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밥을 사드려도 될까요
내가 비교적 편하게 수긍할 수 있는 밥값 더치페이의 최소 인원은 세명이다. 둘의 사적인 만남이라면 안 친한 사람(안 친한 동료 정도?)이면 모르지만 친구일 경우에는 허용하기 불편하다. 단둘이 만날 정도라면 꽤 친하다는 건데 그 사이에서 '자기 밥값은 자기가'라고 생각하면 매정한 느낌이 든다. 영화를 본다거나, 입장료를 지불하는 정도라면 모르지만... 나는 그렇다.
이제는 우리나라도 더치페이가 보편화되었지만 그럼에도 일본을 따라가려면 멀었다. 내 생각에는 한참 멀었다. 식사는 말할 것도 없고, 음료수 하나(카페 말고 자판기 음료) 아이스크림 한 개라도 마음껏 사줄 수 없다. 적잖이 당황해하는 반응이나 다음을 기약하는 인사를 듣게 되며, 의례적인 인사가 아니고 반드시 다음이 있다. 얻어먹지 않는 건 상관없지만, 사주는 것도 좀처럼 허용되지 않는다. 어쩌면 이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이 문화가 나는 몇 단계의 생각을 거쳐야만 비로소 받아들여진다. 마음 깊숙이는 아니지만 표면적인 정도까지는 받아들인다.
- 영수증을 손에 들고 읽었다. 자신의 홍차 값은 400엔이다. 항상 이 정도면 자신이 낸다. 사에처럼 파견사원인 경우는 월급이 적어서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번엔 한 푼도 내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사에는 쓱 하고 이쪽을 보더니 느릿느릿 가방에서 지갑을 꺼냈다. -가키야 미우, 40세 미혼출산
-상대방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며 질문을 막아주었을 때, 자카코는 마음속으로 안심했다. 당사자만 남겨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대에서 가서 각자 계산했다. -가키야 미우, 우리 애가 결혼을 안 해 서요
'가키야 미우'라는 일본 작가의 글을 좋아한다. 사회의 여러 현상들을 예리하게 소설에 반영하고 재미와 가독성이 뛰어난 글을 쓰는 분인데, 문제라면 한국어 번역본의 제목들일까. 40세 미혼출산, 우리 애가 결혼을 안 해서요, 당신의 살을 빼드립니다... 나로서는 오픈된 장소에서는 굳이 읽고 싶지 않은 제목들이다. 아무튼 이분의 책에서도 종종 더치페이가 등장한다. 맞선 현장에서 조차 더치페이가 등장하는 장면은 이곳에서 지내다 보니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일본에서 오래 지낸 한국 친구들의 경우도 이러한 모습이 몸에 배어 있어 종종 이곳에서 친구가 된 한국인 지인들을 만날 때면 나는 또 미세하게 문화의 차이에 부딪친다. 내가 만나자고 했거나, 혹은 내 쪽에서 부탁 사항이 있었거나 등등의 이유로 밥을 사려고 해도 당황하거나 엄청 미안해하거나 그러지 말고 각자 내자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합리적이라 여겨지면서도, 매정하다는 생각의 한끝을 지울 수 없음은 나의 문제일까. 심지어 이곳은 커플 더치페이도 보편적인지 남편과 밥을 먹으러 가면 아이가 있을 때는 한꺼번에 계산해 주지만, 남편과 둘이면 직원에게 질문을 받을 때도 있다. "비용 계산은 각자 하십니까? 함께 하십니까? "
최근 거취 관련하여 고민이 깊었다. (몹시 고민되는 와중에 한국에서 작은 책방을 차리는 상상을 하며 조금 행복했다. 혼자 도시까지 정해봤다. 사랑하는 도시 삼송으로.) 만약 이 도시를 떠난다고 생각하니 모든 게 애틋했고, 일본인 친구와의 헤어짐이 가장 슬플 것 같아 식사 약속을 잡았다. 우연히 발견한 레스토랑에 꼭 함께 가고 싶어서 밥을 사겠다고 친구를 불러냈다. 어쩌다 보니 그날은 나의 생일이었고, 친구는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나를 위한 맞춤 선물을 준비해 드레스업 하고 나타났다.
이미 거취에 관한 고민은 완료한 시점이라 헤어짐을 위한 식사는 아니었지만, 함께하는 자체로 의미는 깊었다. 자신이 주문한 요리를 각자 먹는 일본과 달리 한국은 나눠먹는다며 앞접시를 요청해 서로의 음식을 나누며 문화적인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다. 그리고 모든 식사를 마치고 계산해야 할 때.. 사정했다. ㅋㅋㅋ제발 내가 밥을 살 수 있게 해달라고. 한사코 안된다는 친구에게 한국은 생일자가 밥을 사는 경우가 많고, 초대받은 사람은 선물을 준비한다 물론 이 자리는 파티도 뭐도 아니고 함께 하는 게 기쁘지만... 등등 구구절절 설명해서 간신히... 밥을 사 드렸다.... 왠지 친구는 빠른 시일 내에 다시 식사 약속을 잡을 것 같다.ㅠ
아무튼 그래서 더치페이를 사랑하는 나라에 한동안 머물며, 이 문화에 스며들기 위해 몇 차례 다시 헤맬 예정이다.
덧. '태지원'작가님의 저서 '구두를 신은 세계사'에는 더치페이에 관한 자세한 어원이 나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