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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Nov 09. 2022

정비대대의 혹한기 훈련

잠시! 다른 세계로. 

 정비대대 전입 후 첫 훈련은 혹한기 훈련이었다. 후방 탄약부대 시절 숙영지 훈련과 달리, 이번 훈련은 부대를 이동해 며칠간 임시숙영지에서 지내다 오는 야외 훈련이다. 후보생 시절 이후의 야외 훈련은 처음이고, 혹한기의 특수상황과 전입 후 얼마 되지 않아 낯선 상황까지 겹쳐 긴장감이 상당했다. 훈련을 앞두고 가슴에 큰 돌덩이가 하나 얹혀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후방지역에서 군생활을 하기도 했고, 혹한기 훈련 때는 이상고온현상으로 강추위를 피했던 터라 훈련을 위한 짐을 꾸리며 세면도구와 짧은 시간 발열하는 얇은 핫팩 몇 개만 지참할 정도로 혹한기 추위에 무지했다. 06시부터 예정된 훈련을 위해 이른 새벽 집을 나섰다. 동트기 얼마 전 새벽인데도 겨울의 새벽은 한밤중 같다. 잠이 덜 깨서 몽롱한 정신을 따뜻하고 달콤한 커피 한잔으로 달래주니 그제야 마음이 조금 차분해진다.  

 군인 시절 나는 훈련이 싫었다. 훈련은 군인으로서의 정체성이고, 필수 과업이었지만 적응하기 어려웠다. 평소와 다른 기류도 싫었고, 훈련의 중추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지휘통제실 근무자의 위치도 부담이었다. 훈련에 돌입하고 상황 유지를 위해 모두가 긴장해있는 날카로운 분위기 속에 있다 보면 신경이 곤두섰고, 그 긴장감은 좀처럼 놓아지지 않았다. 훈련 진행 상황을 파악해 사단과 교신하고, 상관에게 보고하고, 중대에 상황을 전파하며 지속적으로 능동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입장도 피곤했다. 그 상황을 몸은 잘 견디지를 못했다. 간신히 마인드 컨트롤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다 보니 훈련 시작 시간이 되었고, 준비태세가 발령되었다. 신속히 단독 군장을 착용하고 위장을 하고, ATCIS 및 유선으로 사단 사령부와 교신하며 부대이동을 준비했다. (부대이동:부여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전투력을 유지한 상태로 부대를 요구하는 시간과 장소에 위치시키는 것-군사용어사전 참조) 부대 내 모든 물건들을 정리해서 숙영지를 비우고 차에 싣고 새로운 주둔지로 이동하는 그 번거로움이라니.. 급하게 사무실 내부를 비우면 시간에 쫓길 것 같아 주말에 출근해서 훈련계획도 다시 살펴보고, 짐을 미리 정리해 두었더니 그나마 조금 여유가 있다. 미리 정해둔 차량에 인원 및 장비 탑승을 완료하고, 우리는 대규모로 새로운 숙영지로 이동했다. 훈련상황으로 인해 부대를 이동해도 기존 부대를 완전히 비워두면 안 되기에, 미리 협조를 마친 인근 부대에서 파견 온 인원들과의 인수인계도 완료했다.

