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에서 승진 욕심이 스믈 거리며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미 다른 사람들에 비해 5년 이상 뒤처진 상황이었고, 무심히 지낸다고 다짐하곤 했는데 늦바람이라도 난 것처럼 마음이 요동쳤다. 김 차장과 소주잔을 나눌 때 내가 승진에 욕심이 없다고 하면 그는 선배님 같은 분이 승진을 해야 후배들이 좋아진다며 아귀 지옥에 뛰어들라 부추겼다. 내가 욕심이 아예 없다면 귀에 들어오지도 않을 말이었지만, 빼꼼히 승진자리를 들여다보는 처지가 되니 솔깃하고 달콤한 소리가 되어 소주와 함께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과부 평생 수절을 해도 한 번 마음을 바꾸면 그동안의 수절한 고생이 물거품이 되듯이 일단 승진에 마음을 두면 그동안 보물처럼 중요하던 자존심이며, 줏대 같은 말들은 뙤약볕에 내놓은 얼음덩이 마냥 순식간에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었다. 승진을 하려면 윗분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주워들은 이야기는 수도 없었다. 술을 좋아하는 상사에게 잘 보이려고 날마다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택시를 잡아 집에 모셔다 주고 회사 근처 사우나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출근하는 차장 이야기며, 국장 사모님이 오페라를 좋아한다는 소리를 듣고 수십만 원 하는 입장권을 상납해서 낙점을 받았다는 뒷소문도 들었다.
평소 알고 지내는 선배와 소주를 나누며 승진 이야기를 꺼내니 "개가 되어야 해, 개처럼 꼬리를 흔들고, 하라는 짓 다 하고.." 아무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선배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한 덕분인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빨리 승진했고 항상 요직을 차지했다. "믿기 어렵겠지만 말이야, 난 마누라까지 동원했어, 윗분과 사모님을 모시는 식사 자리를 마련했는데, 여의도 육삼 빌딩 제일 비싼 식당이었지.. 사모님만 나오면 좀 어색할 거 아니야.. 그래서 부장 마누라들 다 나오라 했어. 그 정도는 해야 개처럼 충성했다 할 수 있지.." 선배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려니 역시 승진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싶었다.
몇 년 전 연말에 회사 내 동향 모임이 있어 참석한 적이 있었다. 술자리 상석에는 동향 사람 중 회사 내에서 직위가 가장 높은 분이 자리를 잡고, 맞은편에는 그다음으로 높은 분, 이런 식으로 회사 내에서의 서열에 따라 자리를 잡은 후 술잔이 어지러이 오갔다. 그 후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다른 지역 사람들은 똘똘 뭉쳐서 밀어주고 당겨주는데, 우리 지역 사람들은 그런 일을 잘 못한다며 독려인지 질책인지 알기 어려운 주문이 이어졌다. 그 후 여러 해 동안 그런 모임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었다. 동호회 건 지역모임이던, 같은 부서 회식이건 주제는 늘 승진이었고, 모임에 많이 참여할수록 승진에 대한 압박이 높아졌다.
그런데 "인디언 썸머"처럼 늦게 마음이 동해서 이리저리 기웃거리는 처지라니.... 승진 욕심으로 마음이 채워지니 상사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에 하루에도 몇 번씩 천국과 지옥을 오르내렸다. 일단 고향 선배이자 옆 부서 국장을 찾아 동향 모임에 소홀했던 일 미안하다고 사과라도 해야지 싶어 빈 결재판을 들고 쭈뼛거리며 인사를 했다. 역시 선배는 냉랭하니 나왔다. "사람이 자기 욕심 차릴 때만 얼굴 내 밀고 그러면 쓰나?" 낯이 화끈거려 그 자리에 더 있을 수가 없었다.
명절이 다가오니 걱정이었다. 승진 경쟁자들은 어렵사리 상사의 주소를 알아내 과일상자라도 보내는 모양이었다. 아내도 선물을 준비할까 몇 번 물어보는 것을 보니 상사에게 선물을 하라는 압박이었다. 맨날 혼자 일 다 하는 것처럼 다니면서 승진은 하지 못한다며 속상한 소리를 하는 아내였다.
국장은 "일은 다 거기서 거기야, 난 일 잘하는 사람보다 나한테 잘하는 사람이 더 좋아"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속이 빤한 일이었다. 결국 아내에게 건강식품 큼지막한 것으로 하나 준비하라고 했다. 어쩌면 그것부터 잘못된 선택이었다. 명절을 코앞에 두고 선물로 보이는 물건을 들고 회사에 나타나면 사람들 눈에 드러나는 일이었고, 눈치 빠른 사람들은 상품권이니 뭐니 주고받기 편한 선물을 준비했을 것이었다.
같은 엘리베이터에 미화원 아주머니가 청소를 하고 있었다. "아주머니, 명절인데 이거 받으세요." 하며 들고 있던 선물을 건네니 놀라 눈이 커지며 좋아하셨다. 나도 뭔가 아쉽지만 후련했다. 어차피 내 주변머리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며칠 후 김 차장과 막걸리를 나누며 그 이야기를 했다. 후배는 딱하다는 듯이 입맛을 쩝쩝 다셨다. 막걸리 잔을 들고 건배를 한 후 단숨에 쭈욱~ 소리가 나도록 넘겼다..
"나 있잖아.. 하마터면 기도 할 뻔했어. 그 선물 윗사람에게 드릴 수 있게 용기를 달라고 말이야" 후배와 나는 같이 픽! 웃고는 거나하게 막걸리를 나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