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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록하는 슬기 Feb 10. 2020

혹시 여행 속 로맨스를 꿈꾸시나요?

마음의 문을 꽁꽁 닫아놓은 채, 영화 같은 사랑을 꿈꿨던 나에게



세계여행 중 만나 지금은 나의 최측근이 된 친구 H에게 며칠 전 심상치 않은 연락이 왔다. H와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나는 "우와..", "신기하다..." 같은 추임새를 쉴 새 없이 내뱉었고 마지막에는 부러움과 진심을 가득 담아 "축하해! 근데 진짜 인연은 따로 있나 봐.."라는 말을 건넸다. 예상하셨듯이 H는 며칠 전 남자 친구가 생겼다는 소식을 내게 전했다. 그런데 남자 친구 생긴 일이 뭐 그렇게 신기하냐고 물어보신다면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일단 H와 현 남자 친구는 2~3년 전 같은 시기에 세계여행을 했었고 그때는 서로 sns상으로만 알던 사이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어느 대륙에서 우연히 같은 숙소에서 만나게 되었지만 당시 각자의 동행이 있었고, 여행하는 방향마저 정반대였기에 그 숙소에서 단 1박, 아니 저녁 식사만 함께 했다고 한다. 그날 여러 명이 함께한 저녁 식사 자리는 술자리로 이어져 길어졌고, 그들은 그때부터 대화가 참 잘 통한다고 느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각자의 일정대로 움직여야 했고 그저 그날의 좋은 기억만 안은 채 각자의 길을 갔다. 여행이 더 길었던 H가 일상으로 돌아온 지 한참 지나 그와 연락이 닿았고, 그들은 첫 만남 후 2년이 지나 한국에서 두 번째 만남을 가졌다. 그리고 몇 번의 만남 후 그들은 현재 연인이 되었다.


사실 나도 여행을 길게 하면서 여행을 통해 사귀게 된 커플은 심심치 않게 만났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우연히 여행 방향이 비슷해서 오랜 시간 같이 다니다가 연인으로 발전했거나 혹은 한 명이 과감하게 비행기 티켓을 찢어버리고 다른 한 명의 여정을 함께 하게 되면서 연인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내 친구 H의 경우는 이전에 보아왔던 커플들과는 조금 다른 여행 속 로맨스라 그런지 더욱 낭만적이고 특별하게 느껴졌다. 낯선 어느 나라에서 우연히 어느 숙소에서 만나 여러 사람과 함께 했던 단 한 번의 저녁 식사자리, 그 후 2년이 지나서도 그날 서로가 느꼈던 감정을 기억하고 곧바로 연인이 되는 인연이라.. 이들에게는 감히 '운명'이라는 이 두 글자를 붙이고 싶었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1995), 여행 속 로맨스의 정석을 보여주는 영화.



그리고 나는 한번 곰곰이 생각해 봤다. 지난 1년 7개월 동안의 세계여행과 호주 워킹 홀리데이 중 내게도 어떤 운명적인 인연이 있었는데 내가 놓쳤던 것은 아닐까? 혹은 당시 상황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었던 누군가가 미래의 나의 운명적인 인연이 될 확률은 없는 걸까? 그동안 길 위에서 스쳐 지나갔던 인연들 중 몇몇의 얼굴이 선명히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람을 경계하고 마음을 여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나의 성향상 먼저 호감을 느꼈던 상대는 거의 없었지만 가끔 내게 호감을 먼저 느꼈던 사람들에게 어려운 제안이 섞인 고백을 받았던 적은 몇 번 있었다.

 



-여행 중 오랫동안 어떤 도시에서 머물 때 알게 된 A라는 사람(그 도시에 정착을 하려고 나온 사람이었다.)은 내가 다른 나라로 떠나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네가 이 여행을 얼마나 오랫동안 준비하고 기대했는지 들어서 이 말하기까지 정말 힘들었지만.. 나는 너를 더 오래 보고 싶어. 다른 나라 가지 말고 계속 여기서 나랑 여행하면서 지내면 안 될까?"

