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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한승 Jan 29. 2020

좀 작작 먹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형님이 사랑하는 방법

내가 대학을 다니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 휴학을 하고 액세서리 공장에서 일할 때였다. 화양시장 인근 2층 건물에 공장이 있었고, 직원이라야 10여 명 정도였는데 그중에 4명은 사장의 친척이었다.


하루 종일 독한 화공약품 냄새를 맡으며 액세서리 체를 만드는 것이 나와 박형의 일이었다.

나와 박형이 함께 공약품을 섞어 거푸집에 부은 후 가열 거푸집 모양에 따라  많은 종류의 인형을 만들, 사장은 그것에 대한 채색을 하청 주었고, 채색된 물건이 납품되면 코팅과 포장 과정을 거쳐 시장으로 팔려나갔다.


은희가 회사에 입사한 때는 3월이었다. 집은 고양이라 했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하 바로 취직을 해서 온 것이었다. 통통하니 귀여운 얼굴에 잘 웃는 아가씨였는데 이름이 황은희여서 와 박형은 발음하기 쉬운대로 미스 왕이라고 불렀고, 다른 사람들도 곧 그녀를 미스 왕이라 불렀다.


그 회사에 석이형이 있었다. 석이형은 서른 중반의 노총각이었는데, 회사 창립 멤버였고, 사장의 처남이었는데 친척이라는 이유로 능력과 관계없이 돈과 직결되는 일, 즉 납품이나 수금 같은 일을 맡았다.  우리를 감독하는 일도 석이형의 일이었지만, 화공약품 냄새가 진동하는 생산실에는 거의 들어오는 일이 없었다.


석이형은 결혼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급한 것 같았다.  집안에서 결혼심하게  압박하는 모양이었다. 하루는 석이형이 생산실에 들어와 울먹거리며 "결혼을 못하면 병신이라고 집에서.... 병신이라고 나한테 그러더라고요... 아버지가.... 자식한테 병신이라고 하는 게 말이 돼요?"라고 화가 난 음성으로 말한 적이 있었다. 석이형의 감정을 들여다볼 수 있었던 유일한 경험이었다.


석이형은 결혼정보 회사도 찾아다니는 모양이었고, 거래처 여직원들에게도 집적거린다는 소문이 돌았다.


석이형은 원래 말재주가 없었지만, 여성 앞에서는 더욱 움츠러들었다. 석이형과 대화를 몇 마디 나눠보면 사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은 석이형이 생산실에 들어와 앞뒤 없이  

"유형,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대학이 어디예요"었다.

"아무래도 서울대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자

"나도 서울대 가고 싶은데 몇 년이나 공부를 해야 할까요"고 했다.

지어 낸 이야기가 아니고, 삼십 대 중반의 석이형이 정말 그렇게 말했었다.

엉뚱하고 앞뒤가 없이 그냥 툭 던지는 형의 대화방식은 이해하기 어려워서 여성들이 형에게 호감을 가지기는 어려웠다.


미스 왕 회사에 잘 적응했다. 잘 웃는 것처럼 울기도 잘해서 종종 놀림감이 되었다.

미스 왕이 사장이나 석이형에게 싫은 소리를 듣고 눈물을 흘릴 때 슬며시 가서 "호박에서 진물 난다~."  그러면 울다가도 웃었다. 


한 번은 회사에 소동이 있었다. 의심이 많은 석이형이 생산량과 재고, 납품량을 일일이 조사하더니 누군가 물건을 훔치고 있다고 사람들을 잡았다.


친척들은 일단 제외하고 미스 왕을 비롯한 우리가 의심을 받았고, 입출고 경리를 담당하는 미스 왕을 노골적으로 의심하면서 변상을 하라고 윽박질렀다.

그때 석이형은 여태껏 보아왔던 어리숙하고 착한 그 사람이 아니었고, 정말 매정하고 집요했다.


결국 입출고 기록에 잘못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고, 석이형이 거래처에 납품을 하면서 기록을 잘못한 것이 원인이었다. 석이형은 많은 직원의 마음을 다치게 해 놓고 미안하단 말 한마디도 없이 예전의 그 사람으로 돌아갔다.


