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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한승 Jan 30. 2020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단감

고마웠던 기억

"사람이란 모두 은혜는 모래에 새기고, 원한은 바위에 새긴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자주 하시던 말씀이었다.  

살아보니 맞는 말이었다. 사람의 의지에 따라 되는 문제가 아니라 기억의 속성이 그런 것 같았다. 아주 고마운 일이 아니면 기억은 금세 희미해지고 사라졌다.


직장에서 고객들을 대하다 보면 부당하게 직원들을 핍박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고, 직원들은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 그런 일을 몇 번 겪으면 점점 소극적으로 일하게 되고, 상대를 불신하는 마음이 서서 고객의 눈물조차 불신하게 된다.


나의 경우엔 일을 하다 힘들 때 고마웠던  고객을 떠올리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상처를 주는 고객을 만나도, 좋은 분도 있고, 힘든 고객도 있지 하면서 위안을 받았다.


태백에서 공무원으로 일 할 때였다. 직업병으로 고생하는 분들을 돕는 것이 내 일이었다.  진폐증(석탄 먼지가 폐에 들어가 쌓여 생기는 병) 때문에 많은 분들이 오셨는데, 대부분 나이 지긋한 남자들이었다.


태백은 겨울이 길었다. 4월이라 해도 쌀쌀한 날씨가 이어졌다.  오후 두 시경에 부부로 보이는 노인 분들이 나를 찾아왔다.  남자분이 기침을 심하게 했고, 아내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남자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이.. 옛날에 탄광에서 몇 년을 일하다 포항에 내려가서 그동안 어선 타는 일을 하고 살았는데예.. 자꾸 기침을 해서 병원에 가 보니 진폐증 같다고 노동청 가 보라고 해서 왔습니더." 남자가 기침을 하는 동안 여자분이 말했다.


직업병으로 인정되면 진단을 받는 비용부터 치료비까지 나라에서  보상을 해 주고, 생활비(휴업급여)도 주기 때문에 산재를 신청하려고 찾아온 것이었다.

형식적으로 몇 가지 물어보고, 몇 가지 서류를 준비해 오라고 했는데, 그 준비서류 중에 경력증명이 문제였다.


 60년대에 탄광에서 일했다는 경력증명을 받으려면 일했던 탄광을 찾아가야 했고, 찾아간다 해도 근거자료가 없다며 퇴자를 놓기 십상이었다. 남자가 일했다는 탄광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어 몸이 성치 않은 노인이 그리 찾아가는 것부터 난감한 일이었다.

  

남자는 매우 쇠약해 있었고, 숨이 차 말하기도 힘들어했다. 진폐증에 걸리면 폐 기능이 떨어져 결핵에 걸리는 경우가 많았다. 내 경험에 비추어 남자도 폐결핵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남자에게 그 탄광에서 일할 때 친했던 사람들 이름을 말해보라고 했다. 예전에 일했던 동료들 이름을 기억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기억을 더듬어 몇 명의 이름을 말했다. 컴퓨터로 남자가 말한 사람들의 이름을 조회해 보니 그중에  그 탄광에서 일하다 진폐증으로 치료받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남자가 탄광에서 일했다는 유력한 증거였다.


그 탄광에 전화를 해서 산재업무를 담당하는 직원에게 이 남자의 근무기록을 찾아봐 달라고 부탁을 했다. 30분 정도 지나 저쪽에서 전화가 왔다.  자료를 찾았다고 팩스로 보내주겠다 했다. 고마운 일이었다.


얼마 후 병원에서 그 남자에 대한  검사를 했고 진폐증 심한 폐결핵으로 입원이 필요하다는 결과가 나와서 그 남자는 산재환자로 치료를 받게 되었고 나는 그 일을 잊고 지냈다.


당시 나는 관사에서 아내와 생활했는데, 관사가 여러 채 있어 여러 가족이 한 울타리 안에 살았다.  태백은 여름 나기 좋은 곳이었다. 한여름에도 밤이면 서늘해서 관사 가족들과 평상에 둘러앉아 막걸리라도 한 잔 나누면 흥이 올라와 마주 앉은 사람들과 노래를 불렀다.

  

여름이 지나고 시월도 하순이었다. 태백 통리역에 여객 열차가 지나가고 한 30분 지나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민원을 해결하려는 분들이 열차를 타고 오기 때문에 그런 일이 매일 반복되었다.

   

할머니 한 분이 라면 상자를 들고 사무실에 들어서서 곧바로 나에게 걸어와 알은체를 했다. "쩌번에.. 봄에 우리 남편 진폐증으로 입원이 되서예..." 가만히 보니 봄에 남편과 같이 왔던 그분이었다. "아~! 생각나네요, 남편 분 병환은 좀 어떠세요"하고 인사를 했다.

 

"치료받고 많이 좋아졌어예.. 봄에 너무 고마워 가꼬... 뭘 어떻게 보답할 수도 없고 해서.. 집에 단감나무 하나 있는데 마이  열었기에.. 좀 갖꾸 왔어예..

"댁이 포항 어디셨잖아요?"내가 묻자 할머니가 대답했다.

"멀지예.. 그래가꼬.. 아침에 집에서 버스 타고 기차 타고 그래 왔어예. 그때 너무 고마워 가꼬.."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는 선물이었다.  포항 어느 마을에서 태백까지 거리가 얼마라고 그 단감을 들고 오신 것이었다. 라면 상자 안에는 아무렇게나 생긴 단감이 반 정도 들어 있었다. 먼길 얼마나 무거웠을까?   


그 선물은 내 마음속에 오래 남아있다.  고객 때문에 힘들 때 위로가 되고, 일에 정성을 쏟게 만들어 주고, 후배들에게 두고두고 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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