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진 Oct 07. 2022

군인의 사생활

 사적((私的)이어야겠지만...

 군인 시절 주어진 개인 시간은 휴가 및 주말, 전투휴무와 비 공식적이지만 당직근무를 마친 다음날 정도였다. 잠시나마 군인이 아닌 나 개인으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군인의 삶과의 경계는 (자주) 희미했다. 

 휴가는 주말 제외 연간 20일 정도 주어졌다. 주어진 휴가를 모두 사용하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무리가 따랐고, 절반은 커녕 1/4조차 제대로 못쓰거나 혹은 안 쓰는 분들도 있었다. 본인은 못 쓴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안 쓰는 것 같았던 판단은 접어두고, 부대에 상주하는 일이 숨 쉬듯 자연스러운 분들을 나는 끝내 내 관점으로는 이해하지 못했다. 

 연간 주어진 휴가일수를 모두 채우지 못한다면 상한선은 있었지만, 일정 부분 연가보상비가 지급되었다. 나는 연간 보상비보다는 휴가를 원했다. 주어진 휴가를 모두 쓰고 싶었다. 휴가를 연달아 붙이고 주말을 이용해서 열흘만 연속으로 쉬고 싶다는 소박하지만 소박하지 않았던 바람이 있었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임관 날이 생각난다. 9박 10일의 임관 휴가를 떠나는 우리들에게 훈육장교님의 군 생활의 마지막인 긴 휴가가 될 테니 즐기라고 하셨던 말씀은 녹록지 않은 야전생활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었다. 주말은 휴가일수에 포함되지 않으므로 많아야 월 1회 월요일이나 금요일에 평일 하루, 길어야 이틀 휴가를 쓰는 것이 고작이었고, 훈련이나 긴급한 일이 생긴 달은 그 마저도 쓰지 못했다. 일 년에 단 한번 여름휴가를 평일 3일 쓸 수 있었는데 주말 포함 5일을 쉬는 일이 1년에 최대 길게 쉴 수 있는 날이었다. 결혼을 한다면 결혼 휴가로 평일 5일이 주어지는데, 나는 군 생활할 때 결혼을 안 했으므로 그 조차 누려보지 못했다. 

 휴가는 공식적으로 자정이 지난 시간부터 적용이 되기에 밤 12시가 지난 뒤나 다음날 휴가 출발을 해야 했으나 부득이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나는 번번이 마음의 소리를 따라 휴가를 떠났다. 소대장 시절 휴가가 있는 날이면 퇴근하고 최대한 빨리 집으로 와서 허겁지겁 사복으로 갈아입고, 손에 잡히는 대로 옷가지와 소지품들을 캐리어에 밀어 넣은 뒤 누가 볼세라 콜택시를 불러서 기차역으로 가서 탈 수 있는 가장 빠른 시간대의 KTX를 타고 본가로 향했다. 한 손에는 핸드폰은 꼭 쥔 채로 수시로 확인하며 만약 있을 지모를 호출에 대비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자정이 지나면 안심하곤 했다. 나는 마땅히 해야 하는 대로 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나의 숨통이었다. 두 번째 부대는 경기도 양주에 있었다. 자차로 본가에서 1시간이면 오갈 수 있는 그곳에서는 휴가가 있는 날이면 퇴근길에 차를 몰고 위병소를 지나 바로 본가로 직행했다. 어차피 자차로 이동하니 의상이 전투복이어도 상관없었다. 뭐에 쫓기다시피 한시가 바쁘게 부랴부랴 부대를 벗어났고, 최대한 늦게 돌아오려 했다.  

