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로버트 단턴
로버트 단턴의 '책과 혁명'은 프랑스혁명 직전 전제 군주정(=앙시앵 레짐) 시기의 금서목록들을 정립하고 거기서 사회적/문화적 통찰을 통해 문학이, 책이 어떻게 프랑스혁명에 영향을 끼쳤는지를 탐구할 수 있는 서적이다. '고양이 대학살'을 읽어본 사람들에게는 친숙한 이름. 먼저 고백하자면 나는 이 책을 완독 하지는 못했다. 대략 절반 정도만 읽고 포기. 2가지 변명거리가 있다.
1. 주제의 적합성. 얼마 전 당통의 죽음을 읽었지만 아직도 딱히 프랑스혁명의 정치사-문화사에 큰 관심은 없는 상태. 그래서 더 재미가 없었다.
2. 570p정도 되는 압도적인 분량.
이 1과 2의 벽 때문에 절반 정도를 읽고 포기해버린 책. 단턴은 굉장히 훌륭한 연구자의 자세로 어떻게 본인이 '금서'의 목록을 수집했는지, 그리고 그 목록이 어떻게 한계를 갖고 그럼에도 보완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고, 그래서 어디까지 주장할 수 있는지를 정말 치밀하게 서술한다. 스스로가 연구한 표본이 대표성을 갖는 부분/갖지 못하는 부분에 대한 성찰은 물론, 금서의 범주를 나누는 데에도 엄청나게 긴 단서를 달아둔다. 25년을 꼬박 연구한 결과물이니 그 무게감이란... 내가 프랑스혁명 시기의 문화와 문학에 흥미가 있었다면 즐겁게 읽어냈을 훌륭한 책인 것은 확실하다. 넓은 주제를 대강 다루는 책보다는 이런 종류의 책을 더 좋아하지만, 그것도 내가 흥미가 있는 주제일 때에야 가능한 것 같다고 새삼 느꼈다.
위와 같은 한계에도 단턴의 금서의 문화사/사회사에 대한 연구에서 흥미로웠던 부분이 많다. 책은 역사적 흐름에 영향을 받는다. 동시에 책은 정보 혹은 사상을 전파함에 따라 역사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렇다면 프랑스혁명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에도 영향을 끼친 책이 있을 것이다. 자연스레 따라 나오는 질문. 어떤 책이 프랑스혁명 시기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미쳤는가?
이에 대해 현재의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답변은 '우리가 현재 아는 그 당시의 서적'들 중에서 떠올릴 수밖에 없다.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볼테르의 서적들이 그러하다. 그러나 단턴은 '책과 혁명'에서 그 당시의 베스트셀러와 현재까지 남아있는 고전들의 목록이 일치하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밝힌다.
당시 대중이 '체험한 책'의 목록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많이 다르다. 피당사 드 메로베르, 테브노 드 모랑드, 구다, 드 포 등등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전혀 모르는 작가들 투성이다. 실제 당시 유행한 금서들의 목록을 보면 포르노그라피로 분류될 수 있는 책이 12~20%에 달한다. 나머지 중 많은 부분은 다시 정치적 중상비방문에 속한다. 이런 책들은 직접적으로 프랑스혁명을 예견하거나 끌어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앙시앵 레짐의 정통성과 당대 규범들에 반항하면서 그 흐름을 간접적으로 이끌어 낸다. 음행을 일삼는 수도원장과 수녀의 이야기. 귀족들의 추문과 중상모략, 무신론이 가득한 금서들은 당대의 권력들을 끌어내리지는 못해도 그들과 대중의 거리를 확 좁혀준다. 이런 거리 좁힘이, 끌어내려진 정통성과 줄어든 높이차이는 간접적으로 프랑스혁명이 일어날 토대를 만들어주었다.
이런 흐름에 따라 내가 내린 거친 결론은 다음과 같다.
1. 지금까지 내려오는 고전들의 역사적 영향력은 과대평가되어 있을 수 있다.
2. 지금은 잊힌 많은 책들이 당대에 끼친 영향은 과소평가되어있을 수 있다.
3. 한 시대의 금서목록에서 당대 문화사/생활사를 엿볼 수 있다.
4. 그 금서목록에서 당대뿐 아니라 다음 시대의 문화/생활사를 엿볼 수도 있다.