미스 왕은 도독 취급을 당한 뒤 말수도 줄고 석이형을 대하는 태도도 쌀쌀맞았다. 석이형이  말을 붙여도 네, 아니오 정도가 고작이었고 아예 말을 섞으려 들지 않았다.


석이형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상대를 도독으로 몰아  마음의 상처를 내고그게 아니면 됐다는 식으로 끝이었다. 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사람을 대했다.


미스 왕은 일이 끝나고 우리와 생맥주라도 한 잔 할 때면 말수가 늘며 수다를 풀었다.  대화 주제로 석이형이 자주 올라왔고, "석이형이 암만해도 미스 왕 좋아하나 봐"하고  농담이라도 하면 미스 왕이 펄쩍펄쩍 뛰며 질색을 했고, 우리는 그 모습이 귀여워 미스 왕을 놀리곤 했다.


9월이 되자 더운 기운이 사라져 일 하기가 한결 수월했다. 석이형이 미스 왕에게 적극적으로 구애를 하는 모양이었다. 거래처에 다녀올 때면 소소한 간식거리를 사 와서 미스 왕에게 건네곤 했다. 그 형이 다른 사람과 어울리거나 타인을 위해 돈을 쓴 적이 없었다.


그런 석이형이 딱 미스 왕에게만 선심을 쓰니 금세 눈에 띄었다. 석이형과 미스 왕의 나이 차이가 열다섯이었고, 게다가 저번에 도독으로 몰려 마음을 상했던 미스 왕은 석이형에게 냉동참치처럼 차고 단단해서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주지 않았다.


석이형이 호떡 서너 개 가지고 와 미스 왕 책상 위에 두면 미스 왕은 고맙다는 말은커녕 석이형이 놓아둔 호떡을 그대로 두고 며칠이건 손도 대지 않았다.


석이형은 그런 미스 왕이 야속한 모양이었다. 여러 달을 그리 공들였는데,  미스 왕은 매몰차게 대할 뿐이니 처음에는 난감했다나 나중에는 서운한 모양이었다.

 

석이형이 폭발한 때는 그 해 가을 어느 날 점심시간이었다. 아무런 전조가 없었다. 그냥  배달 온 음식을 놓고 직원들이 둘러앉아 음식을 나누고 있었다. 물끄러미 미스 왕을 쳐다보던 석이형이 벽력같이 소리를 쳤다.


"미스 왕 뚱뚱한 게 좋아? 날씬한 게 좋아? 날씬하려면 좀 작작 먹어야 하는 거 아니야?" 

앞뒤 없이 터져 나온 소리였다. 그저 직원들이 둘러앉아 밥을 먹는데 그야말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소리였다. 우리도 충격을 받았지만 미스 왕은 놀라서 석이형을 쳐다보다 와락 울음을 터뜨리며 밖으로 달려 나간 후 점심시간이 끝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그림 by 유예린〉


석이형도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점심시간 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산실에 있는 내게 와서 물었다.

"유형, 미스 왕이 왜 울며 나갔어요? 어떻게 해야 돼요?"


밉살스럽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석이형, 여자에게 뚱뚱하다 어쩐다 그러면서 작작 먹으라고 소리치면 여자들이 얼마나 속상하겠어요. 미스 왕 들어오면 미안하다고 그러세요"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 미스 왕이 슬그머니 자리로 돌아왔고, 석이형이 쭈뼛거리며 미스 왕에게 다가갔다. 우리는 모두 숨죽여 석이형게 집중했다.


"미스 왕... 아까 뚱뚱하다 그래서 정말 미안해... 그렇지만... 미스 왕이 뚱뚱하다는 거... 눈 있는 사람은 다 아는 거 아니야?" 그것이 석이형이 미스 왕에게 말 한 전부였다.


미스 왕의 눈이 놀라 왕방울만 해 졌다가 어이가 없어 픽 웃어버렸다.


 한동안 회사에서는 "눈 있는 사람은 다 아는 거 아니야?"라는 말이 유행이 되어 서로 놀려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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