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혼 주의? 독신주의?" 30대 어느 솔로의 고백.
한 두 달에 한 번씩 전화로 안부를 전하는 L언니 (이하 '언니')와 나는 보통 한 시간은 넘게 통화를 한다. 우리의 주된 대화 주제는 '미혼인 30대 초반이 갖고 있는 흔한 고민들'이다. 이를테면 '앞으로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결혼을 꼭 해야 하는 건지, 다른 나라에 가서 정착하며 살 수 있을지.. 등'에 대한 내용이다. 우리는 한 살 밖에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 데다가 전반적인 삶의 가치관이 비슷해서 대화가 참 잘 통한다. 하지만 아주 가끔 언니와 내가 의견이 다를 때가 있는데 그건 '연애 이야기'를 할 때이다.
언니는 현재 연하남과 3년 넘게 장거리(해외) 연애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이전에도 솔로였던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고 한다. 결혼은 몰라도, 언니에게는 연애는 '필수'인 것이다. 그런 언니가 보아 온 최근 나의 2~3년간의 자발적 솔로 생활은 이해가 가지 않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언니는 예전처럼 내게 연애를 적극적으로 권장하지는 않지만 자연스레 대화 주제가 연애나 결혼이 될 때면 내게 "이제 그만 좀 사랑을 하라"라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얼마 전 언니는 언니 친구의 아기 돌잔치에 갔다 온 이야기를 했고 자연스레 우리의 대화 주제는 '결혼', '연애'로 흘렀다.
"예전에는 결혼은 필수라고 생각 안 했었거든. 근데 주위에 친구들도 이제 다 결혼도 하고, 아기도 낳고, 그런 모습 보니까 좋아 보이더라. 특히 아기가 너무 예뻐. 나도 슬슬 생각이 바뀌는 건가..? 너 주변에도 결혼 많이 했지?"
"언니, 나 친한 친구들은 결혼을 일찍 해서 이미 다 가고 솔로가 없어. 언니 친구들보다 더 빨리 했을걸? 그리고 거의 다 오래 사귄 남자 친구들도 있어서 결혼식 같은 공식적인 행사에 가면 나만 혼자야.. 요즘은 꼭 가족이나 남자 친구 데리고 오더라."
"아 진짜? 너 외로워서 어떻게..? 네 친구들이 남편이나 남자 친구랑 잘 지내는 거 보면 부럽지 않아?"
"음.. 진짜 솔직히 하나도 안 부러워."
"정말로? 진짜 하나도 안 부러워?"
"응.. 연애하고, 결혼하고, 아기 낳는 거 보면 엄청 대단해 보이지. 아기도 너무 예쁘고, 잘 사는 거 보면 좋아. 근데 부럽지는 않아.. 내가 그걸 하고 싶지는 않아. 아직은.."
"그래? 근데.. 너 이러다가 점점 비혼 주의자 되어가는 거 아냐?"
"아니야. 그래도 나 결혼은 하고 싶긴 한데.. 근데 뭐 모르지.. 어떻게 될지는.."
"하긴.. 나도 지금 남자 친구 있지만 나보다 어리기도 하고 또 해외 살고 있기도 하고.. 결혼은 미지수야. 나 스스로도 우리 둘 사이에 '결혼'이라는 단어를 앞에 두면 잘 모르겠어. 어떻게 보면 네가 현명한 걸 수도 있어. 결혼이나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차라리 시작 자체를 안 하는 게 나을 수도 있어. 이제 나도 연애가 좋은 건지 모르겠다."
의외였다. 연애는 좋은 거라고, 연애는 한 살이라도 어릴 때 해야 하는 거라고, 내게 남자 좀 만나라며 잔소리하던 언니였다. 그런데 갑자기 나와 연애관이 비슷해져 가는 언니의 마지막 한 마디가 한편으로는 씁쓸하게 들렸다.
