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속 이상형을 그저 기다리고만 있던 나에게.
며칠 전이었다. 오랜 시간 침묵을 지키고 있던 내 휴대폰이 아직은 살아있다며 긴 진동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휴대폰 액정 위로는 친구 D의 이름 세 글자가 떠있었다. 서로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D와 나는 지난겨울에 만나기로 했었지만, 그 약속은 코로나 19로 인해 깨졌었다. 그 후로 4개월 만에 전화를 건 D는 나의 안부를 묻고, 자신의 근황을 전했다.
그리고 D는 대뜸 내게 이렇게 물어왔다.
"근데 너 요즘도 연애할 생각은 없는 거야?"
"어? 갑자기 이 시국에 웬 연애? 코로나를 떠나서 지금 이 상황에 내가 무슨 연애야.. 너 알잖아. 나 자리 잡기 전까지는 연애하고 싶지 않다는 거.. 근데 왜 갑자기 연애를 물어봐?"
D와 나는 거리상으로는 멀리 살고 있지만 D는 내가 운영하는 모든 sns의 글을 매번 집중해서 읽어주는 몇 안 되는 심리적으로는 꽤 가까운 친구 중 한 명이다. 그런 D가 솔로 생활 3년을 꽉 채운 (앞으로도 더 채울 것 같은) 내게 연애를 물어본다는 건 이상해도 한참 이상한 일이었다.
곧이어 D는 나의 물음을 전혀 못 들었다는 듯이 또 다른 질문을 내게 툭 던졌다.
"야. 근데 너 이상형이 뭐지?"
"아니, 갑자기 왜 또 이상형을 물어봐? 설마 너 소개팅 이런 거 시켜줄라고 하는 건 아니지?"
"그건 이따가 다 말해줄 테니까 일단 이상형 좀 말해봐 봐. 네가 연애 한지 좀 오래됐어야지. 무슨 스타일 좋아했었는지 기억도 안 나네. 키 크고, 덩치 좀 크고, 또 뭐더라.. 아 맞아. 웃긴 남자! 맞지?"
이어지는 D의 질문은 더욱 뜬금없었지만,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상형'이란 단어에 나도 모르게 그 세 글자와 어울리는 명사와 형용사, 동사들로 내 머릿속을 빠르게 채우기 시작했다.
"내 이상형? 근데 이상형이 무슨 의미가 있나.. 아무튼 말해보라니까 말할게.
일단 외모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 그것보다도 나는 내면이 건강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음.. 그러니까 마음이 따뜻하고, 긍정적인 사람! 그리고 뭐가 됐든 '자기 일'이 있으면 좋겠어. 당장은 수입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다고 해도 자기가 좋아하고 집중할 수 있는 '일'이 있었으면 좋겠어.
아! 제일 중요한 거! 나랑 대화가 잘 통했으면 좋겠어. 같이 대화하다 보면 막 깔깔깔 거리면서 웃기보다 물 흐르듯 흘러가는 자연스러운 대화 있잖아. 그러면서 유쾌하면 더 좋고.
그리고 좀 똑똑했으면 좋겠어. 학력이 좋고, 좋은 회사 다니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은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이 사회에 대해 관심이 많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
불과 2분 전까지만 해도 연애에 관심이 없다며, 이상형이 무슨 의미가 있냐며 한껏 쿨한 척했던 나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이상형에 대한 대답을 하루 전날부터 준비한 듯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상상 속 이상형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또 다른 나만이 휴대폰을 붙잡고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그때 D는 내게 정신을 찾으라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아. 안 되겠다."
이상형을 말해달래서 열심히 설명한 것 밖에 없는데 갑자기 안 되겠다니.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이 상황에 잠시 벙쪄있는 내게 D는 이제야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 작년 여름부터 이직하려고 영어 스터디 해왔잖아. 그중에 한 오빠가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성격도 좋고, 성실하고, 외모도 괜찮고.. 왠지 너랑 잘 맞을 것 같더라고. 그래서 그 오빠한테는 넌지시 내 친구 중에 이런 애가 있다면서 네 얘기를 했는데 호의적이었거든.. 근데 지금 네 이상형 들어보니까.. 아.. 아닌 것 같아. 네 이상형 너무 어려워. 이 소개팅 네가 안 하겠지만 아주 만약에 성사된다고 해도 네가 좋아할 것 같지 않아."
