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날, 임산부로 오해받다'

눈물 대신 치킨, 그리고 작은 해방감

by 설리아

인공수정이 또 실패했다.
병원 복도에서 그 말을 들은 순간, 발밑이 푹 꺼지는 느낌이었다.

“아쉽지만 이번에도 착상은 되지 않았어요.”
의사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지만, 내 귀에는 날카로운 메스처럼 들렸다.
나는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안쪽 어딘가에서 뚝, 하고 금 가는 소리가 났다. ‘이번엔 될 것 같았는데’라는 근거 없는 기대가, 그 자리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집으로 바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날은 수업이 있던 날이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을 학생 생각에

어쩔 수 없이 지하철을 탔다.
출근 시간도 아닌데 유난히 자리가 없었다.

문 옆 기둥에 어깨를 붙이고 서서, 가방 끈을 한 번 더 움켜쥐었다. 사람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각자의 작은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누군가의 손가락은 빠르게 스크롤을 내렸고, 누군가는 이어폰을 만지작거렸다. 내 쪽을 보는 눈은 하나도 없었다. 아니, 보지 않으려는 눈처럼 느껴졌다.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을 훔쳐보았다. 평소보다 창백했고, 눈 밑은 살짝 푹 꺼져 있었다. 그 모습이 더 나를 위로하지 못했다. ‘오늘은 그냥 조용히 넘어가자.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속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날카로운 목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튀어나왔다.
“어머, 임산부가 서 있으면 어떡해! 자리 좀 양보해요!”

찰나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임산부? 누구? 어디?
본능처럼 주변을 훑던 시선이, 결국 나를 가리키고 있음을 알았다.

정면에 앉아 있던 학생이 허둥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몰려왔다.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채,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앉았다. 무릎을 다소곳이 붙였지만, 그 동작조차 내 배를 더 도드라지게 만드는 것만 같았다.

사실 내 배는 인공수정 호르몬 주사를 맞으면서 부작용으로 배에 복수가 차고, 살이 불쑥 올라와 임산부의 배처럼 보였다. 그날따라 더 불룩해 보였을 거다. 웃기지도 않은 아이러니였다. 임신을 간절히 원하다 실패한 사람에게, ‘임산부’라니.

이게 무슨 블랙코미디인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감정이 엉켜 목구멍에서 막혔다. 그 아주머니의 '호의 섞인 호통'이 나쁜 의도는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이상하게 더 아팠다. 내 안쪽의 쭈구리 자리를 정확히 건드린 느낌. 그때의 나는 ‘괜찮아요’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숨이 가빴다. 크게 들이마시면 배가 더 불룩해 보일까 봐, 얕게, 더 얕게 숨을 쉬었다. 지하철은 덜컹거리며 다음 역으로 들어갔다. 터널 속 검은 벽이 유리창을 타고 , 내 얼굴을 잠깐 훔쳐갔다. 그 순간, 나는 바닥의 신발 끈들만 바라보았다. 누구의 끈은 잘 묶여 있었고, 누구의 끈은 풀려 있었다. 하필 오늘, 왜!!!

그날 나는 정말 웃기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그냥 멍했다.
웃음과 눈물이 동시에 목까지 차올랐지만, 어느 쪽으로 흘려보내야 할지 길을 잃었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광고판이 번져 보였다. 오늘따라 ‘행복’, ‘새로운 시작’, ‘기대’ 같은 단어들만 보이고 또 빠르게 지나갔다. 그 단어들이 오늘만큼은 나를 비켜가는 것 같았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치킨을 시켰다.
허기를 달래려는 건지, 마음의 구멍을 음식으로 메우려는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주방 테이블 위에 콜라를 쿵 내려놓고, 뚜껑을 돌리자 ‘칙’ 하는 소리가 났다. 첫 모금이 목을 타고 내려갈 때, 눈물이 같이 내려갈 뻔했지만 꾹 참았다. 지금 터지면 정말 무너질 것 같았다. 그래서 더 더 더!! 꾹. 참았다. ‘오늘만은 무너지지 말자. 적어도 지금은.’

치킨이 도착했다는 벨이 울렸다. 상자를 열자 뜨거운 김과 함께 익숙한 향이 확 올라왔다. 그 향이 이렇게 위로가 될 줄은 몰랐다. 종이 포일을 젖히고 닭날개를 집었다. 양념이 손끝에 묻어 끈적했다. 양념 묻은 손가락을 한 번 입에 넣자, 뜨거움과 매콤함이 미묘하게 아팠다. 이상하게 그 감각이 안심이 됐다. ‘그래, 적어도 지금은 뜨거운 걸 느낄 수 있네.’

닭날개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바삭한 소리, 뒤이어 밀려오는 달큰하고 매콤한 맛. 입안이 바빠지자 마음이 잠깐 조용해졌다. 씹는 리듬이 일정해지니, 그제야 생각이 조금 정리됐다. 오늘 일은 오늘로 끝내고 싶었다. 누구의 시선도, 누군가의 설명도, 내게 필요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벨이 두 번 울리고 통화가 연결됐다. 목소리가 떨릴까 봐 숨을 한 번 고르고, 단숨에 말했다.

“오빠, 나 인공수정 더 안 할래.”

잠깐의 정적. 아마 오빠는 적당한 위로 문장을 찾고 있었을 것이다. ‘괜찮다’고 말할까, ‘다음에 다시 해보자’고 말할까... 그 짧은 침묵이 길게 느껴졌다. 그러고는 아주 단순한 대답이 돌아왔다.

“일단 치킨부터 먹어. 식으면 맛없어.”

그 말이 괜히 웃겼다.
울컥하던 마음이 스르르 가라앉았다. 역시 남편은 타이밍을 안다!! 위로가 꼭 정답을 제시해야 하는 건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다. 때로는 정답 대신 ‘지금, 여기’가 필요할 때가 있다는 걸.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건 내일의 계획이 아니라, 오늘의 한 끼라는 걸.

잠시 말을 멈추고, 나는 콜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기포가 혀끝을 톡톡 건드렸다. 다시 닭날개를 집었다. 손끝에 묻은 양념을 냅킨으로 닦다가, 괜히 손가락을 한 번 더 빨았다. 그 장난스러운 동작이 스스로 우스워서, 코끝으로 짧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오늘의 나에게 허락한 유일한 장난이었다.

그래서 나는 진짜로,
일단 치킨부터 먹었다.
뜨거운 닭날개 하나, 콜라 한 모금.
그날의 결론은 단순했다. '먹고, 숨부터 돌리자.'
그걸로 그날은 끝났다. 그리고 몇 개월에 걸쳐 노력했던 인공수정도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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