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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Jan 12. 2024

어느 저녁, 짧은 여행

'나의 세계'를 벗어나 일본 현지에 다녀오다.

 아이와 둘인 저녁이었다. 마음이 좀 적적해서(寂寂하다, 조용하고 쓸쓸하다.) 집에 있고 싶어 하는 아이를 설득해 저녁도 먹을 겸 바깥에 나갔다. 일관적이지 않은 양육방침을 가진 나는 적적함을 이유로 관대함을 발휘해, 불과 하루 전 장난감을 산 아이가 추가로 갖고 싶어 하는 장난감을 하나 더 사주고 전부터 염두에 두었던 '라멘집'으로 향했다. 저녁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이유도 있지만, 새로운 장소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겨울은 오후 6시만 되어도 금세 어두워져 바깥은 늦은 밤 같았다. 일본은 치안이 안전한 편이지만,  아이가 아직 어리기도 하고, 어두워지면 길에 인적(人跡)이 많지 않아 어두운 시간에 동네를 돌아다니는 것은 낯선 일이었다. 그 시간 그곳은 실제로 내게 낯선 곳이었다. 겨울밤 이렇게 이 길에 불빛 장식이 되어 있는지도 그날 처음 알았다. 처음 보는(?) 동네의 밤길을 누비며 이곳에 살기 시작한 후로, 오가는 길에 보기만 했던 라멘집에 마침내 찾아갔다.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순댓국'냄새보다 더 진한 일본 라멘 육수의 냄새가 확 밀려와 잠깐의 순간 빠르게 후회했다. 혹 입에 안 맞아서 먹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되었지만, 오늘은 이곳에 오기로 하고 온 것이니 망설임을 바로 떨치고 들어갔다. 중년의 남자분 혼자 운영하는 곳이었고, 주방을 둘러싼 10석 남짓한 카운터 석만 있는, 메뉴는 라멘과 볶음밥뿐인 말 그대로 '라멘집'이라는 본분에 매우 충실한 집이었다. (참고로 일본 식당의 좌석의 종류는 카운터 석과 테이블 석으로 나뉜다.) 아이는 카레라멘과 볶음밥 작은 사이즈, 나는 매운 라멘을 주문해 가게 제일 안쪽 카운터 석에 앉았다. 

좋아하는 일본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오래된 가게

 보통 일행들과 함께 식당에 가면 늘 테이블석에 앉지만, 개인적으로는 요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카운터 석을 선호하는 편인데 고민의 여지없이 그날은 카운터 석에 앉을 수 있었다. 오랜 시간 무언가를 해온 누군가의 능숙한 몸놀림을 지켜보는 것은 언제나 흥미로운 일이다. 아이는 방금 산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나는 주인이 부담스럽지 않도록(그분은 내가 보는 것을 알아도 부담스러워할 성향의 사람은 아님이 느껴졌지만, 내가 보고 있는 것을 주인이 알까 봐 내가 부담스러웠으므로.) 슬쩍슬쩍 그의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잘 모르지만, 느낌으로 알았다. 고수의 손놀림 일 것을. 먼저 볶음밥부터 만들었다. 냉장고에서 미리 다져둔 야채(대파, 양파 등)를 꺼내고, 밥알이 각각 기름에 코팅되도록 센 불에서 한 손으로 휙휙 웍질 해가며 어렵지 않게 볶음밥을 만들어 내주었다. 작은 사이즈를 시켰는데(350엔, 한국돈 약 3,200원) 이렇게 주시면 남을까 싶게 맛있고 푸짐한 볶음밥이 나왔다. 요청하기 전에, 두 사람임을 감안해 수저 두 개와 앞접시를 챙겨주는 센스까지 겸비하신 분이었다. 일련의 과정들이 대부분 묵언(默言)으로 이루어져 상상 속 고수라 짐작한 그의 이미지에 전문성이 더해갔다.

작은 사이즈 볶음밥. 생각보다 훨씬 푸짐했다.

