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사랑할 운명인 나와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
<영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1995)>
내가 이 영화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게 된 건 2006년 방영하던 나의 인생 드라마 연애시대 속의 한 장면을 통해서이다. 극 중 남자 주인공 (감우성)은 전 부인인 여자 주인공 (손예진)에 대한 마음과 미련을 정리하지 못 한채 초등학교 시절 첫사랑(문정희)을 만나 재혼하게 된다. 그 후, 감우성은 사랑이라는 감정보다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문정희에게 최선을 다한다. 어쩌면 진심보다는 결혼에 대한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그렇게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던 어느 날 퇴근을 마치고 감우성은 집으로 돌아온다. 그때 문정희는 어떤 영화를 보고 있었다. 그 영화가 바로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였다.
잠시 그들의 대화를 옮겨본다.
동진 : 뭐 보고 있었어?
유경 :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봤어?
동진 : 어. 전에.
유경 : 난 저 메릴 스트립 이해가 안가. 왜 저 사진작가를 쫓아가지 않았을까?
동진 : 견딜 수 있다고 생각했나 보지. 사진작가 없어도.
유경 : 그럼 남편은 뭐야..
동진 : 평생 노력하는 걸로 용서받지 않았을까.
유경 : 에이, 그건 말이 안 되지. 사람이니까 마음이 변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속이는 건 배신 아니야?
동진 : 그거는 살다 보면... 아니다. 네 말이 옳아. (어깨 안쪽으로 부인을 감싸 안으며) 네 말이 다 옳다.
유경 : 뭐~ 할 말 있으면 해.
동진 : 행복해?
유경 : 응.
동진 : 그래. 행복하면 됐지 뭐. 우리 행복해지자.
이 드라마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볼 때마다 슬쩍 비추어지는 TV 속 메릴 스트립과 비에 흠뻑 젖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눈빛이 너무 슬프다 못해 강렬했다. 이 영화가 궁금했고, 언젠가 한번 봐야겠다고 마음먹은 지는 이때부터다.
영화가 궁금했던 것은 꽤 오래전이지만, 어쩌면 나의 게으름이 이번에는 잘 맞아떨어졌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나이 서른, 나름의 연애 경험과 다양한 감정을 겪어봤지만 이 영화는 보면서도 끝나고 나서도 알듯 모를 듯 어려운 영화였다.
이 영화는 '불륜'이라는 소재로 만들어졌기에 함부로 미화시킬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쉽게 손가락질하며 비난할 수도 없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도 모르게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서로 사랑하기를 바랐다. 그러면서 마음 한편으로는 내내 불편함을 느꼈다. 괜스레 그녀의 가족들이 생각나고, 도덕적으로는 그녀가 저런 행동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하지만 영화 속 그녀와 그의 눈빛을 봤다면 누군들 그들의 사랑을 추악하고 저급한 불륜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흔히들 결혼 적령기라고 불리는 여자 나이 서른에 나는 결혼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 중 하나다. 내가 결혼을 가장 두려워하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 모두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상대방의 마음이 변할 수도 있고, 나의 마음이 변할 수도 있다. 불확실한 미래 중 가장 두려운 것 중 하나 일 수도 있겠다. 누군가의 마음이 떠나버려 나를 떠나는 일, 혹은 그 반대. 결혼이라는 삶을 유지하기 위해 분명 이 영화 속 메릴 스트립이 인생의 어떤 부분을 포기했듯 그의 남편 또한 그랬을 것이다. 그렇듯 우리 모두는 지키고 싶은 무언가를 위해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 혹은 정말 중요하지만 어쩔 수 없이 포기하는 것들이 있다. 그녀는 몇십 년간 가정을 지키기 위해 어떤 것을 포기했을까? 그녀의 남편은 어떤 것을 포기했을까?
영화 속 프란체스카(메릴 스트립)가 로버트(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될 때, 그녀는 그보다 그 시작이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세계 방방 곳곳을 돌아다니며 홀로 살아가는 그보다 그녀는 그녀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여러 명의 삶의 무게가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이 시작될 무렵 더 적극적이었던 사람은 그녀였다. 그녀의 삶의 무게가 무거웠던 만큼 그녀는 사랑을 원했던 것이다.
다시 연애시대 속 감우성의 대사 한 줄을 보자.
"평생 노력하는 걸로 용서받지 않았을까."