돌아온 D의 대답은 이미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답이었기에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누가 봐도 소개팅을 해주려던 사람이었고, 또 워낙에 소개팅이라는 만남의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 내게 D가 이 말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고민하고 말했는지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신경 써준 D에게 괜스레 미안한 마음에 이렇게 말했다.
"내 이상형이 뭐가 어려워. 원래 모든 사람의 이상형은 만나기 어려운 거 아냐? 그러니까 이상형인 거지. 안 그래? 아무튼 그래도 고맙다. 좋은 사람 보고 내 생각해주는 건 너밖에 없네."
"아니, 네 이상형이 어려운 이유는 따로 있어. 내 주변 지인들한테 이상형에 대해 말하라고 하면 대부분 얼굴, 키, 몸, 옷 스타일, 성격, 하는 일 이렇게 딱 알아보기 쉬운 이야기를 하거든. 그래서 기본적으로 서로 호감을 갖겠다, 아니다 이렇게 대략 예측해 볼 수 있는데 넌 너무 알기 어려운 걸 말해. 하여간 꼭 이상형도 너 같아. 어려워. 어려워."
D는 내게 '어렵다'는 말을 몇 번 더 반복하고 언제일지 모를 다음 만남을 약속하고 통화를 마무리지었다. 그런데 전화를 끊고 나서도 왠지 모르게 내 마음은 싱숭생숭했다. 봄이라서 연애가 하고 싶은 마음에? 아니면 괜스레 D가 소개해주려던 그분이 궁금해져서? 아니다. 돌이켜보니 조금 전에 D에게 말한 이상형이 내가 보기에도 참 어려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세상이 있을까? 있다고 해도 그런 사람이 나를 만날까?
무거운 물음표들을 가득 안고 나는 내가 생각해온 이상형의 조건을 차근차근 곱씹어봤다.
'신체와 내면이 건강한 사람, 자신이 사랑하는 일이 있는 사람, 따뜻하고 밝고 유쾌한 사람, 대화를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는 사람, 이 세상과 사회에 대해 관심이 많고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 (...) '
그리고 나서야 나는 그 이상형의 존재가 어떤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내가 말한 이상형은 바로,
오래전부터 나 자신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 왔던 나에 대한 이상형이었다.
물론 이런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사람이 내가 되는 것 또한 완벽한 이상형을 만나는 것만큼 어렵다. 하지만 내가 그리는 이상형과 같은 사람이 스스로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서 그에 가까워졌다면 분명 그때 내가 만나는 사람 또한 비슷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며 깨달은 진리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어떤 관계일지라도 모든 인간관계는 유유상종'이라는 것이다.
나와 오랫동안 함께 지낸 친구들, 연인 혹은 과거에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사랑을 나눴던 누군가를 떠올려 보면 그들과 나는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성격, 성향, 살아온 환경 등 세부적인 것들은 다를 수 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을 수 있지만 인생에서 차지하는 어떤 큰 부분을 비슷하게 생각했고, 그렇게 살고 있기에 그들과 나는 관계를 맺었던 것이고, 유지했던 것이고, 또 유지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더욱 선명히 보인다. 가장 먼저 내가 해야 할 일은 내가 꿈꾸는 이상형에 부합하는 타인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먼저 그 이상형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D가 내게 말했듯이 "꼭 이상형도 너 같아."라는 말이 느지막이 귓가에 맴돌았다. 아직은 내가 꿈꾸는 이상형과 지금의 나는 다르지만 지금처럼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과 닮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다 보면 스스로의 이상형이 되고, 나와 비슷한 한 사람을 만나는 어떤 날이 오지 않을까.
조금 더 마음에 드는 내가 되어 그보다 더 마음에 드는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는 어떤 날을 그려본다.
오늘도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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