 이동할 장소는 그리 멀지 않았다. 미리 계획해 둔 곳에 부서별, 중대별로 천막을 설치해 4일간 지낼 임시 숙영지를 만들었다. 평소에는 대대장 실과 지휘통제실은 근접하되 별도의 공간으로 분리되어있지만, 훈련 간에는 대대장님이 지휘통제실에 상주하고 사단 사령부 인원들도 수시로 방문하기에 지휘통제실은 부담되는 공간이었다. 가뜩이나 낯 가리는 성격에 경력상의 위치도 막내 쪽에 가까웠던 나는 외부 훈련상황과 지휘통제실 돌아가는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서 이제 막 시작된 훈련이지만 피로감이 엄습했다. 오래된 군용 천막으로 구축한 임시 숙영지는 과거의 어느 한 시절이라 해도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가 갖고 있던 핸드폰 정도가 그곳이 현대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겪어보니 야외 훈련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첫날의 부대이동까지가 하이라이트고, 그 뒤로는 그렇게 긴박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단 전체 훈련이므로 대대별로 돌아가며 상황이 주어지고, 특별한 훈련이 없는 시간 찾아오는 조용한 평화가 있었고 아날로그적 환경에서 빚어지는 낭만도 있었다. 오랜 군 생활을 겪어 노련하신 주임원사님이 구형 난로 위 주전자에 한약재를 넣고 끓인 맛있는 차를 마시며 동료들과 시간을 보내고, 행정 계원들과 대화를 나누던 시간도 좋았다. 지휘통제실 계원들과는 직접적으로 이해관계가 얽힌 상황이 아니고 내가 지도해야 할 입장도 아니었기에 소대장 시절 소대원들보다 겪없이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훈련장에서는 머릿속이 단순해졌다. 사방이 훈련장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며칠간 지내다 보면 바깥세상이 잠시 잊혔다. 내내 머릿속을 떠다니는 고민들과 복잡한 생각으로부터 잠시 멀어져 훈련 이외의 상황에 대해서는 생각을 비울 수 있어서 좋았다. 

 야간에는 2시간 단위로 지휘통제실 근무에 편성되었다. 훈련장의 밤은 매섭게 추웠다. 바람을 막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공터였기에 찬바람은 고스란히 천막 안으로 들이쳤고, 얼어붙은 바닥에서는 냉기가 올라왔다. 부대 내 여군 4명과 한 텐트에서 잤는데, 가운데 난로가 있었지만 근거리에 미세한 온기가 느껴질 정도여서 침낭 안에서 한기에 맞서다 보면 잠은 잘 오지 않았다. 준비해온 핫팩은 얼어붙은 손조차 제대로 녹여주지 못할 정도로 빈약했다. 다행히 야간 근무 교대시간에 나의 빈약한 핫팩을 보신 배테랑 수송관께서 군용 핫팩을 나눠주셔서 비로소 몸을 녹일 수 있었다. 정말이지 군용 핫팩의 성능은 찬사 받아 마땅하다. 두세 개 정도 몸에 품고 목덜미나 등 같은 곳을 데워주면, 온기가 몸 전체에 퍼져서 혹한의 침낭 속에서도 안락함이 느껴졌다. 이듬해 혹한기에는 군용 핫팩을 잔뜩 준비했음은 물론이고, 전역한 후에도 한겨울의 외출에는 군용 핫팩이 생각났다. 

  그렇게 훈련장에서 며칠을 보내고, 사단장님의 현장지도를 넘기고 나면 훈련 상황도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훈련 마지막 날 아침을 먹고, 모두가 기다리던 상황 종료 명령이 마침내 떨어졌다. 상황 종료 명령을 접수하자마자 임시 숙영지가 철거되는 속도는 숙영지 구축의 속도와는 비할바가 못 되었다.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빛의 속도로 임시 막사를 철거하고 인원 장비 차량 탑승에 완료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며칠 만에 복귀한 숙영지는 안락하고 평온했다. 금방 벗겨질 콩깍지지만 평소 불편함을 느꼈던 낡은 시설조차 편안하게 느껴졌다. 

 전원 무사 복귀 보고를 끝으로 훈련은 끝났다. 드디어 올해의 혹한기 훈련이 끝난 것이다. 아직 혹한기 행군이 남았고 사후 강평이 며칠 뒤에 있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일단 연중 가장 부담되는 과업 중 하나를 끝냈다. 숙소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오늘 밤은 편히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주말은 따뜻한 물에 오래도록 몸을 담그고, 맛있는 걸 먹어야겠다. 아주 따뜻하고도 맛있는 음식을 먹고 오래도록 자고 일어나야겠다. 그리고 며칠 전의 나에게도 알려줘야지. 고생했다고. 막상 해보니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가벼운 일이었다고. 용기를 내서 남은 군생활도 잘 지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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