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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Oct 23. 2023

매뉴얼을 사랑하는 사회에서

나의 후쿠오카 육아 이야기

 매뉴얼을 사랑하는 사회에서 아이를 기르고 있다. 


 일본 유치원에 아이를 입학시키기로 결정하고 등원 시 필요한 준비물을 안내받았다. 살펴보니 유인물에 적힌 'ランチョンマット(란쵼맛토)'라는 단어가 생소했다. 뭐지? 쓰임을 알 수 없어 검색해 본 결과 '오찬'의 뜻을 가진 luncheon과 '매트'(mat)가 결합된 단어로써 '식탁에(각자의) 접시나 나이프·포크 등을 놓기 위해 쓰는 깔개'임을 알 수 있었다. 일본은 급식이나 도시락을 먹을 때 항상 식탁 매트를 깔고 먹는 문화임을 알게 되었고, 등원할 때면 늘 '란쵼맛토'를 들려 보냈다. 

이것이 'ランチョンマット(란쵼맛토)', 여러개 구비해 두었다.

 하루는 아이를 등원시킨 후 '란쵼맛토'를 빼먹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차! 싶었지만 '어쩔 수 없지 뭐.' 하고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어갔다. 그날 오후 아이 하원을 위해 데리러 갔는데 선생님께서 걱정 가득한 얼굴로 아이가 '란쵼맛토'를 안 가지고 와서 울고 점심도 안 먹었다는 말씀을 해 주셨다. 놀랐다. 매사 꼼꼼한 성향의 아이여서 그랬을까, 그렇지만 그게 그렇게 울 일인가 싶었고 일단 아이를 다독거린 뒤 먹을거리를 챙겨주었다. 이내 기분이 풀린 아이는 집에 오자 금세 명랑함을 회복했다. 그날 밤 자려고 누웠는데 아이가 말했다. 낮에 점심을 먹으려고 하는데 가방에 '란쵼맛토'가 없었고, 그냥 밥을 먹으려는 아이에게 친구들이 모두 '란쵼맛토'가 없는 모습에 "ダメ"(다메, 안돼)라고 했다고. 순간 가슴에 얇은 칼이 하나 지나갔다. 아이는 당시 일본어도 미숙했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 중이라 많은 것이 서먹했다. 무엇보다 어린 마음에는 또래 집단의 영향력이 절대적인데 모든 친구들이 자기한테 안된다고 하니 그 마음이 얼마나 먹먹했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물론 아이들은 나쁜 의도는 없었다. 늘 밥을 먹을 때 '란쵼맛토' 위에서 먹는 것이 당연했는데, 그것이 없으니 당연히 안된다고 생각했을 것이었다. 챙기지 못해 미안하다고 달래주고, 울지 않아도 괜찮다고, 잘못한 거 아니라고, 그럴 때는 마음속으로라도 "大丈夫(다이죠부, 괜찮아)"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라고 다독이며 아이를 재웠다. 그 후 한동안 아이는 아침에 '란쵼맛토'를 챙겼는지 여러 번 확인한 뒤 등원했고, '란쵼맛토'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유치원 등원 시에는 항상 모자를 착용한다. 赤白帽(아까시로보시)라 불리는 빨강과 흰색의 양면 모자를. 체육복과 모자는 세트라 체육복을 입는 날만 착용하는 줄 알았더니 의상과 관계없이 비 오는 날이나 밀짚모자 등으로 대체하는 한여름을 제외하면 거의 매일 착용하는 모자였다. 하루는 그 모자를 분실했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아서 체육을 하는 날이 아니니 일단 모자 없이 등원시켰다. 맑은 날이었다. 오후에 아이를 하원시키러 데리러 가니 아이들은 모두 야외에서 놀고 있는데 우리 아이는 실내에 있었다. 묻지 않았지만 선생님께서 우리 아이는 오늘 모자가 없어서 실내에서 놀았다고 설명해 주셨다. 모자 없이는 결코 야외에 나갈 수 없는 건가? 그 말을 들으며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뭐랄까. 처음 맞딱 뜨리는 상상할 수 없던 일에 뭔가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불쑥 나와서, 왠지 아이에게 더 다정하고 싶었고 평소보다 더욱 밝게 아이에게 인사하며 함께 하원했다. 모자는 물론 그날로 다시 구매했다. 