나는 그게 누가 됐건 나한테 '연애'로 잔소리하는 걸 무지 싫어한다. 누군가는 딱히 할 말이 없어서, 별 의미 없이 "그래서 연애는 언제 하게?", "제발 남자 좀 만나라."라고 툭 던지는 말일 수도 있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상당히 거슬린다. 물론 언니가 내게 장난반, 진심반으로 "이제 그만 쉬고, 연애해야지~"라고 할 때도 그다지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언니의 속마음을 잘 안다. 언니에게 있어서 연애는 일상 속 유일한 낭만이었고, 쉼터였다. 그래서 언니는 '집-도서관'의 무한 반복인 나의 건조한 일상을 걱정했었다. "글 쓰는 일도 연애도 하고, 사랑도 하고 그래야 잘 써지지 않을까?"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아직 결혼도 안 해보고, 아기도 낳아보지 않은 내가 꼭 세상 다 살아본 듯이 건방지게 "결혼이나 육아에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별로 기대되지 않아."라고 말할 때 나는 나와 같은 애늙은이 리액션보다 가끔은 천진난만하게 핑크빛 미래를 속삭이며 '꼭 사랑을 하라고 말하는 사람'이 내 곁에 있다는 게 은근히 좋았다. 나는 겉으로는 '연애', '결혼', '육아'와 같은 삶에 회의적인 척을 해왔다. 하지만 그건 사실 그만큼 '연애', '결혼', '육아'의 삶이 기대된다는 걸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란 사람은 꼭 기대가 클수록 미리 겁부터 먹고, 실망할 준비를 먼저 하고, 마음을 비우고, 그다음에 시작하기 때문이다.
가끔 보면 나는 청개구리 기질이 다분하다. 남들이 "연애해라. 해라" 할 때는 무표정으로 "안돼. 지금 내 처지에 무슨 연애야. 그럴 시간적, 경제적, 그리고 감정적인 여유는 하나도 없어."라고 딱 잘라 말했었다. 그런데 연애 예찬론자인 언니가 연애를 회의적으로 바라보니 왠지 모르게 연애의 장점, 아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연애를 해야 할 이유'들에 대해 말하고 싶어 졌다. 물론 3년 동안 비구니 코스프레를 해왔는지라 언니한테는 말하지 못했지만.
아직 내가 결혼은 안 해봐서 모르겠지만, 연애는 지난 10년간 축적된 다양한 경험들로 그 장단점은 지독하게 학습해서 아주 잘 알고 있다. 일단 연애의 최대의 단점은 '소모한다는 것'이다. 그게 시간, 돈, 감정, 에너지.. 뭐가 됐든 그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것들을 소모해야 한다.
그렇다면 연애의 최대의 장점은? 바로 '생산한다는 것'이다. 둘이 있는다고 어떤 물건이나 돈이 생기지는 않지만, 평생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 '감성'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인 그 둘만의 '미래', 그리고 '꿈'이 생긴다는 것이다.
만약 오늘 밤 내게 '연애의 단점과 장점을 서술하시오.'라는 서술형 시험을 보라고 한다면 나는 (내 체력이 허락한다면) 밤을 새우며 써내려 갈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단점에 대해서는 장점보다 구체적인 예문을 들어가며 구구절절 더 자세히 쓸 수 있다.
그런데 그 답안지에는 하나의 반전이 있다. 길고 긴 단점들을 나열했음에도 불구하고 결론은 단 몇 줄의 연애의 장점으로 결론이 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답안지를 작성한 사람이 연애의 달콤함과 그 중독성을 이미 맛보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어쩌면 언니보다도 내가 더 연애찬양론자 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당장 연애는 안 하기도 하고, 못하고 있기도 하지만 매일 사랑과 낭만을 꿈꾸는 사람이니까. 그런 의미로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간다. 솔로 생활이 길어지면서 내 주변에도 나를 비혼 주의라고 잘 못 아는 사람들이 있던데, 나는 절대로 비혼 주의가 아니다. 그렇다고 필혼 주의는 더 아니다. 그저 나는 결혼 선택주의이다.
아, 아니 나는 낭만주의, 사랑 주의이다.
"그러니까 언니, 나한테 연애하라고, 사랑하라고 계속 잔소리해줘요.
그리고 우리 모두 사랑합시다.
아무리 힘들고 무서워도 또다시 남몰래 사랑을 꿈꾸고, 기다리는 거 다 알고 있으니깐요."
오늘도 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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