-그 후 다른 나라를 여행하던 중 우연히 같은 숙소에서 만난 유일한 한국인이었던 B는 나와 며칠 동안 함께 여행을 하고 헤어지기 전날 밤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 여행 끝나면 호주로 워홀 간다고 했잖아. 나는 네가 호주 안 가고 여행만 하다가 한국 돌아왔으면 좋겠어. 그럼 나는 너 기다릴게."

-한참 뒤 다른 나라에서 처음으로 나도 호감을 느끼고, 상대도 호감을 느꼈던 C는 나와 너무도 비슷한 사람이었다. 결정적인 순간 우리는 같은 마음으로 서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한국으로 떠났다. 그저 "한국에서 다시 보자."라는 말만 남기고.

-그 후 호주에서 알고 지낸 D는 내가 첫 번째 호주 워킹홀리데이 비자가 끝나기 몇 주 전부터 내게 호감을 줄곧 표현해왔다. 그리고 그는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이렇게 말했다. "너 이번에 비자 끝나고 한국 갔다가 세컨드 비자 쓸 때 다시 이 도시로 돌아올 거지? 나는 호주에서 정착하고 싶어서 온 건데, 네가 다시 여기로 돌아와서 나랑 함께 했으면 좋겠어."





특히 여행 중에는 반쯤은 이미 녹아버려 말랑말랑한 감성과 심장을 갖고 다니는 나에게 그들의 이런 표현은 충분히 나를 흔들만했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잠시 흔들릴 뿐 곧 제자리를 찾았고, 그들의 고백에 단 한 번도 "OK" 사인을 준 적은 없었다. 오래전부터 나의 소중한 꿈이었던 이 여행 계획을 송두리째 바꿀 만큼 A가 좋지 않았고, 긴 고민 끝에 가기로 결심한 호주 워킹 홀리데이를 포기할 만큼 B가 내게 중요하지 않았고, 나의 자존심을 내려놓을 만큼 C가 절실하지는 않았고, 앞으로 나의 미래를 함께할 만큼 D에게 믿음이 가지 않았다. 한마디로 나는 내 계획, 내 자존심, 내 삶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돌아보니 나는 한국에서 연애를 할 때도 똑같았다. 연애 중 나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하면서도 나는 항상 '내 삶'이 먼저였다. 좋아하는 감정이 깊어져서 나의 인생 깊은 곳에 누군가가 영향을 미칠 것 같으면 나도 모르게 재빠르게 방어를 했고 이미 도망갈 준비부터 하던 나였다. 그러니 나는 연애의 시작과 과정, 그리고 끝까지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한 번도 나는 내가 먼저 누가 좋아서 연애를 해본 적이 없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 그것도 나를 아주 많이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마음을 열었었다. 상대의 가슴에 나에 대한 사랑이 가득 차올라 찰랑찰랑 넘쳐흐를 것 같은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나는 그에 절반도 안 되는 사랑을 보여줬었다.


그런 겁쟁이인 내가 낯선 길 위에서 만난 낯선 사람과의 로맨틱한 사랑을 실현시키는 일은 더욱 어려웠다. 무엇보다도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나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나만큼 그들에게도 긴 방랑의 목적과 의미는 그들의 삶 속에서 꽤 무겁고 소중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알면서도 먼저 다가와주기를 바라기만 했다. 예를 들면, A가 모든 계획을 먼저 바꾸고 나의 여정에 함께 해주기를 바랐고, B가 나와 함께 호주도 갈 수 있다고 말해주기를 바랐고, C가 용기 내어 내게 그의 진심을 먼저 말해주기를 바랐고, 내가 D와 호주든 어디든 미래를 함께 하고 싶다고 느껴질 만큼 먼저 그의 능력을 보여주기를 바랐다. 결국 낯선 상황 속 느꼈던 호감은 오히려 내게는 큰 장애물로 다가왔고 그걸 넘어설 만큼 나는 그들의 매력을 알아보지 못했다.






