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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록하는 슬기 Nov 28. 2019

이별 사이에 불필요한 말,
"Good bye"

여전히 그 사람을 '잘' 보내주지 못하는 나와 누군가의 이야기


사랑했던 사람과 이별의 경험이 있는 모든 분들께 물어보고 싶다. 

과연 이별과 이별 사이에 'Good' Bye란 가능할까?

헤어지는 마당에 '좋게' 헤어지는 게 가능할까. 

불과 3년 전만 해도 나의 대답은 "절대 없다."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이별이 있을 수는 있다고 말한다. 

서로에게는 몰라도 '적어도 한 사람에게는.'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을 더 던져본다.

'좋게' 헤어지는 게 과연 더 좋은 걸까?

나는 실제로 좋은 이별을 겪기 전까지는 좋게 헤어지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서로 못 볼 꼴 다 보고, 바닥까지 다 보고 구질구질하게 헤어지는 것보다는 서로를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도록 겉이라도 '좋게' 헤어지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몇 년 전 실제로 나만 좋게 헤어지고 보니 그보다 더 오래전에 헤어지고, 다시 사귀고를 끊임없이 반복해 그 사이가 너덜너덜 해져 끊어질 때까지 사귀었던 그 이별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고 이제야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서 기억은 제멋대로 편집의 과정을 겪어 헤어진 그 사람과 나를 세상 아름다웠던 한 쌍의 커플로 만들어버린다. 바닥까지 봤을지 언정 긴 시간이 흐르면 대부분 좋은 기억이 남는다. 그래서 서로 바닥을 보지 않은 채 서로에게 '잘 지내'라는 말을 하며 비교적 '좋게' 헤어지고 시간이 흐르면서 생기는 부작용이 있었다. 안 그래도 아련한 기억 속 그와 나를 시간이라는 필터는 가슴 시리도록 더욱 아련하고, 아름다운 한 쌍의 커플 이야기로 그려놓았다. 행복한 기억은 더욱 행복하게, 안 좋았던 기억은 '그래.. 그때는 다 나름 이유가 있었지..'라고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합당한 이유들을 갖다 붙여놓았다. 그리고 기억 속 그 사람은 '내가 놓치기에는 아까운 연인'으로 변신해 있었다. 당시에 그 사람과 헤어지기로 마음먹은 건 그 누구도 아닌 '나'란 인간이면서 말이다. 



이렇게 '좋은' 이별을 한 그 사람이 떠오름과 동시에 문득 오래전 그와는 정반대로 헤어졌던 한 사람이 떠올랐다. 서로의 바닥까지 다 보고 구질구질, 너덜너덜하게 헤어져서 미련이라고는 한 톨도 찾아볼 수 없던 사람. 그 사람이 싫었다기보다 그 관계에 얽매여 질질 끌려다녔던 지난날의 내가 너무도 한심했다. 그래서 그 관계로부터 탈출한 내가 기특했다. 그리고 '시원'했다. 전혀 섭섭하지 않았다.

그 긴 연애를 끝냈던 그 해 12월 연말에 친구들과 모인 술자리에서 내가 스스로 했던 대사를 아직까지도 잊지 못한다.

"얘들아 너네는 2013년에 가장 잘한 일이 뭐야?"

"글쎄.. 너는 뭔데?"

"나는.. 아 아니다! 나는 내 평생에 가장 잘 한일이 이번 연도에 있어!"

"오.. 그게 뭔데? 너 뭐 좋은 일 있었나?"

"나 그 사람이랑 헤어진 거! 그게 가장 잘한 일이야. 진짜!"