 센 불에 빠르게 조리해 낸 볶음밥은 맛있었다. 짜지 않고 간도 적당했다. 아이와 볶음밥을 조금씩 떠먹고 있는 동안 이번에는 라멘을 끓이신다. 큰 솥에 장시간 끓이던 진한 돼지뼈 육수에 소쿠리에 담은 1인분의 면을 1-2분 정도 빠르게 익힌 뒤, 작은 냄비를 이용해 두 가지 라멘의 세부 조리에 들어간다. 육수와 면, 카레가루를 넣은 카레 라멘에 이어 육수와 면, 매운 양념을 넣은 매운 라멘을. 고명으로 대파와 김, 차슈를 얹어 완성하는 전체의 과정을 미처 눈으로 따라갈 새도 없이 빠르게 라멘 두 그릇이 완성되어 우리 앞으로 옮겨졌다. 

(좌)아이가 주문한 카레 라멘, (우)내가 주문한 매운 라멘 

  라멘은 맛있었다. '맛있다', '맛없다'의 단순한 맛 표현밖에 잘 못하는 나지만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다. 처음에 강한 육수 냄새에 순간 멈칫했던 기억은 진작 잊고, 가까운데 있었지만 전혀 몰랐던 그곳에서 우리는 라멘을 맛있게 먹었다. 빠르게 조리해 알맞은 정도로 익힌 얇은 소면도, 돈코츠 라멘 특유의 진한 육수도 라멘집이라는 본분에 무척 충실한 맛이었다. 일본 후쿠오카에 살 뿐, 어느덧 내게 익숙한 장소만 다니던 나는, 그 라멘을 먹으며 진짜 '일본'에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쿠오카의 한 도시 골목 안에, 숨겨진 고수가 운영하는 잘 안 알려진 라멘집. 그 라멘을 먹으며 다시 나는 이방인이 되어 '일본여행'을 온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문제가 있었다면, 그것은 음식을 남길까에 관한 나의 미안함에서 기인했다. 평소 음식을 남기는 일에 큰 거리낌이 없었는데 1인 체제로 운영되는 가게이다 보니 우리가 음식을 남기고 떠나면 주인분이 본인이 만들었지만 우리가 남긴 음식을 버리며 뒷정리를 하실 기분이 쓸쓸하실 것 같다는 혼자의 생각 속에서 발생한 미안함이 앞섰다. 최선을 다했지만, 가족 식사에서 제 몫 이상을 발휘하는 남편 없이 둘이 먹기에 많은 양의 음식을 결국 남겼다.ㅠ 그나마 미안함을 줄여준 것은 양이 큰 아이가 누가 봐도 맛있게 먹는 모습으로 본인몫의 카레라멘을 다 비우고 볶음밥도 열심히 집어 먹었고, 나는 사장님께 맛있다고 말씀드리며 우리가 음식을 남기더라도 결코 맛이 없어서 남기는 것이 아님을 어필한 것이었다. 맛있다고 인사하며 뒷정리를 하고 떠나는 우리에게 주인은 "또 오세요." 인사하며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 주셨는데 진심이 느껴져서 그게 또 좋았다. 그곳을 떠나며 생각했다. 어느 허기진날, 마음도 허전해 진짜 온기가 담긴 음식이 먹고 싶은 날 찾아올 식당이 한 곳 생겼다고. 

 거대한 프랜차이즈 말고, 물론 프랜차이즈도 사장 개인의 역량에 따라 아늑한 곳이 있지만 그럼에도 편애(偏愛)하는 쪽은 역시 개인이 운영하는 개인의 감성이 담긴 가게다. 그러한 식당도, 카페도 좋아하지만 맛이 없음에 실망하거나 불편할까 봐 막상 모험은 잘 안 하고 관성을 핑계로 어느덧 나는 자꾸 안전하게 검증된 장소만 다니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후쿠오카(福岡)는 지리적 위치일 뿐, 사실 인정하기 싫지만 어쩌면 나는 '나의 세계'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은 아주 살짝 옆으로 한걸음 비껴간 덕분에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집에 돌아오니 아직 저녁의 시간이 남아있다. 아이는 게임을 하고 싶다고 요청한다. 평소에는 제한을 두었겠지만 앞서 밝혔듯 일관적이지 않은 양육방침을 가진 나는 관대함을 발휘해 허용한다. 오늘은 내가 적적하니깐. 그리고 오늘은 여행을 다녀온 날이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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