책을 완독 하지 않아 그 세부적인 작품이나 뒷부분에 대한 내용은 고려하지 못했음을 다시 한번 고백한다. 그럼에도 이 정도 결론에서 뻗어나간 생각이 있어 글을 남긴다.
2021년 한국에서 금서라는 개념은 사실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러나 현대에는 책만큼이나, 아니 책보다도 더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자주 활용되고 파급력이 강한 매체가 존재한다. 동영상이다. 단턴의 '책'을 '동영상'으로 바꿔보면 어떨까. 이것은 분명히 비약이지만, 동시에 흥미로운 개념이기도 하다. 책을 영상으로 바꾸어서 위의 4가지 결론을 바꿔 써 보면 다음과 같다.
1. 지금까지 내려오는 동영상들의 역사적 영향력은 과대평가되어 있을 수 있다.
2. 지금은 잊힌(혹은 추후에는 잊힐) 많은 동영상들이 당대에 끼친 영향은 과소평가되어있을 수 있다.
3. 한 시대의 금지된 동영상 목록에서 당대 문화사/생활사를 엿볼 수 있다.
4. 금지된 동영상 목록에서 다음 시대의 문화/생활사를 엿볼 수도 있다.
1번은 아직 영상들이 '고전'으로 분류되기에는 영상매체가 주류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냥 넘어가 보자.
2. 지금은 잊힌(혹은 추후에는 잊힐) 많은 동영상들이 당대에 끼친 영향은 과소평가되어있을 수 있다.
2번을 보면? 2번을 '미래에는 잊힐 많은 동영상들'이 당대에 끼친 영향력으로 읽어보면 조금 흥미롭다. 영상들에서 베스트셀러 책의 위상을 유튜브 인기순위로 치환해도 그렇게 무리는 아닐 것이다. 아래는 2019년 유튜브 인기 동영상 Top 10이다.
이 중에 어떤 영상이 계속해서 20년, 30년, 50년 뒤에도 회자될지는 1번의 영역이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런 베스트셀러(베스트 영상)의 리스트가 우리에게 미친 영향이 (비록 30년 뒤에 회자되진 않을지 몰라도) 생각보다 작지 않을 거라는 것이다. 영상들은 시대상에 크게 영향을 받지만, 그 자체로 시대의 흐름에 영향을 끼친다. 라면과 간단 요리 영상은 (우리가 생각하기보다 더) 라면과 간단 요리에 대한 선호에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 미스 트롯의 영상은 그 자체로 미스 트롯이 미스터 트롯, 미스 트롯으로 뻗어나가게 했을지 모른다. 기업에서 조회수가 많은 영상들로 트렌드를 읽어내고, 실제로 그에 걸맞은 상품/서비스를 제공하거나 관련한 채널들에 광고를 집행했을 수 있다. 뇌내 망상에 불과한 이런 아이디어를 검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나, 이 영상의 영향력은 현재의 우리가 생생하게 느끼고 있다.
3. 한 시대의 금지된 동영상 목록에서 당대 문화사/생활사를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금지된 영상은 어떤가? 실제로 유튜브에서 금지된 영상들의 목록을 찾는 것들은 거의 불가능했다. 대신 어떤 종류의 영상들이 금지가 되어야 하는지, 금기시되는지에 대해서는 쉽게 알 수 있다. 포르노그라피다. 정부 혹은 사회에서 금기시되는 영상들은 그 유통경로나 영상의 성격들이 '구체적으로' 금지된다. 2019년~2020년 한국을 뒤흔들었던 n번방 / 박사방 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가학적이고 비인간적인 범죄였는지와는 별개로 그 '금지된 영상물'들이 거래되던 방식은 '책과 혁명'에서 뇌샤텔 출판사(단턴이 주요 자료로 활용한 18세기의 출판사)와 서적 소매상들 사이의 거래와도 비교해볼 수 있다. 그 둘은 은밀하게 거래되고, 구성원들 간에 공유되는 비밀스러운 소통체계가 있었으며 적발 시 대가도 가혹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서적 도매상들은 출판업자-소매상들 사이에서 '철학책 목록'이라는 암호화된 리스트를 몰래 숨겨 정보를 공유했다. 금서들을 운반할 때에는 위험선호 정도와 비용에 따라 직접 국경을 넘나드는 운반꾼을 사용하기도, 평범한 서적들 사이에 숨겨 국외에서 들여오기도 했다. 도매상과 소매상 사이의 거래는 주로 책의 장수를 기준으로 금서 1장당 일반 책 2장과 같은 식으로 거래되었다. 