이 대화 속 나의 대사 한 글자, 한 글자 모두 진심이었다. 물론 그 사람과 헤어진 직후, 기다려도 다시 연락이 오지 않았을 때 몇 주간은 정말 끝이 보이는 연애에 허무하기도 했고, 많이 아팠다. 이렇게 끝날 거 뭐 그렇게 놓지 못하고 안달복달했는지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당시에는 그 연애에 쏟아부은 나의 감정과 에너지와 세월이 아까웠다. 그 연애는 나와 그의 인생에서 성인이 되고 처음으로 길게 했던 첫 연애였으니까. 그때는 왜 그렇게 모질지 못했는지, 왜 빨리 헤어지지 못했는지, 왜 끝까지 나와 그 사람은 서로를 미워하며 헤어질 수밖에 없었는지 안타깝기만 했다. 우리도 돌아보면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추억은 많았었는데 말이다. 그 좋았던 기억도 모두 잊힐 만큼 너무 많이 싸웠고, 또 그러면서도 서로 헤어지지 못하고 있던 그 시간들 속에 그와 내가 안타깝다 못해 안쓰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 연애가 마침내 종지부를 찍었을 때 나는 너무 후련했다. 그 이후로 나는 단 한 번도 먼저 연락을 한다거나 아니, 술에 한껏 취해도 그 사람 생각이 단 1초도 난적이 없다. 그리고 상대방도 내게 헤어지고 나서 딱 한번 빼고는 연락을 한 적이 없다. 물론 그 한 번의 연락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신사적으로 연락이 왔었고, 서로의 안녕을 빌며 쿨하게 연락을 정리했었다.


내게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연락이 단 한번 왔던 것은 그만큼 그도 나에 대한 미련과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만약 헤어진 직후 둘 중 하나라도 미련이 남았다면, 아름다웠던 지난 우리의 기억이 자꾸만 그와 나를 괴롭혀 이별 후 몇 개월 이내로 술에 취해 돌돌 말리는 혀로 누군가는 먼저 전화를 했을 수 있다. 그런데 그도 나도 우리는 헤어진 후에 그 누구보다 깔끔했다.




새삼 그때 이야기를 왜 하냐면 자꾸만 '좋게' 헤어졌던 정확히 말하면 '나만 좋게' 헤어졌던 그 누군가가 요즘도 가끔씩 생각나기 때문이다. 아마 그는 그 이별이 어떤 이별보다 잔인했기에 더 이상 나를 떠올리려 하지 않을 것이다. 원래 사람이 본능적으로 정말 아팠던 기억, 힘들었던 기억은 잊기 위해 잘 떠올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 그는 이별 후 사계절이 두 번이 바뀌고 어떤 계절은 세 번째를 맞는 지금, 나를 더 이상 떠올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혼자 'Good bye'를 했던 나는 이 자리에서 바뀐 계절마다 그 필터를 거쳐 아련함만 짙게 남아버린 그와의 추억만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그 사람과의 재회를 꿈꾸지는 않는다. 그저 그 사람은 내게 아픈 사람이다. 

'다시 만날 생각은 없지만 이미 내 가슴에 깊이 박혀버린 그런 사람' 

내가 그 사람에게 준 상처는 그와의 행복했던 기억으로 내게 다시 돌아와 나를 자주 아프게 괴롭히곤 한다. 예상보다 내 아픔이 길게 가는 걸로 봐서는 생각보다 내가 그를 더 깊게 사랑했던 것만은 틀림없나 보다.






나는 지금도 가끔 상상을 해본다.

만약 내가 그날 그에게 이별을 고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과 매일같이 지겹게 싸우고 미운 말을 골라 서로에게 내뱉다가를 반복하던 어느 날 이별을 고했다면,

그 사람의 바닥, 나의 바닥을 모조리 보여주고 그러고 나서 서로의 붉어진 얼굴에 이별을 말했다면,

그리고 얄팍한 그리움에 속아 다시 만났다면,

그 후 다시 같은 문제로 얼굴 붉히며 언성을 높이다가 그때 이별을 얘기했다면,

그랬다면 지금처럼 이별 후 오랜 시간이 흐르도록 그 사람을 떠올리고 아파하지 않지 않았을까.

조금은 우리의 기억이 덜 아름답고, 덜 아련하고, 덜 아프지 않지 않았을까.

조금은 그 사람을 더 미워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내가 많이 사랑했던 그 사람과 홀로 'Good bye'를 하고 깨달은 몇 가지가 있다.

세상에 좋은 이별은 있을 수 있지만 그 이별은 오히려 생각보다 더욱 깊게 길게 아프다는 것.

다시는 안 볼 그 사람과 나 사이에는 굳이 'Good'이 필요 없다는 것.

이별 사이에 Good bye는 정말 '잘 가'지 못하게 한다는 것.


그러니 이별에는 때론 나쁜 이별이 나쁜 게 아니라는 것.

그 이별이 오히려 서로를 더욱 잘 보내주는 이별일 수도 있다는 것.


그래서인지 여전히 난 그와 그의 기억을 '잘' 보내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









지금까지 저의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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