다른 건 몰라도 나의 연애 사업에 관심이 많은 내 친구들은 여행이 끝나고 내게 자주 이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너 여행 중에 김종욱은 찾은 거야?"

(영화 '김종욱 찾기'의 폐해 중 하나로, 뭇 여성들에게 인도 여행을 가면 공유 같은 김종욱 씨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꿈을 꾸게 했다. 나도 그런 꿈을 안 꿨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김종욱 찾기'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10번도 넘게 보며 언젠가 나의 '김종욱 씨'를 만날 수 있을 거라 남몰래 (여전히) 꿈꿨었다.



처음에 그 질문을 들었을 때는 그저 내가 아직 특별한 타이밍이나 인연을 만나지 못해서 나의 김종욱 씨를 찾지 못한 거라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여행이 끝난 후 2년이 지나 그것도 여행 중 단 한 끼만 함께 했던 그 누군가와 연인이 되었다는 H의 이야기를 들은 후, 지나간 나의 시간과 그 안에 내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나에게 어떤 타이밍과 인연이 찾아오기 이전에 나는 이미 마음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상태로 누군가를 기다렸던 것이었다. 낯선 길 위에서 나는 가슴으로는 뜨거운 사랑과 핑크빛 낭만을 꿈꿨지만 머리로는 미지근한 현실과 회색빛 미래를 걱정하기만 했다.


H가 지금 사랑을 시작할 수 있던 것은 2년 전 낯선 어느 나라의 어느 숙소에서 낯선 공기가 피부에 닿고 낯선 불빛 속에서 낯선 그와 나눴던 눈빛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맞다. 어느 연인이든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 마음을 키워나가는데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첫 만남'과 서로에 대한 '첫인상'이니까.) 하지만 마음의 문을 꽁꽁 닫아놓은 나 같은 사람에게는 '낯선 길 위를 달리는 밤 버스, 그 안에 나란히 앉은 낯선 그 사람과 나, 모두가 자는 시간 속삭이듯 나지막이 나눴던 대화, 창문을 통해 간간히 들어오는 가로등의 불빛, 그 불빛 너머로 몰래몰래 훔쳐보던 그 사람의 속눈썹과 콧날, 설렘과 두려움 사이에서 느껴지던 떨림이 꼭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듯 내게 눈을 떼지 못하던 그 사람의 눈빛 그리고 미소'를 담은 이 장면은 단지 여행 속 낭만적인 순간에 그치지 않는다.


결국 운명적인 만남과 인연을 만날 수 있는 때와 장소는 따로 없다. 아무리 그 순간 속 그 사람과 내가 당장이라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 속에 휩싸였다고 할지라도 나중에 우리 두 눈에 선명히 보이는 건 내 앞에 '그 사람'이니까. '운명'이라면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는 두 눈을 가진 사람들이 만났다는 그 사실이 운명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전에 사랑했던 사람, 현재 사랑하는 사람 모두는 처음에는 '낯선 사람'이었다. 만약 그 사람과 처음 만났던 곳이 익숙한 장소였다고 할지라도 내 눈에 비치는 그 낯선 사람 때문에 그날의 공기, 온도, 조명마저 조금은 특별했던 것이다.



낯선 곳에서의 로맨스를 꿈꾸는 분들, 그리고 낯선 어떤 사람이 내게 사랑을 듬뿍 들고 나타나기를 기다리기만 하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가 지금까지 일상 속에서 만났던 인연들, 그리고 현재 만나고 있는 인연들은 모두 어쩌면 낯선 하루하루를 여행하는 인생 속의 운명적인 만남이었다고. 우리는 예전에도 충분히 낭만적이었고, 아름다웠고, 또 영화 같은 사랑을 했던 것이라고. 그리고 지금도 누군가는 그런 사랑을 하고 있는 거라고. 

그러니 이제 그만 마음의 문을 느슨하게 풀어놓고 누군가를 바라보고, 기다리고, 때로는 먼저 다가가 보자고.

그게 바로 우리의 '운명적인 로맨스'의 시작이고, 그 순간은 '영화 속 한 장면'으로 완성될 테니.










오늘도 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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