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내자, 우리. 서로의 기억 속에서라도.
한국에 입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작년 12월 중순쯤이었을 거다.
그때까지만 해도 2~3개월 후에 바로 호주로 넘어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하나둘씩 하고 있었다.
그날은 미리 예약해놓은 눈썹과 아이라인 문신을 받으려고 건대입구역 어느 골목길에 위치한 한 샵을 찾아갔다.
시술은 3시간 정도가 걸려서 끝났고 눈이며 눈썹이며 뻘겋게 부어올랐다. 보기 흉할 정도는 아니지만 엄청 펑펑 운 사람 얼굴 처럼 눈이 많이 부었다. 길거리 가게 유리창에 비추는 내 모습을 확인하고는 팩트를 꺼내 얼굴 여기저기 다시 두드려봤는데 영.. 상태가 돌아오지 않는다.
얼른 지하철역으로 돌아가려고 좁은 골목길을 나와 큰 길가로 딱 나왔는데,
눈앞에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아니, 그 뒷모습만 보였다.
정말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순간 누군가의 뒷모습만 보이고 그 주변은 다 카메라 접사 기능으로 날린 것 같이 다 흐려졌다.
저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본건 1년 하고 6개월 만이었다.
그 당시에는 아련하고 먹먹한 감정보다는 퉁퉁 부은 내 얼굴을 그 사람이 볼까 봐 얼른 내 모습을 본능적으로 숨겨버렸다.
그리고 그 사람의 뒷모습은 1년 6개월 전처럼 내 눈에서 서서히 작아지더니 많은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그게 내가 본 그 사람의 가장 최근의 모습이다.
이 공간에 구구절절 자세히 쓸 수는 없지만 그 사람은 예상하셨듯 나의 옛 연인이다.
누구보다 날 사랑해줬고, 그 마음을 알았기에 헤어질 때 난 더 매정하게 돌아섰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현실적으로 다시 만날 수는 없고, 계속 그 사람의 연락을 받아주게 되면 나도, 그 사람도 둘 다 더 힘들 것 같았다.
안다. 이 모든 건 철저히 내 위주였다.
혼자 모든 걸 다 결심하고 혼자 결론짓고, 일방적으로 통보를 했다.
미안한 줄 알면서도 내가 그 마음으로 붙잡고 있는다는 게 더 미안하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의 좋은 기회를 내가 놓쳐버릴 거라 생각했다.
그땐 그게 진심이었다. 그런 줄 알았다.
근데 지금 돌아보니 난 그냥 두려웠던 거다. 그 두려운 마음을 나 스스로를 속여가며 애써 합리화 했던 것이다.
이별 후에도 내 여행은 계속되었고 계획에 없던 호주 워킹 홀리데이까지 다녀오게 되었다.
긴 여행 속 스쳐가는 수많은 인연 중에 서로에게 호감을 느꼈던 상대가 한명도 없었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그런데 여행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만난 인연이라 그런지 길 위에서 만났듯 다시 길 위에서 헤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럴 때마다 내 마음은 더욱 허무해졌다. 사실 호감을 느끼는 그 상대들이 나타날 때마다 가장 먼저 생기는 감정 중 하나는 '두려움'이었다. 사랑이 깊어지고 관계가 무거워질수록 나는 그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또 도망갈 준비만 할 것 같았다. 그때마다 나도, 어떠한 사람도 먼저 용기를 내는 사람은 없었고 결국 모든 인연들은 시작도 못한 채 그렇게 끝나버렸다.
그리고 결국 그 인연들이 나타나고 떠나갈 때마다 오히려 그 사람의 진심과 그 마음이 선명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새로운 사랑으로 다른 사랑을 잊으라고, 아니 그러면 잊혀진다고들 많이 그러더라.
근데 이상하게 이별 후 2년 동안 새로운 사람이 스쳐갈 때면 전 사람의 추억과 그때 그 사람이 준 그 마음이 더욱 그리워졌었다.
정말 정확히 말하자면 그때 그 진심을 받았을 때 느꼈던 내 감정, 그게 그리웠다. 나한테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해줄 수 있었던 그 사람의 진심.
늘 곁에 있어서 받을 때는 몰랐다.
당연한 줄 알았다.
여행하는 내내 내 곁에 있던 '당연함'들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가 살아갔던 비슷하게 반복되는 이 일상 속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이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하고 있었는지,
떠나고서야 그제서야 나는 알았다.
나라는 사람은 늘 늦다.
막상 떠날 때도 잘 모른다. 정말 끝이 나고, 정말 옆에서 없어지고 나서야, 보지 못하게 되고나서, 그제서야 안다.
그게 마지막이었음을.
그리고는 정말 오랫동안 그리워한다.
난 마음을 잘 열지 않는다. 아니 잘 열리지 않는다.
잔 상처가 많고, 워낙 마음이 약한 사람인 것 같다. 그런 가슴이 감당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도 버거워서 늘 마음을 닫는 게 익숙해졌다.
그게 편한 줄 알았다.
근데 여행 속에 나는 그렇게도 문이 자동문처럼 잘 열렸었다. 근데 돌아가 생각해보니 진짜 내 마음의 문이 꽁꽁 닫혔을 때 그때 내 마음을 열었던 건 그 사람이었다.
그렇게 힘들게 내 마음을 열고 들어와서 그런지 쉽사리 내 마음에 문밖으로 보내질 못 하겠다.
어디선가 예전에 어떤 책에서 본 건데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그 전 사람이 잊혀지는 게 아니라 다만 전의 추억이 더 희미해지고 새로운 기억과 추억이 더 선명해지는 것뿐이라고 했다. 아마 이 말이 맞는 것 같다.
기억이란 내 마음대로 지우고, 안 지우고 선택할 수 없다.
다 잊은 줄 알았는데 문득 평범하디 평범한 소주잔이 어느 날은 그 사람을 기억 속에서 기어코 데리고 와 그날 소주를 참 쓰게 만들더라.
기억이란 이렇게 늘 제멋대로다.
며칠 전, 그 사람과 연락이 닿았고 그 사람은 나를 아직도 응원한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가 헤어진 것을 내 탓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그 사람의 문장에는 진심이 있었다. 그래서 미안했고 또 고마웠다.
그리고 난 느꼈다. 이제 정말 그 사람에게서 난 끝난 사람임을. 그 사람에게서 나는 이제 정말 없다는 것을.
다시 시작하는 것을 바란 것은 아니다. 나는 현실적이니까. 아닌 것은 아닌 거니까.
근데 잠시나마 꿈을 꿨던 것 같기는 하다.
짧은 꿈이라 다행이었고 그 꿈에서 바로 깨어났다.
진심 어리지만 담백했던 그 마지막 문자에서 난 느낄 수 있었다.
지난 2년간 그 사람의 하루가, 낮이, 밤이 얼마나 힘들고 잔인했었는지. 그리고 그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견뎌내며 살아갔는지.
난 언제나 늦다.
이제는 내 차례인 것 같다.
나의 낮은 조금 더 뜨거울 것 같고, 밤은 조금 더 길어질 것 같다.
이 글을 그 사람이 볼지 안 볼지는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안 봤으면, 한편으로는 봐줬으면 싶지만 결국은 안 봤으면 좋겠다.
기적을 꿈꾸지는 않지만 단 한 가지만 바란다.
정말 잘 지냈으면 좋겠다.
그 사람의 기억 속에 나도, 나의 기억 속에 그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