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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Oct 28. 2022

전역 후의 시간들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 

 5년의 군 생활이 마침내 끝났다. 오래도록 기다리던 2013년 7월 31일이었다. 주어졌던 많은 업무들과 계급으로 엮인 인간관계, 통제된 생활, 수시로 울리던 전화벨과 불시 호출까지 모든 것에서 놓여났다. 군과 관련된 모든 것이 떠날 때 군생활의 어느 시점부터 나를 점령하던 무기력과 우울감은 나와 함께 남았다. 30대에 접어든 지 얼마 되지 않던 나는 여전히 젊었으나 그만 삶에서 길을 잃어버렸다. 그렇게 여긴 건지 정말로 길을 잃었는지는 모르겠다. 인생의 한 복판에 홀로 덩그러니 던져서 삶을 마주하게 되자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먼저 필요했던 일은 삶에 나의 자리를 만들어 주는 일이었다. 지난 시간 동안 나의 삶은 대부분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흐르고 있었으며, 온전히 깨어있던 시간이 드물었다. 나는 그 시간 속의 어느 한 부분도 제대로 점령하지 못한 채 그저 살아지는 대로 살았고, 나의 껍데기들이 그 시간들을 영혼 없이 지탱하고 있었다. 내가 없이 흐르던 나의 삶 어딘가를 억지로라도 비집고 들어가 이제는 나의 자리를 만들어야 했다. 

 막연한 시간이었다. 가족들, 친구들, 주변 사람들, 내가 지낼 수 있는 집 모두 그대로였고 그 가운데 여전히 나의 자리도 있었지만 그것들이 길 잃은 삶의 궁극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나는 근본적인 삶의 방향을 위해 고민해야 했다. 긴 시간 동안 진짜 삶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며 스스로를 속이고 위로해왔지만 이제 더는 한 번뿐인 삶의 시간들을 의식 없이 보낼 수는 없었다. 갑자기 군인이 되었던 그날처럼 갑자기 세상 밖으로 던져져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던 내게 주어진 것은 '일상'이었다. 이제는 그것을 붙잡아야 했다. 깨어서 일상을 맞이하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조금 낯설기조차 했으나 나는 그저 의지를 가지고 주어진 일상을 순간순간 살았다. 다시 무엇인가에 묶인다는 것은 너무도 내키지 않는 일이었기에 배우고 싶던 요가학원에는 등록하지 않았다. 자격증이라던가 대학원 등 그 어떤 교육기관에도 등록하지 않았고 취미생활도 시작하지 않았다. 무엇이 되었던지 나를 얽매이게 할 것 같은 것은 피하고 그저 의식의 흐름에 따라 일상 속을 떠돌았다. 느긋하게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친구들을 만나고, 커피를 마시고, 여행을 떠나고, 남자 친구와 시간을 보내고... 느릿느릿 하루를 보내다 보면 저녁이 찾아왔고, 저녁을 먹고는 걷기 위해 집을 나섰다. 한강과 그 끝자락이 맞닿아 있는 집 근처의 공원을 강이 보일 때까지 걷다 보면 삶을 견딜만했다. 불행하지는 않았지만 특별히 행복하지도 않았던 그 시간들 속에서 온갖 잡념들에 사로잡혀 있을 때 걷다 보면 부정적인 생각들로부터 조금 멀어질 수 있었다. 그렇게 조금씩 깨어있는 일상을 보내며 삶 속에 나의 자리를 찾으려 노력했다. 

 느릿느릿 살아가는 일상의 많은 시간들은 여전히 비어있었고 나는 공허했다. 군생활에서 느꼈던 공허감에는 전역이라는 끝이 있었지만, 전역 후의 공허에는 끝을 모르는 아득함이 이어졌다. 비어있는 일상의 시간들을 메꾸기 위해 책을 읽었다. 시간의 흐름을 견디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는 해야 했고, 그 무엇은 결코 부담되는 어떤 것이어서는 안 되었다. 마음속의 공허감을 줄이기 위해, 시간의 흐름을 견디기 위해 나는 책들을 읽어치웠다. 여러 개의 도서관과 가족들의 명의로 된 대출증까지 활용해 마음이 끌리는 책들을 수도 없이 읽으며 나는 일상의 비어있는 시간들을 채워가고 마음을 치유해갔다. 

 몸과 마음의 소리를 따라 느리게 일상을 살다 보니 결코 내 것 같지 않았던 삶이 다시 나를 찾아오고 있었고 조금씩 무언가를 원하는 바람이 마음에 깃들었다. 전역 후 8개월 만의 일이었다. 다시 사회로 들어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을 때, 적당한 일자리를 찾게 되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파트타임 업무를 시작했다. 대안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주 1회 중국어를 가르치는 일과 무역회사의 파트타임 업무는 큰 부담 없이 설렘과 기분 좋은 긴장감으로 임할 수 있는 업무였고 한 번쯤 대학 전공을 활용하고 싶고, 일반 회사 생활도 겪어보고 싶던 내게 감사한 기회였다. 느리다 못해 지루해지고 있던 생활과 빠르게 줄어드는 통장의 잔고도 얼마간 나를 부추기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나는 그렇게 삶에서 나의 자리를 찾고, 파트타임 업무를 병행하며 새로운 취업을 준비했다. 그제야 비로소 한 시절을 마무리 짓고, 새로운 걸음을 뗄 준비가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나는 여전히 젊었고 삶은 계속되고 있었기에 다시 용기를 내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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