(좌, 가운데) 赤白帽(아까시로보시)라 불리우는 빨강과 흰색의 양면 모자, (우)유치원 체육복은 반팔 한 종류이다. 한겨울을 제외하고 체육수업의 날 사계절 착용한다.

 아이가 여름에 유치원에서 1박 2일의 캠핑을 다녀왔다. 필요하다 판단되는 물건을 들려 보내리라 생각했는데 유인물에 친히 안내되어 있었다. 네 개의 꾸러미를 만들어 1번 꾸러미는 목욕세트로 잠옷 수건 속옷을 담고, 2번 꾸러미는 다음날 입을 옷 세트로 바지 양말 땀 닦는 수건을 담고, 3번 꾸러미는 양치 세트로 칫솔 치약 양치컵 작은 수건을 담고, 4번 꾸러미는 예비용품(여벌의 옷 양말 티슈 등등)을 담아 모든 것에 이름을 써서 준비해 오라는 유인물에 나는 탄복했다. 이곳은 매뉴얼에 특화된 곳이구나. 매뉴얼에 진심이구나. 

(좌)(가운데)메뉴얼대로 짐을 꾸려서 번호를 붙여 꾸러미를 만들었다. (우)각 꾸러미별로 구분하기 쉽게 이름과 번호를 표기법도 안내되어 있다.

매뉴얼에 진심인 사회에서 아이를 기르고 있다. 

 매뉴얼이 정해진 세계는 그 세계에서 그 시간만큼은 정답이라 일컬어지는 행위가 있으니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한 측면에서는 안전할지 모르지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이면에 곧잘 '융통성 부족'이 따라붙을 것에 관한 우려를 느낀다. 언젠가 지인들과 식당에 방문했을 때였다. 식당에서는 주문 시 단품메뉴(돈까스)에 얼마간의 돈을 추가로 지불하면 셋트(미니우동 추가)로 변경가능한 서비스가 있었다. 우리는 단품 메뉴를 주문해서 먹다가 아이가 우동을 먹고 싶어 해서 직원을 불러 세트 변경을 요청했다. 흔쾌히 변경해 줄 것을 기대했던 것은 오산이었다. 주문 시 이미 단품을 주문했기에 변경이 안되고, 세트 메뉴보다 비싼 금액에 우동을 추가 주문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안내를 받아 당황했던 경험이 있다. '매뉴얼'에 따르면 잘못된 부분은 없겠지만 융통성을 발휘해도 괜찮은 부분이 아닐까라는 생각은 속으로 삼켰다. 

 물론 이곳에서도 사람에 따라 같은 상황이라도 다르게 행동하는 부분이 있고, 상황에 따라 다를 것이며 나의 적은 경험치로 인해 예시로 들었던 일은 빙산에 일각에 불과하겠지만, 속해있는 동안 필연적으로 맞닥뜨릴 '매뉴얼'에 관해 생각해 보았다. 그 매뉴얼의 문화 속에서 성장하고 있는 아이를 떠올려본다. 정답은 없겠지만, 아이와 함께 지내며 이끌어갈 방향에 관해서도 생각해 본다. 

 부디 아이가 그것이 칼이 된다면 피해 갈 수 있는 민첩성을 갖기를, 그것에 치이면 털고 일어날 수 있는 강인함을 갖기를, 때로는 그 너머의 다른 길을 볼 수 있는 융통성을 갖기를, 부디 그것을 알아챌 수 있는 예리함을 갖기를, 그렇게 아이가 커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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