 군인이던 시절 늘 휴가를 기다렸다. 휴가 때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워 잠들기 싫었을 정도로 휴가가 소중했는데, 언제부터인지 휴가 때 누군가를 만나는 일이 부담스러워졌다. 군생활에 찌들어가며 심적으로 많이 위축되었기에 누군가를 만나서 눈을 마주치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도 버거웠고, 스스로 느끼는 내 모습이 초라해서 친구들을 내심 멀리하던 때도 있었다. 친구들과 나는 비슷한 시기 입대와 입사를 하며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친구들은 사회물을 먹을수록 세련되고 예뻐졌고 늘 멋진 차림새로 모임에 등장했다. 예쁘고 멋진 그들을 보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내 모습이 어떨까 신경이 쓰였다. 매일 전투복을 입고 탄약고에서 일하던 나는 가슴팍과 발목에는 전투복으로 인해 그을린 티가 역력했으며, 전투복과 트레이닝복만 입다 보니 예쁜 사복도 없었고, 옷을 고르는 센스마저 잃었다. 그러한 내가 너무 안 예뻐 보이지는 않을까, 지금 이곳에 내가 어울리는 모습일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오갔다. 서로 간의 공감대도 점점 줄었던 우리는 어느덧 간극이 의식될 정도로 다른 세계에 속해있었다. 친구들의 직장 이야기와 연애 이야기에 나는 크게 공감이 되지 않았고, 나의 군대 이야기에 친구들이 흥미를 느낄 리 만무했다. 그리고 나는 침체된 나의 마음을 어르고 달래기에도 힘에 겨워 친구들을 만날 에너지도 없었다. 전역 후 다시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우리는 이전의 관계를 회복했지만 당시는 그들이 멀게 느껴지고, 어느덧 그들을 외면하고 있는 내가 속상했다. 

 소대장 시절의 주말은 휴가가 아닐 경우 군생활과의 경계가 흐릿할 때가 많았다. 당직근무나 훈련 준비, 각종 감사 및 점검 등의 행사들을 앞두고 출근해야 하는 날도 많았으며, 토요일에는 간간히 생활관 회식과 소대원들 외박에 이따금 얼굴을 비추기도하면 금방 하루가 갔다. 일요일은 부대 내에 있는 종교행사에 참석하면 반나절이 가버렸고 장보기나 서점 방문 등 밀린 일들을 하다 보면 금방 밤이 되었다. 민간 세상(!)과의 교류가 그리웠다. 교회라도 외부에 있는 교회에 나가볼까 했는데, 때맞춰 외부에 있던 나의 숙소가 신규 BOQ완공으로 위병소 앞으로 이전되며 그조차 무산되었다. 아주 가끔 아무 스케줄도 없던 주말을 보낼 때도 있었지만, 그건 개인으로서 삶의 기반이 없던 나를 데리고 긴 외로움의 시간을 견뎌야 함을 뜻했다. 옆방에 동기가 있었지만, 동기는 가까이에 있는 본가를 자주 방문했기에 가끔씩 나와 어울릴 뿐이었고, 부대 간부들과 함께 식사 약속을 잡을 때도 있었지만 함께 일을 하는 관계이다 보니 온전히 편안한 시간은 아니었다. 하루는 숙소에서 느껴지는 지루함과 고요함, 외로움의 무게가 너무 커서 혼자 시내에 나가봤는데, 창장님 부부의 눈에 띄어 굉장히 쓸쓸해 보인다는 이미지가 덧입혀졌고, 그 뒤로는 혼자인 날의 외출도 꺼려졌다. 한편으로는 조금 우습지만 가발과 뿔테 안경 등을 마련해 다른 사람처럼 보이도록 하고 다녀야 할까 생각도 해봤다. 혼자일 때의 식사는 뻔했다. 반조리 식품이나 배달음식, 인스턴트 등 한 끼를 때운다는 정도를 벗어나지 않았다. 사는 일에 큰 즐거움이 있을 리 만무했다.  

 전투 휴무나 당직근무 다음날도 개인 시간이 허락되었지만, 그날은 휴무에 초점을 맞춰야 했기에 공연히 돌아다니다 누군가에 눈에 띄면 좋을 게 없었다. 그날은 주로 집에서 자면서 시간을 보냈다. 늘 피로 누적이었기에 자고 또 자도 잠이 왔다. 하루 종일 숙소에서 잠만 자던 그때의 나를 생각하면 지금도 조금 쓸쓸하다. 다행히 두 번째 부대에서는 주말은 개인 시간이 많이 허용되었다. 본가 가까이에 있던 그 부대에서 쉬는 날은 공식적으로 때로는 비 공식적으로 꽤 자주 본가를 오갔기에 외로움에 무게가 덜어졌고, 참모부 소속이었던 나는 따로 병력도 거느리고 있지 않아 근무가 없거나 급히 처리해야 할 업무가 없으면 출근하지 않아도 되어서 주말을 조금씩 누릴 수 있었다. 조금씩 주말이 자유로워져 갈수록 나는 어느덧 전역의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구름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행복했던 오늘


매거진의 이전글 보안감사를 준비하던 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