, 지금 나는 음악에 관심과 흥미는 많은 사람 중 하나이다.





다음으로 글 쓰는 재능(기록할 '기')은 어땠을까.

내가 처음으로 '글쓰기'로 인정을 받거나 흥미를 느꼈던 때가 언제였는지 곰곰이 떠올려보았다. 아무리 샅샅이 내 기억을 뒤져봐도 다른 작가들처럼 어린 나이부터 '도 대회, 전국 대회'에서 글쓰기로 수상을 했던 이력은 없다. 그런데 희미하지만 또 선명하게 기억나는 한 장면은 있다.


초등학생 3~4학년 즈음으로 기억한다. 1년에 한 번씩 반은 자발적으로 반은 강제적으로 부모님께 편지를 써야 하는 그 날, 어버이날이었다. 당시 담임 선생님과 함께 부모님께 드릴 색종이 카네이션을 만들고 그다음에는 편지를 썼다. 집으로 돌아가 쑥스러운 표정과 몸짓으로 엄마 아빠께 학교에서 만든 꽃과 편지를 작은 두 손으로 전해드렸다. 그 자리에서 바로 엄마 아빠는 내가 쓴 편지를 읽으시고 활짝 웃으시며 내게 이렇게 말씀해주셨다.

"우리 딸은 정말 글을 잘 쓰네." 그때가 내가 글을 잘 쓴다고 들었던 첫 번째 칭찬이었다.


그 후에 '글 쓰는 재능'을 발견한 순간이 있었냐고 물어본다면, 있긴 있다. 다른 글을 잘 쓰는 분들에 비해 화려한 과거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나름의 가슴 뛰었던 순간들은 간직하고 있다. 논술이라고는 한 번도 배워보지 않았던 시골 학교 출신인 내가 재수 때 우리나라 입시 학원 top 3 안에 드는 그 학원을 다니는 전국 학생들 (고3, 재수생 포함) 사이에서 논술로 전체 2등, 그다음 달에는 전체 5등을 했던 일, 대학교 때 리포트나 서술형 시험이 끝나고 종종 교수님들로부터 "슬기라는 학생이 누구지? 글을 정말 잘 쓰던데."라는 질문을 받았던 일, 그 후 내가 쓴 글이 복사가 되어 여러 학생들에게 읽히는 일, 블로그나 SNS의 내 글을 보고 너무 재미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보느라 밤을 지새웠다는 애독자분들을 만났던 일 등이 있다.


이런 크고 작은 사건들은 내 가슴 한편에 글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해 줬고 무엇보다 글에 대한 흥미를 느끼게 해 줬다. 나는 다른 어떤 일을 한 후 느끼는 감정보다 '글'을 쓴 후 느끼는 감정 중 '보람'이 가장 깊고 진했다.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차곡차곡 쌓여 온 글에 대한 특별한 감정들은 결국 내게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갖게 했다. 아마도 이런 꿈을 오랫동안 지켜올 수 있었던 것은 남몰래 속으로 나는 나의 재능을 믿고 있었던 것 같다. 엄마 말씀대로 내 이름의 '기록할 기'는 우연이 아닌 어쩌면 운명이 아닐까 라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글을 쓰는 재능은 타고난 것 같아.'



P20180703_021843851_44228307-5A66-41D0-8DE1-84FE92BF89A8.JPG 언제부턴가 나의 이름의 '기록할 기'는 나를 나타내는 한 글자가 되기 시작했다.




24살 대학교 졸업 후, 6년이라는 긴 여정을 돌고 돌아 결국 나는 나의 마음의 소리를 듣기로 결심했다. 나는 용기를 냈고 작년 8월부터 매일 '글 쓰는 삶'을 살아오고 있다. 물론 처음부터 '내 글을 모든 사람들이 좋아해 줄 거야.'라는 생각을 갖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내 재능에 대한 믿음이 있던 상태였기에 '지금까지 내 글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인정해 줬듯이 내가 딱 마음 잡고 쓰면 어느 정도 반응은 오겠지?'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글 쓰는 일을 본업이 아닌 '취미'로 했을 때와 글 쓰는 일이 본업이 되는 '작가'를 바라보며 쓰는 글은 완전히 달랐다. 정말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의 글 사이에서 내 글은 그저 그런 글 같았다. 소름 끼치게 매력적이지도, 치명적이지도 않았다.


