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나'의 시간들

시가(媤家)에서의 시간

by 수진

곧 후쿠오카에 착륙을 준비한다는 기내 방송이 나온다. 조금씩 마음에 익숙한 기운이 스민다. 좀 더 파고들면 편안함과 안심이 섞인 마음임을 알 수 있다. '이제 집에 가는구나. 집에 가자.'


며칠 글을 쉬면 금방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고 삶을 겪는 감각이 둔해지는 느낌이다. 머릿속으로라도 글을 쓰는 일을 쉬지 않으면, 몸으로 글을 쓰는 행위를 하지 않아도 컴퓨터 앞에 앉으면 오래지 않아 다시 쓸 수 있는데 생각의 글조차 놓아버리면 감각이 그것을 빠르게 알아차려 막을 새도 없이 희미해져 있다.

달리기도, 운전도, 글 쓰기도... 의지를 요하는 특정 감각들은 장시간 그 일을 해왔어도, 쓰지 않으면 금방 퇴화한다고 생각하니 서글프다. 글을 쓰는 감각이 희미해지고 머릿속이 비어버린 것 같아 그 감각을 다시 불러오기 위해 달리고 글을 쓰고, 다시 달리고 다시 글을 쓰고 있다.

어떠한 일을 계기로 잠시 한국에 나가 시가 식구들과 연휴를 보냈다. 짧은 시간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니 몸의 피로는 물론 정신적 에너지 소모가 상당하다.

결혼한 이후 이제까지 결혼 생활을 하고 있지만, 결혼에 대해서는 아직도 모르겠다. 앞으로도 잘 알지 못하고 굳이 알고 싶지 않을 확률이 크지만, 속해온 세계와는 다른 새로운 세계가 하나 열린다는 사실은 알겠다. 몸담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수만큼 다양하고 고유한 새로운 세계가.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는 '이방인(異邦人)'이라는 단어에서 '나라'의 개념을 '집안'으로 축소해서 생각하면 결혼도 이방인이 되는 것과 일정 부분 견줄 수 있다. 결혼을 하며 나는 남편의 원가족들과 친척들의 세계에서 이방인이 되었다. 아직도 적응 중이고, 사실은 완전한 적응과 동화됨을 원치 않는 이방인, 설령 시간이 많이 흘러 이방인의 정체성이 희미해진다 해도 그 과정이 부자연스러움이나 누군가의 권유가 아닌 스스로의 의지로 원하는 시간에 익숙해지기를 바라는 이방인. 나는 그런 이방인이 되었다. 시가에서 보내는 시간 동안 그것이 나의 여러 가지 정체성중 하나라는 생각을 했고, 평소에 거의 꺼내보지 않았던 그 정체성으로 지내던 시간이었다.

이방인의 정체성조차 부인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애초에 나의 자리가 없던 곳에서, 나의 자리를 새롭게 만들며 그곳에 머무는 일은 에너지 소모가 많은 일임은 분명했다.

결혼으로 인해 타인이 한순간에 가족이 된다 해도, 자주 만나지 않아 아직도 낯선 친척들과의 만남은 어색할 수밖에 없다. 그 어색함에 혼자 있다 보면 다른 상상을 한다. 카페에 가서 책을 읽는 상상을. 그 시간이 더 즐겁지 않을까 라는 가치판단을 하며 머릿속으로 생각을 키워가다가 이내 상냥한 누군가의 부름으로 함께 대화 속으로 들어간다.

대화를 통해 나는 새로운 인생들을 만난다. 한 번도 나의 삶에는 등장한 적이 없던 유형의 사람들을.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시대와 삶의 모습들은 들으며 때로는 흥미를 느끼고, 몸담아 보거나 구체적으로 상상해 본 적이 없는 직업 세계의 이야기들에 새로운 배움을 얻는다.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그리워하다가, 이 자리에서 들을 수 있는 세계와 배움을 흡수하기로 마음먹는다.

하루에 흡수할 수 있는 배움의 한도도 초과하고,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 틈에서 버티는 에너지도 한계에 이를 즈음 모두 자리를 마무리 짓고 돌아갈 조짐이 보인다. 집에 가서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한국에 집이 없는 나는 이번에는 시가로 향한다. 의식이 조금 깨어있는 상태로 휴식을 취하고, 그렇게 며칠간 시간을 보내다 보니 슬슬 한계가 찾아온다. 특별히 힘든 일은 없다. 다만 나는 나의 시간이 그립다. 몹시 그립다. 잠깐 시간을 내서 혼자 서점을 다니고, 남편이랑 영화도 보며 시간의 틈을 찾아내 '내가 알던 나'를 위한 시간을 쓴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갈 시간이 된다. 불편한 부분도 많지만, 함께 해야만 얻어지는 것도 있고 그것에 관한 필요성을 인정하고 나는 이전과는 조금 다른 내가 되어 다시 나의 세계로 돌아온다.

왠지 조금 더 따뜻해 보이고, 안락해 보이는 나의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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