드라마 속 감우성도 노력 중이었고, 메릴 스트립도 결국 그를 떠나보낸 후 평생 남편과 자식 곁을 지키며 노력하는 삶을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난다. 하지만 감우성과 메릴 스트립, 그들은 이미 그들의 마음에 누가 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선택한 삶에 책임을 다 하기 위한 노력만이 그 삶을 유지하고 있었다.
만약에 메릴 스트립이 가정을 버리고 사진작가를 따라갔다면, 그녀는 행복했을까?
나는 절대 행복하지 않았을 거라 본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도 분명 그녀는 가정을 배신했다는 죄책감에 행복을 행복이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옆에 실제로 없으면 당연히 우리는 슬프고, 그리워한다. 하지만 옆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대도 행복하지 않다면 그것만큼 비극이 또 어디 있을까. 어쩌면 그녀는 자신이 덜 힘들기 위한 선택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사랑하는 기간은 고작 4일이다. 말 그대로 딱 '4일'. 누군가는 이해가 안 갈 수도 있다. "4일만 같이 있었는데 저렇게 사랑한다고? 저게 말이되?" 나는 저 질문에 이렇게 답해주고 싶다.
"4일이라서, 단 4일이라서 그런 사랑은 가능했어."라고.
그들이 4일이 아니라, 4개월, 4년, 40년 함께 할 수 있었다면 그렇게 그들의 사랑은 뜨거웠을까? 그들의 사랑은 완벽했을까? 그들의 사랑은 곧 끝날 것임을 알기에 그들은 그 순간 그들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들을 쏟고 또 느낀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 강렬했던 것이다.
영화가 시작할 때쯤 자신의 엄마(메릴 스트립)의 유서를 읽고 그녀의 외도를 이해하지 못했던 남매는 영화가 끝날 무렵, 그들의 엄마를 '한 명의 여자로서' 이해한다. 그리고 엄마의 유언대로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 엄마의 유골을 뿌려준다. 그녀는 죽어서야 그녀가 정말 사랑했던 그 남자 곁으로 갈 수 있었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그녀의 유골 가루가 그녀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그 장소인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 뿌려질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정말 가슴이 아팠다. 살아서는 갈 수 없던 곳, 살아서는 가면 안 됐던 곳, 살아서는 함께 하지 못 했던 사람, 살아서는 함께 해서는 안 됐던 사람, 살아서는 사랑하면 안 됐던 사람. 그곳, 그 사람에게 죽어서야 그녀는 갈 수 있었고 함께 할 수 있었다.
그런 말 있지 않나. '사랑도, 인생도, 운명도 결국은 타이밍'이라는 말.
그렇다. 이 모든 것은 운명이고, 타이밍이다. 내가 지금 이 곳에서 이렇게 살고 있는 것 또한 이전에 모든 타이밍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결과이다. 그래서 더욱 사랑도, 인생도 더 어렵다. 내 의지와 노력으로 완성되는 것은 없기에.
영화 속 프란체스카와 로버트가 만약에 결혼 전에 만났다면 그들의 사랑은 '결혼'을 하며 '해피 엔딩'으로 끝났을까? '결혼' 후에 그들은 끝까지 이렇게 서로를 절실하게 사랑했을까? 그렇다면 '끝까지' 행복해야 그게 바로 '완벽한' 사랑일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프란체스카와 로버트의 사랑은 완벽했다고.
어떤 순간 그 둘이 서로 교감하며 '행복'했다면 그 순간은 완벽하다. 그 순간의 해피엔딩이라고 말하고 싶다.
세상에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사랑은 없다.
그 당시, 그 사람과 나. 이 둘의 관계에서 만들어낸 사랑의 모양은 그 자체로 완벽하다. 내가 정해놓은 사랑의 모양과 다르다고 틀리거나 모자란 사랑이 아니다. 그 사람과 나였기에 가능했던 사랑이었다. 영화 속 그들이 만들어낸 사랑의 모양과 깊이, 길이는 그들이었기에 가능했던 것. 거기까지였고, 죽어서야 함께 할 수 있는 운명 속의 그 둘이었다.
사랑을 두려워하고 있는 (솔로인) 나와 당신에게 감히 말해본다.
우리 모두는 운명과 타이밍에 따라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그러니 사랑이 나타났을 때 겁먹지 말자고.
그 사랑이 생각처럼 화려하지 않고, 대단하지 않더라도 실망하지 말자고.
그때, 그 사람과 나이기에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랑이라고.
그러니 단 4일만 사랑할 수 있을 것처럼 그렇게 사랑하자고.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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