그 후 나는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작가들의 글을 더 자세히 들여다봤다. 그들의 글은 굳이 가까이에서 보지 않아도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 같았다. 꼭 하늘의 수많은 별들 중 유독 빛이 선명해서 자꾸만 눈이 가는 그런 별 같았다. 처음에는 그런 글을 쓸 수 있는 그들의 그 재능에 질투가 났고, 나중에는 부러웠다. 그러고 나서는 그동안 믿고 있던 '나의 재능'에 대해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내게 과연 글 쓰는 재능이 있긴 한 걸까.'


'그저 나는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글에 대한 재능이 아닌 흥미가 있던 사람이었는데 욕심을 부렸던 것일까. 이 길이 내게 맞는 걸까.'

이런 의심 가득 찬 나의 질문은 어떤 날은 하루 종일 나를 괴롭히기도 했지만 또 어느 날은 너무도 간단히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기도 했다. 그 답은 단 한 명이든, 두 명이든 그 누구라도 나의 글을 공감하며 읽어주고 내 글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는 분들을 만나는 일이었다. 그럴 때면 나는 너무도 쉽게 내 재능을 믿고 싶어 졌다. 아니, 이미 믿고 있었다.



6개월 간 매일같이 글을 써오면서도 나는 늘 의문스러웠다.

과연 내게 글 쓰는 재능이 있는 걸까? 내게도 재능이라는 게 있긴 한 걸까?

이러한 물음표 가득한 문장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요즘, 우연히 보게 된 드라마 속 한 장면에서 나는 그 질문에 대한 힌트를 얻었다.



그 드라마는 낭만닥터 김사부 2였고, 극 중 서우진(안효섭)과 차은재(이성경)가 나누는 대화였다.


은재 : 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고 싶었어. 어느 날 레슨 선생님이 재능이 없으니 취미로만 했으면 좋겠다는 말에 이틀을 엉엉 울다 결국 꿈을 접었어. 그런데 재능이 없긴 이쪽도 마찬가지야. 그때 해부학 실습실에 들어갔을 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그때 도망쳤어야 했는데.


우진 : 이쪽에 재주가 있네. (실제로 환자에게 목에 칼을 맞고도 바로 진료를 보고 있는 은재였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환자를 보고 있잖아. 의사는 그런 마인드가 재능인 거야. 손재주 좋다고 재능이 아니라.


은재 : (활짝 웃어 보이며) 그런가..?

<낭만닥터 김사부 2, 8회 중>




극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재능을 의심하던 은재는 나와 너무도 닮아 보였고, 그런 그녀와 우진이 나눈 대화는 내게 이렇게 들렸다.

슬기 : 나는 내가 글 쓰는 재능은 있는 줄 알았어. 그런데 아닌 것 같아. 차라리 취미로만 했어야 했나 싶을 때도 있어. 내가 이 길을 계속 가는 게 맞는 걸까.


우진 : 근데 너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지금도 글 쓰고 있잖아. 작가는 글을 쓰고 싶다는 그 진심이 재능인 거야.



그렇다. 재능이란 어떤 분야의 뛰어난 습득력이나 화려한 기술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야에 대한 '진심'이 바로 재능인 것이다. 그 진심은 다른 기술과 달리 아무리 반복해서 훈련하고 노력한다고 생기지도 않고, 늘지도 않기 때문이다. 물론 진심 없는 재능도 있을 수 있지만 결국 그 재능은 빨리 그 빛을 바라버린다. 오랫동안 그 빛을 유지하며 세상을 밝히는 재능에는 모두 진심이 있다. 즉, 재능이란 그런 나의 진심을 믿고 행동으로 옮기는 일, 그것이 우리가 가진 가장 빛나는 재능이다.



P20200202_172554610_BF5F0F0B-CCF4-4557-AB18-65B9D4A40D4F.JPG 글 쓰는 내가 좋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나로 살고 싶다. 진심으로.



드라마 속 한 인물과 짧은 대화를 나눴던 그날 밤, 나는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그동안 찾아 헤매던 한 질문에 대한 답을 명확하게 찾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슬기'라는 내 이름에 담긴 의미에 대해 자신 있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내 이름 슬기에 '기'는 '기록할 기' 한자를 쓰는데 정말 신기하지 않아? 내가 글 쓰는 재능이 있다는 걸 미리 알았고 있던 것 같아."


유독 그날따라 조용했던 내 방안이었지만 밤새 내 심장 소리가 귓가에 끊임없이 들렸다. 내 심장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000님이 내 브런치를 구독합니다.'라는 알림을 쉴 새 없이 받은 것처럼 바쁘게도 기쁘게도 뛰어댔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용기 속에 당신의 천재성과 능력, 그리고 기적이 모두 숨어있다. -괴테-









오늘도 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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