언젠가 잡힐 위험을 무릅쓰고 금서를 출판하는 곳도 있었고, 그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려 직접 출판을 거의 하지 않는 도매상 겸 출판업자도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그 당시 금지된 것들이 거래되는 아주 구체적인 양상을 관찰하고, '그런 위험에도' 거래된 금서들에서 앙시앵 레짐의 권위가 무너져 가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2020년 성착취 사건의 범죄는 추적이 어려운 텔레그램을 매개로 소비자(이용자)와 공급자(착취 영상 제공자)를 연결했다. 그들은 자금 추적을 피하기 위해 암호화폐를 결제수단으로 택했고, 텔레그램에서 수요를 파악하여 영상을 공급했다. 공급될 영상은 각종 SNS를 활용해 모은 피해자들을 통해 만들어냈고, 피해자들을 학대하면서도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피해자들을 협박했다. 여기에 멈추지 않고 그 카르텔의 소비자까지 협박하고 학대하며 이 범죄를 은닉했다. 우리는 공권력의 수사 덕분에 여기서 이런 금지된 영상들이 거래되는 구체적인 양상을 관찰할 수 있었고, 마찬가지로 '그런 위험에도' 거래된 영상들에서 이 시대의 도덕관이, 공권력의 통제력이 어떻게 상실되어가지를 관찰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이 처벌되는 것을 보면서 우리 시대의 생활사/문화사를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
N번방의 사례가 너무 특이한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단편적인 사건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 시대의 금지된 영상, 포르노그래피가 유통되는 방식들에서 문화사적/생활사적 관찰은 가능하다. 대부분의 성인 영상을 유통하는 웹서비스들이 계속해서 차단당하면서 번호를 바꿔가며 운영하는 것, 그런 것들을 은밀하게 알리는 루트로 SNS가 활용되는 점을 관찰할 수 있다. 추적을 피하기 위해 해외에 서버를 두고, 딥 페이크 영상들의 피해에 대한 염려가 뉴스로 나온다. 누구나 알만한 Celebrity의 존재가 전제되는 이런 딥 페이크 영상은 우리 시대의 연결이 얼마나 발달해있는지, 또한 그에 따라 욕망이 어떻게 뒤틀려있는지를 관찰할 수 있게 한다. 이뿐인가. 소비자에게 무료로 금지된 영상을 제공하면서 불법적인 도박 사이트 등에서 광고를 받아 수익을 창출하는 그들의 비즈니스 운영 모델도 이 시대 플랫폼 비즈니스 모델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이 금지된 동영상의 유통에서 플랫폼 비즈니스 모델은 훨씬 더 빠르게 발달했을 수도 있었겠다.
4. 금지된 동영상 목록에서 다음 시대의 문화/생활사를 엿볼 수도 있다.
3번에 대한 불편한 논의를 지나 우리는 금지된 동영상들의 종류와 그 유통에서 다음 시대의 문화/생활사를 예측해 볼 수 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런 금지된 영상의 유통에 대부분 수반되는 온라인 도박에 노출될 것이며, 더더욱 금기시되는 영상들은 추적이 더욱 어려운 암호화폐로 거래가 될 것이다. 익명성을 보장하는 SNS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더욱 발달할 것이고, 그 영상의 위험이 커짐에 따라 더 많은 비용을 영상의 소비자들에게 지불하게 할 것이다. 초상권은 점점 더 위협을 받게 될 것이고 이에 따라 그 처벌이 더 강해 지거나 초상권의 개념이 재정립될 것이다. 초상권을 보호해주는 서비스나 상품들이 더 개발될 수도 있고 적어도 초상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이 더 광범위하게 퍼질 수 있을 것이다. 왜곡된 성인식은 지금보다 더 쉽게 퍼져나갈 것이고, 이는 어쩌면 연애와 결혼에도 영향을 끼칠지 모른다. 비약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마냥 뜬구름 잡는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지 않은가.
금지된 영상의 목록과 그 유통에서는 미래의 문화/생활상을 예측해보는 것은 우울하다. 하지만 '금지되었음에도 유통되는' 영상의 생리를 이해할 때 우리는 그것을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끌고 나갈 노력이라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내 멋대로 읽어본 단턴의 책과 혁명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